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건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530blo 2025. 5. 18. 17:41
728x90
반응형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5·18 민주화 운동(五一八民主化運動),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입니다.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습니다.

이후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지속적인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내 언론 통제로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습니다.

1995년 자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희생자에게 하는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가 이뤄졌고, 1997년에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1997년부터 대한민국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영화로 《꽃잎》, 《화려한 휴가》, 《26년》, 《택시운전사》 등이 있으며, 2024년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도 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2011년 5월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경

1979년 10·26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전두환 등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고 실권자로 떠올랐습니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K-공작 계획을 실행하여 언론을 조종·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은 같은 해 4월 14일에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대한민국 내의 정보 기관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관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같은 달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와 개헌 논의를 비롯한 정치 현안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는 정국 운영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24시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하여 정치활동 금지령·휴교령·언론 보도검열 강화 같은 조치를 내렸습니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포함한 정치인과 재야 인사들 수천 명을 감금하고 군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습니다.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5월 18일에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신군부는 부마민주항쟁 때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하였고, 공수부대 같은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습니다.

신군부는 1980년 3월부터 5월 18일 직전까지 공수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사전 이동 배치하고 신군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5.17 쿠테타 또는 5.17 내란 : 네이버 블로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전개

5월 18일 새벽 2시 제7공수부대는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를 점령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 검속했습니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이 보도됐습니다.

 

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18일 오전에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공수부대 측에서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분개한 공수부대원으로 말미암아 학생들은 구타를 당했고, 일부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했습니다.

전남대 학생 300여명은 가톨릭회관에 집결해 시위했습니다.

이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을 시도했습니다.

5월 18일 16시 이후로 광주 시내에 투입된 제7공수여단의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습니다.

 

5월 19일 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습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습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습니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습니다.

일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가 직접 항의를 했으나 효과가 없었습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을 방화했습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습니다.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습니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에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다음에 철수했습니다.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전라남도 나주시, 화순군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습니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했습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습니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습니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습니다.

시민군은 21일 저녁에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습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습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에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이희성은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습니다.

담화문 전문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오늘의 국가적 위기에 처하여 국가 민족의 안전과 생존권을 보유하고 사회 안녕질서를 유지해야 할 중대한 책무를 지고 있는 계엄사령관으로서 현 광주시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비극적인 사태를 냉철한 이성과 자제로써 슬기롭게 극복해 줄 것을 광주시민 여러분의 전통적인 애국심에 호소하여 간곡히 당부코자 합니다.

지난 18일 수백 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평화적 시위가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 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 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 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 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한데 기인된 것입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이번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한 불순 분자 및 이에 동조하는 깡패 등 불량배들로서 급기야는 예비군 및 경찰의 무기와 폭약을 탈취하여 난동을 자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들의 극한적인 목표는 너무나도 자명하며 사태의 악화는 국가 민족의 운명에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한 것이 사실입니다.

본인은 순수한 여러분의 애국 충정과 애향심이 이들의 불순한 지역 감정 유발 책동에 현혹되거나 본의 아니게 말려들어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파탄을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조속히 이성을 회복하고 질서 유지에 앞장서 주시기 바라며 가정과 지역의 평화적 번영을 위하여 각자 맡은 바 생업에 전념해 주시기를 충심으로 당부하는 바이며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경고

지난 18일에 발생한 광주 지역 난동은 치안 유지를 매우 어렵게 하고 있으며 계엄군은 폭력으로 국내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하여는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지금 광주 지역에서 야기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법을 어기고 난동을 부리는 폭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의 주민 여러분은 애국심을 가진 선한 국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량한 시민 여러분께서는 가능한 한 난폭한 폭도들로 인해 불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거리로 나오지 말고 집 안에 꼭 계실 것을 권고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아끼는 고장이 황폐화되어 여러분의 생업과 가정이 파탄되지 않도록 자중자애하시고 과단성 있는 태도로 폭도와 분리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계엄군의 치안 회복을 위한 노력에 최대의 협조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습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5월 24일에는 계엄군 간 2차례 오인 교전이 일어나 계엄군 13명이 사망했습니다.

5월 22일 이후로 광주는 군인들게 완전 포위·봉쇄당했습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습니다.

외신기자들에 따르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습니다.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 부분 유지됐습니다.

당시 전라남도 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습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일부 지식인들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 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습니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와 〈울 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습니다.

5월 27일 새벽 2시에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 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습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었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언론

신군부는 보안사를 중심으로 '언론반'을 구성해 계엄사령부 보도처의 신문·방송·라디오·잡지 등 모든 매체에 대한 보도검열을 시행해 100만 건 이상을 조종 감독했습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으로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언론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와 함께 보안사에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하면서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조치를 내리면서 보도검열 위반 시 폐간 조치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이후 5월 20일에 동아일보, 동아방송, 중앙일보, 경향신문, 문화방송, 합동통신 등의 양심적 언론인들은 사실 보도를 요청했습니다.

조선일보는 5월 21일에 5·18 사실 보도, 보도 검열 전면 철폐를 요구하면서 제작 거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는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도하지 못하게 되자,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집단사표를 쓰고 이를 약 2만 장 인쇄하여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명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5·18 민주화운동,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에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습니다.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극우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화 직후인 1988년 3월 24일 노태우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습니다.

이후 국회 진상조사특위가 구성될 당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측에서는 "민주화투쟁"이라는 명칭을 주장했으나, 노태우가 총재, 전두환이 명예 총재를 맡고 있던 집권여당 민주정의당은 '투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경우 투쟁의 대상인 신군부의 책임이 불거질 것을 우려하여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고집하였습니다.

결국 이에 통일민주당 측이 타협하면서 "민주화운동"으로 합의되었습니다.

이후 문민정부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계승"을 자처하고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정부에서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함에 따라 공식 명칭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한편,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이 중심으로서 1980년대부터 사용됐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날짜별 상세

5월 16일 금요일 이전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전국 대학생 10~20만 명이 모여 지상 서울역 광장 주변에서 집회.

5월 15일 대학생 단체 간부들에 의해 대한민국 경찰의 출동 소식을 사전에 접하고 서서히 해산.

5월 17일 토요일

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22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

24시 00분: 5월 17일 24시부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신군부 계엄포고 제10호를 통해 정치활동 금지, 언론검열 강화, 대학교 휴교령 선포. 주요 도시의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 전북대 농학과 2년인 이세종(당시 21세)은 5월 17일 12시께 계엄군에 쫓기다 전북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추락사).[49]

5월 18일 일요일

01~02시 경: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가 김대중 등 재야 인사와 김종필 등 공화당 지도자를 체포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 국회 기능 마비됨.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 학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10시 00분: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를 향해 투석을 시작.

10시 15분: 학생들이 던진 돌에 부상자가 발생한 데에 분개한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의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계엄군측, 시민측 첫 번째 부상자 발생)[26]

10시 20분: 일부 학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광주 금남로로 이동함.

11시 00분: 전남대 300여 명 가톨릭 회관 집결,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시킴.

12시 00분: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옴.

15시 40분: 금남로 유동 삼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들을 잡아다가 구타 및 현장 체포함.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장애인인 김경철이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 당함.

19시 02분: 계엄사령부, 통행금지령 확대 국내외 방송을 통해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함.

20시 00분: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에 불안, 흥분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에게 동조.

21시 00분: 계엄사령부 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 해산 경고문 발표함.

5월 19일 월요일

03시 00분: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청각장애인 김경철 병원에서 사망 - 두 번째 희생자).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위력 시위 이후 착검한 상태로 진입, 대검으로 인한 자상자 발생.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했고, 3~4명이 한 조가 돼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14시 40분: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돼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

15시 00분: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 회의를 하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

16시 30분: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20시 00분: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침.

5월 20일 화요일

08시 00분: 고등학생들의 참여에 자극받은 정부는 문교부를 통해 광주 시내 및 광산군, 나주군 일대 고등학교에 휴교 조치 하달.

10시 20분: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끌려나와 마구잡이 구타 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

18시 4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

20시 0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 및 공수부대원의 진입을 가로막음.

20시 10분: 시위대, 도청으로 서서히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택시와 차량에 가로막힌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함.

20시 00분: 3공수, 11공수 여단장 실탄 분배 지시 (3공수여단장 실탄 장착 지시, 11공수의 경우 61대대, 62대대가 각각 1,000여발씩 분배)

21시 00분: 택시 200여 대와 버스들은 진입로를 차단, 공수부대 및 경찰과 충돌. 일부는 우회해서 감.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 사망.

21시 50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 MBC 건물 방화.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사망. 시민 수십 명 부상.

5월 21일 수요일

0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계엄군, 대검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 살해. 계엄군 측 부상자 5명으로 보고됨.

0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0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함.

04시 30분: 광주 KBS 건물 방화.

0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20사단 병력과 충돌함.

10시 00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탈취해 광주시 내로 몰고들어옴.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함.

12시 10분: 전남대 진출을 시도한 시위대가 전남대 앞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에 밀려 신안동 굴다리까지 1 km 후퇴. 공수부대의 진압 도중 시민 4명 사망함.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에 올라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시작.

14시 00분: 시위대가 나주시, 화순군 등지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 시작.

14시 15분: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을 종용하는 설득 방송.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16시 00분: 화순군, 나주군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

17시 30분: 7공수여단, 11공수여단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광주 시내가 계엄군에 의해 고립됨.

광주시내에서 시민군이 계엄군을 모두 몰아냄 (26일 새벽에 계엄군이 재진입할 때까지 광주시내에서 계엄군이 모두 철수).

0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0시 30분: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라는 내용의 전단 살포.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13시 30분: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 항의 수습안 전달.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7시 18분: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18시 00분: 20사단이 통합병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1 km 전진하며 사격, 작전 중 지역 주민 8명 사망.

19시 00분: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 보도.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0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함.

10시 15분: 수습위 무기회수반을 조직해 총기 회수 작업 시작.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3시 00분: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13시 20분: 11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4명 사망.

14시 20분: 송암동에서 11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9명 사망 40여명 부상,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이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 처형.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11시 00분: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이 재진입하는 계엄군의 탱크를 막아섬. 시민군을 설득하기 위한 협상시간 요구로 계엄군 진군 멈춤.

05시 20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0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19시 10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

24시 00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됨.

5월 27일 화요일

02시 00분: 계엄군의 광주시 진입.

0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함.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50] 시내 가두방송.

04시 00분: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05시 00분: 시민군 생존자들 자진해서 자수. 자수 과정에서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 3명을 시민군이 자진해서 체포해 계엄군과 경찰에게 넘겼음.

05시 10분: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06시 00분: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07시 00분: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게 도청 인계.

0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 재개.

이상끝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