정축하성(丁丑下城)
정축하성(丁丑下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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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축하성(丁丑下城)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농성 59일만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 1637년 2월 24일(정축년 음력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한 것을 말합니다.
흔히, 삼전도의 굴욕(三田渡의 屈辱)이라고 표현됩니다.
다만 당시 인조는 절대 항복하지 않고 단순히 성에서 나온다는 뜻인 하성이라고 표현했고, 신하들에게도 이를 강요했습니다.
삼전도(三田渡)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및 석촌동 부근에 있던 나루터였습니다.
도(渡)는 섬이 아니라 나루터라는 뜻으로, 한강에 대교가 없던 과거에는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강북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사건을 적어둔 비석 삼전도비가 원래 세워진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는데 2007년에 페인트 또는 스프레이로 테러가 있은 후 2010년에 복원하여 원래 위치인 롯데월드 석촌호수 근처로 돌아갔습니다.
정축하성으로 남한산성 공성전이 종료되고 병자호란이 끝났습니다.
병자호란과 정축하성의 전개과정
1636년 봄부터 청나라는 황제국이 되자 조선에게 이에 맞는 대접을 요구했으나, 조선측이 청나라의 세폐요구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심각한 외교 마찰을 빚었습니다.
이에 조선측은 주전론으로 기울어졌고, 청나라측도 음력 12월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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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정묘호란, 전개도, 출처 : 나무위키
청나라군은 10년 전 정묘호란를 반면교사로 삼아,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조선왕에 대한 참수작전을 위해 기병으로 돌진했고, 결국 압록강을 건넌지 10일도 안되어 한성까지 이르렀습니다.
인조와 소현세자를 비롯한 조선 조정은 먼저 봉림대군이 선발대로 간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 했으나, 청나라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점거하여 결국 남한산성에서 농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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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왼쪽),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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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후발대를 따라 직접 친정하여 조선으로 와 조선측을 압박했습니다.
조선 조정은 약 한달간 만여명의 군사로 농성했으나 한편으로는 포위한 청나라군과 계속 사신을 주고받는 등 계속 화친협상을 벌이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산성을 구출하러 전국에서 달려온 병력(근왕병)이 모조리 패전했고, 식량과 연료도 바닥난데다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져 반란의 움직임을 보이자 1월 중순에 조선 조정 내부적으로는 결국 항복을 결정했습니다.
이에 최명길과 용골대가 사신으로 양 진영을 오가며 계속 항복 조건을 협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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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신들을 청나라에 잡아 보내고, 심양에 세자와 왕자를 인질로 보내 세폐를 늘리며, 조선군이 청나라로 대명전쟁 원병을 보낸다는 등 다른 조건은 대체로 합의했으나, 청나라 측은 황제가 조선까지 친정했으니 항복을 하려면 조선왕이 황제를 만나 삼궤구고두례라는 절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인조는 정강의 변처럼 본인이 청나라로 잡혀갈까봐 성 밖으로 나와 황제 앞에서 항복 의식을 할 수 없다고 고집해 항복을 결정하고도 휴전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측이 이런 고집을 피우는 와중에 도르곤이 이끄는 청나라군은 음력 1월 22일 강화도를 함락시켜 봉림대군을 포로로 잡자, 봉림대군은 인조에게 본인이 포로가 되었음을 알리는 계문을 썼습니다.
청나라가 이를 조선에 전달하여 조선 조정은 강화도가 함락되었음을 알았고, 1월 23일부터는 청나라가 홍이포를 계속 쏘아 성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이렇게 되니 인조도 결국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협상에 따라 2월 24일 인조는 성을 나올 때 죄인의 신분으로 정문인 북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왔으며, 곤룡포가 아닌 남염의를 입었습니다.
하성 당일에는 용골대가 이끄는 청군 부대가 호위를 나와 인조는 신하 및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용골대의 호위를 받으며 청태종이 진을 친 삼전도로 출발했습니다.
청군 본진에 다다르니 홍타이지는 단을 쌓아 앉았고, 청군 장수들을 좌우에 옹립한 가운데 청나라에서 풍악을 울렸는데 이는 모두 중국(명나라) 음악이었습니다.
인조가 다다르자, 홍타이지는 "지난 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는 말을 용골대를 시켜 전했고, 인조는 "성은이 망극하다"는 말을 전한 뒤 삼배구고두례를 행했습니다.
홍타이지는 황제의 예법에 따라 남면(남쪽을 향해 앉고)하고, 인조는 그 왼쪽(동쪽)에 앉아 서쪽을 향했습니다.
맞은 편에는 청나라 왕자 4인이 앉았으며, 이어 청 태종을 중심으로 양 옆에 청나라 신하와 조선 신하들이 나란히 앉은 후 술잔이 돌며 연회를 시작했습니다.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라는 뜻으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라고 칭한다.
명나라식 예법은 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로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인데, 청나라는 조금 수정하여 한번 무릎 꿇어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숙이는 것을 총 세 번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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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오랑캐라 여기던 만주족 군대에 굴복했다는 것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다고 자부하던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기념해 삼전도에 기념비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향후 청나라 사신의 필수 코스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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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예전모습(왼쪽), 현재 삼전도비(오른쪽),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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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의 위치변화(과거 동그라미 현재 네모), 출처 : 나무위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장수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 : 의식 순서를 소리내어 읽는 것)하게 하였다. 상이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였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 기사
청태종실록의 기록
예부의 관원이…이종의 반차(班次)에 대해 주청하자, 상이 말씀하시길, "위세로써 그를 떨게 하는 것은 덕(德)으로써 그를 품는 것만 못하다. 조선의 왕은 비록 병세에 몰려서 내귀하였지만, 역시 한 나라의 왕이다." 명을 내려 앞으로 다가와 좌측에 앉도록 했다. 예부의 관원이 의장 바깥으로부터 왕을 안내하여 북측을 향하면서 들어오게 하였고, 단 아래에 이르러 동쪽에 앉아 서쪽을 향하게 하였다. 그다음으로 좌측에는 호쇼이 친왕, 도로이 군왕, 도로이 버이러 등의 순서로 앉았고, 이종의 장자 이왕이 버아러의 아래에 앉았다. 우측은 호쇼이 친왕, 도로이 군왕, 도로이 버이러 등의 순서로 앉았고, 이종의 차자 이호와 3자 이요 역시 버이러의 아래에 앉았다.
《청태종실록》 33권 숭덕 2년 정월 30일 1번째 기사
정축하성(丁丑下城)의 결과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패전해 청나라에 항복했고, 청나라와 조공책봉관계를 맺어 심양으로 방물과 세폐를 조공하고 청 황제의 책봉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동안 상국으로 섬긴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새롭게 청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이외에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세 정승(의정부)과 여섯 판서(6조)의 질자들이 잡혀가고, 삼학사는 심양에 끌려가 청나라 측의 전향 요구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여 처형당했습니다.
조공책봉관계가 성립되면서 조선은 청의 연호와 책력을 채택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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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청나라에 원한을 품었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또다시 청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기 위해 청나라 연호인 "숭덕" 채택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청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등 사대하기를 거부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그들의 상소문을 접수하지 않도록 명령했습니다.
인조와 더불어 김류와 김자점은 각각 입관을 축하하는 사신에 중신을 보내자고 하거나, 임경업을 옥사시키고 압송의 은혜에 대해 사대의 도리로 별도의 사신단을 파견하자고 주장하는 등 상국으로부터 권력을 보전받고자 애썼습니다.
조선의 장병들은 가도 정벌과 명청전쟁 그리고 청-러시아 국경분쟁 등으로 인해 9차례나 징병되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외에 청나라군이 철수하며 수많은 조선인을 납치해 노예로 끌고 가자, 조선 측은 청나라에 포로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청나라는 포로가 병사 개인 재산이라며 몸값을 내야 돌려주겠다는 답만 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몸값을 내고 애써 돌아왔다고 해도 기혼 여성은 환향녀 문제로 억울하게 이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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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기
인조의 명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광해군의 친금에 가까운 외교정책에 반기를 들고 반정을 일으켰기 때문에, 인조의 외교정책은 친명배금으로 명확했으며, 이에 따른 청과의 갈등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3년만에 정묘호란이, 1637년에는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결국은 정축하성 즉, 삼전도의 굴육까지 당하게 됩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국민들이 희생되었으며, 외교관계에서는 조공책봉관계가 형성되어 많은 공물과 세폐을 조공하고 청황제의 책봉을 받고 청의 연호를 사용합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됩니다. 청나라에 볼모가 풀려 조선에 온 소현세자는 의혹이 많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또한, 청나라의 9차례 전쟁에 조선 국민들이 동원되어 희생되었습니다.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