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의거
안녕하세요 1530입니다. 3.15의거는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발생한 민주화 운동을 말합니다. 해당 사건에 대해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15 의거
1960년 3월 15일부터 4월 13일까지를 전후하여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발생한 민주화 운동을 말합니다.
3.15 부정선거 당일 전국적으로 부정선거가 적발됐고 마산, 광주 등 여러 도시에서 투표권을 우롱당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이 총기를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에서 벌어진 시위가 가장 유명해서 3.15 의거 = 마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월 15일 마산의 경우 아침에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 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부정선거가 적발되었습니다.
투표함을 엎어 버린 참관인 안맹선과 그의 남편이자 민주당 경상남도의회 의원 정남규는 부정선거를 발견했으나 곧 경찰서에 끌려갔습니다.
경찰서로 끌려간 정남규는 도의원 신분이라서 곧 풀려났는데 그는 곧장 오동동 마산시당부로 가서 민주당원들과 논의한 끝에 아침 10시 30분 독자적으로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참관인들을 철수시켰습니다.
이후 방송을 통해 부정선거 무효를 주장하고 오후 3시 30분부터 민주당원들이 모여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민주당원들은 가두시위를 벌이며 시위대를 모았고 오동동 마산시당부에 1,500여명의 시위대가 모였는데 이때 경찰들이 들이닥쳐 민주당원들을 연행하고 시위대들에게 해산할 것을 요구했으나 시민들에게 욕만 대차게 먹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특히 경찰 간부가 곤봉으로 고등학생을 두들겨패는 바람에 그 자리에 모여있던 군중들은 더욱 격앙되었고 남은 시위대들이 독자적으로 시위에 돌입하자 경찰과 반공청년단들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시위대들은 저녁에 개표가 시작되는 시청으로 모이자고 서로 약속하고 해산하게 됩니다.
이 소식이 시내에 퍼지자 마산 시민들은 저녁 즈음 옛 마산시청 앞에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 인원은 만여 명을 넘을 정도로 불어났습니다.

일부는 당시 마산의 중심가였던 남성동파출소로 모였으며 일몰 후 시위대와 경찰과 대치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던 중 시위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가 무학초등학교 앞 전신주를 들이받아서 전기 공급이 끊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정전이 일어나 신마산 일대가 깜깜해졌습니다.
경찰은 때를 놓치지 않고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습니다.
같은 시각 남성동파출소에서도 발포로 한 명이 사망했고 시청 앞 발포 이후 시위대들은 자정이 다 될 때까지 관공서, 경찰서(및 파출소), 자유당사 등을 습격하며 저항했습니다.
제1차 마산의거로 총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에 마산 시민들은 물론 전 국민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의 대응
이 사건에 대해 국회조사단이 이승만과 이기붕에게 경찰의 강경 대응에 대해 따졌는데 이승만은 공산당 사주로 벌어진 시위라고 보고받은 것을 그대로 발표했습니다.
심지어 최인규 내무장관 주도로 도립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마산고 1학년 C반 반장 김용실의 주머니 안에 '인민공화국' 운운하는 날조된 삐라까지 집어넣는 등 공산당의 배후조종으로 모는 공작을 펼쳤습니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줬지 갖고 놀라고 준 게 아니다" 라는 망언을 터뜨렸습니다.
가뜩이나 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평화적 시위대를 향한 대민발포" 사례라서 그 파장은 컸습니다.

15일의 발포 사건은 이미 중앙 언론과 외신의 주목을 받고 있었기에 당국에서는 여야합동 국회조사단을 파견해 이강학 치안국장의 사임 및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교체로 사건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홍진기 법무장관을 내무장관으로 자리만 옮기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인사조치였습니다.
게다가 홍진기 신임 내무장관은 공산당 사주설을 주장하면서 경찰의 실탄 발포를 지시하고 이후 강경 진압을 주도하였고 "경찰의 구속, 마산 시위대의 선처 등의 대략적인 조치를 한 뒤 모든 조치를 마쳤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눈 가리고 아웅식의 조치에 여론은 더더욱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산 의거가 벌어진 뒤 여론은 계속 험악해졌습니다.
이에 몇몇 자유당 인사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어차피 우세한 선거였는데 너무 오버했다"며 지도부를 비난하였습니다.
또 이승만, 이기붕에 의해 모든 당론이 좌지우지되던 상황에 의해 국회의원들이 거수기로 전락했다며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이 모여 혁신 위원회를 조직하며 집단반발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이승만이 직접 호통을 치자 이들은 기가 죽었습니다.
이들은 이기붕과 면담을 갖고 이기붕이 당을 위해 애쓴다며 치하한 뒤 선처할 것을 약속하자 이에 만족하여 해산했습니다.
이에 동아일보 기자가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것입니까?" 라고 묻자 이들은 '이기붕 의장이 선처를 약속하셨으니 앞으로 더 이상 혁신에 대해 거론 않겠다'고 답하였고 이를 동아일보측에선 이승만의 호통 한 번에 잠잠해졌으니 논에 우는 개구리한테 돌 던지자 순신간에 잠잠해진 격이라며 비꼬았습니다.

그리고 자유당 측은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여러 희생양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정남규 도의원에게 남로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으로 총지휘하였다는 혐의를 씌웠습니다.
정남규 도의원은 당시 유치장에 갇혀 있었는데 기자가 경찰의 혐의가 사실이냐고 물어보자 노발대발하며 "뭐요? 날더러 빨갱이라고? 그러면 어째서 나를 시의원으로 놔두고 도의원으로 당선되게 놔두었단 말이요?" 라며 반박했습니다.
또 22살 먹은 청년을 체포해 그가 경찰서를 방화하였다며 그가 6.25 때 공산당 측에 부역한 자라고 주장하였는데 6.25 때는 그의 나이가 12세였으므로 말이 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민주당 측과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경찰측에선 32세라고 나이를 조작해서 발표하는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청년은 그냥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체포되었으며 그의 신원조회를 하는 중 자동차 정비 면허증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본 순경은 자동차=휘발유=방화라는 공식이 머리 속에 떠올라 그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었습니다.


1960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3.15 마산시위를 다룬 기사, 출처 : 위키백과
1960년 4월 11일과 4.19 혁명
1960년 전라북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여 그 해에 마산상업고등학교로 입학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아침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억하기
사건이 발생한 지 9년이 지난 1969년에 마산시 구암동의 애기봉 일대에 1,200평으로 사건 당시 희생자의 묘역을 조성하여 이듬해 1월에 묘 13기를 이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이후 1994년 이곳을 성역화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뒤 1996년에 계획이 확정되면서 1998년 3월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2002년 7월 22일 마산시가 묘지 일대의 관리권을 국가보훈처로 이관하였고, 이후 8월 1일에 국립 묘지로 승격되었습니다.
승격 이후 9월 11일에 국립 묘지 관리소가 설치되었고, 5년간의 공사 끝에 시위 43주년이 되는 날인 2003년 3월 15일에 준공식을 했습니다.
2010년 7월 1일 마산시와 창원시가 통합하여 행정구역상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1993년 7월 5일 마산시 조례로 3․15의거일을 시 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2003년 12월 26일 경상남도 조례로 3․15의거일을 도 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2010년 3월 12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3․15의거일을 정부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2010년 이후부터는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현재의 국가보훈부가 기념식 행사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