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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카이사르 내전

카이사르 내전 기원전 49년 1월 12일 ~ 기원전 45년 3월 17일

카이사르 내전(Secundum Civile Bellum Ο Εμφύλιος Πόλεμος του Καίσαρα Caesar's Civil War)은 기원전49년 1월 12일 ~ 기원전 45년 3월 17일 까지 일어났던 고대로마 시대의 내전입니다.

로마 공화국 말기 카이사리의 민중파와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파 사이에 벌어진 내전을 말합니다. 이 내전에서 카이사르는 원로원 공화정파를 제압하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율리우스 카이스르가 루비콘강을 도하함과 동시에 시작되어, 기원전 48년 9월 28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옛 부하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종결되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비콘강을 건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그리스, 폰푸스,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에서 전개된 대규모 내전으로 고대 로마의 공화정 체제가 사실상 막을 내렸고, 로마 제국으로서의 제정이 자리잡게 됩니다.

고대 로마 공화정 체제의 붕괴

로마 제정의 기초

고대 유럽사에서 포에니 전쟁과 더불어 상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전쟁이며, 이 내전의 결과로 로마 제국의 안정적 정치구조를 마련하여, 추후 오랫동안 유럽 대륙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던 전쟁으로 평가됩니다.

카이사르 보스포루스 하스몬 왕조 유대

폼페이우스 마실리아 누미디아 폰푸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카이사르 내전의 배경

기원전 58년 카이사르가 하이두이족의 요청으로 헬베티족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갈리아 전쟁은 기원전 51년 8년의 싸움 끝에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라인 강 서쪽의 모든 갈리아 지역 패권을 장악함으로써 단기간에 이탈리아 반도에 맞먹는 규모의 땅을 차지한 카이사르의 군사적 명성을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기원전 50년에 49년 총독 임기가 만료되는 카이사르는 집정관 선거 운동을 위해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갈리아 전쟁의 승리로

카이사르의 인기 상승

이탈리아 본국에서는 집정관 입후보와 관련하여 카이사르 측의 쿠리오와 반대 측의 폼페이우스가 충돌하여 로마 내의 정세는 교착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와중에 원로원은 파르티아 원정을 선포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크라수스의 카르헤 전투에서의 참패에 대한 로마 정부의 결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10만 군단의 수를 줄이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원로원의 파르티아 원정 선포

카이사르 10만 군단 축소 목적

로마 내에서 이와 같은 정세속에서 집정관과 호민관 선거가 치뤄졌습니다. 카이사르 휘하에서 군단장의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던 재무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호민관에 출마 당선됩니다.

카이사르는 부재 중 입후보를 원로원 측에 요청하며, 그 대가로 자신의 8개 군단을 즉시 해산하겠다고 하였고, 대신 폼에이우스의 군단을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카이사르와 원로원의 교섭

부재중 입후보 요청

카이사르 8개 군단 해산

폼페이우스 군단 해산

원로원에서는 이 안건을 토의에 붙였습니다. 이 토의에서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원로원들의 주도로 "카이사르는 정해진 날짜 이전에 군대를 해산하여야하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는 제안을 가결 시킵니다.

원로원의 토의 최종권고

"카이사르는 정해진 날짜 이전에 군대를 해산하여야하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이에 대해 호민관 안토니우스는 거부권을 발동시켜 이날 회의는 일단 끝이 나게 됩니다. 그날 저녁 폼에이우스는 모든 원로원 의원들을 불러 위협하였고, 원로원에게 원로원 최종권고를 선포할 것을 촉구합니다.

다음날 열린 회의에서 원로원 최종권고의 선포를 가결합니다. 이로써 호민관의 거부권은 무효화되었고, 호민관들을 목숨의 위협을 받고 로마를 떠나 카이사르에게 향합니다.

호민관의 거부권 무력화

원로원의 최종권고 선포 가결

카이사르 내전의 시작

로마에서 벌어진 일들은 곧바로 카이사르에게 알려졌습니다. 13군단 10개 대대 4500명의 군사들과 함께 루비콘 강 인근에 머물려 사태를 관망하던 중 원로원의 최종권고를 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에게 연설합니다.

원로원을 비판하며, 원로원의 최종권고의 위법성을 규탄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병사들의 결의를 확인한 카이사르는 즉시 병사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때는 1월 12일의 일로 이로써 또다른 로마 내전이 발발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이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말그대로 주사위를 던지는 심정으로 그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도박에 뛰어들었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루비콘 강을 건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남하 시작

13군단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아리미눔(리미니)에 도착하였습니다. 전령을 보내 갈리아에 머무는 모든 군단병들에게 이탈리아로 합류할 것을 명령합니다.

폼페이우스는 서한을 통해 국가를 위한 선택이니 원로원의 최종권고를 양해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자신과 폼페이우스가 동시에 무장을 해제하고 폼페이우스는 폼페이우스의 임지인 히스파니아 속주로 떠나고, 그 상태에서 집정관 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폼페이우스와 직접 만나 상의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칼리아로 돌아가 군대를 해산한다면 자신도 속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고, 회담 요청은 거부하였습니다.

회신을 받은 카이사르는 어떠한 확약이 없음을 확인하고 남하를 결심하였습니다.

폼페이우스와 협상 결렬

남하 시작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이탈리아 점령

카이사르가 남하를 시작하면서, 아리미눔(리미니) 아레티움(아레초) 아기비움(구비오) 아욱시움(오시모) 아스콜룸(아스콜리 피체노) 코르피니움(코르피니오) 술모(술모나) 등의 도시들이 모두 카이사르에게 항복 또는 지지를 선언하게 됩니다.

 

카이사르 남하에 도시 모두 항복 또는 지지

이탈리아 도시들의 이러한 배경에는 로마의 동맹시 취급을 받으며 로마 시민권이 아닌 라틴 시민권을 소유하여 동맹시 시민들에 참정권을 부여받지 못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원로원 측에서는 동맹시 시민들의 참정권 부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이사르가 원로원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남하하면서 동맹시 시민들의 원로원의 요청에 따라 카이사르를 막지 않았고, 오히려 카이사르에게 항복 또는 지지를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이와 같은 카이사르 남하를 보며 이탈리아를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폼페이우스 이탈리아 탈출

브룬디시움에서 폼페이우스는 놓친 카이사르는 로마에 입성합니다. 이는 4월 1일로 루비콘강을 건넌지 넉달 만이일입니다.

로마에 남아 있던 원로원 의원들을 소집해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원로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절을 요청하였으나, 원로원들을 이를 거부하였고, 일부 원로원들은 집회와 회의에 출석하면서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이 문제를 덮어두고 자신의 옛 속주였던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떠납니다.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시칠리아 공격

이탈리아 반도 전역이 카이사르에게 넘어왔으나 이탈리아 지역외의 다른 영토는 모두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의 지배하에 있음을 파악하게 됩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해군을 편성하게 한 뒤 쿠리오게게 2개 군단을 주어 시칠리아와 아프리카를 공격하게 합니다 .

쿠리오는 시칠리아로 건너갔고 별다른 저항없이 시칠리아를 접수합니다.

당시 시칠리아에서 해군을 편성하고 있던 소 가토는 폼페이우스를 맹비난 하며 아프리카로 달아납니다.

시칠리아 공격 접수

소 가토 아프리카로 탈출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일레르다 전투

갈리아 트란살피나는 카이사르가 10년 넘게 갈리아 총독으로 다스린 지역으로, 이때 마실리아(마르세유)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며 카이사르에 대항하기로 합니다.

폼페이우스 군의 지휘관 아프라니우스는 장기전으로 끌고 갈 것을 염두에 두었고, 그렇게 되면 폼페이우스 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이탈리아 본토를 배후를 습격하거나, 히스파니아로 상륙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일레르다 전투를 통해 아프라니우스의 군대를 격퇴되었고, 폼페이우스 군을 모두 해산시킵니다. 이로써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카이사르에 대적하는 폼페이우스 세력을 모두 분쇄하게 됩니다.

일레르다 전투

아프라니우스 군대 격퇴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마실리아 공방전

폼에이우스를 지지하는 마실리아에서는 수성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폼페이우스가 그리스에게 파견한 16척의 군선이 마실리아에 도착하여, 카이사르 진영의 데키무스 부루투스와 해전을 벌이게 됩니다.

마실리아 인들과 달리 결사 항전의 의지가 없던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두척의 배가 침몰하자 서둘러 해군을 철수키켜 해전을 포기하였습니다.

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군은 마실리아를 공성에 집중하여 마실리아를 점령합니다.

마실리아 공방전

폼페이우스 해군 교전과 마실리아 공성 성공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1차 아프리카 전역(쿠리오)

카이사르에게 아프리카 원정을 위임받은 쿠리오는 시칠리아 점령 이후 2개 군단과 500기병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향하게 됩니다.

쿠리오는 상대 장수 아티우스 바루스를 얕보았고, 그렇기에 적은 병력만 이끌고 아프리카로 향하였습니다. 루비콘을 건널 당시 처음 맞닥뜨린 장수가 아티우스 바루스였기 때문입니다.

쿠리오는 카르타고 멸망 후 아프리카 최대도시가 된 우티카를 점령하고자 하였습니다.

누미디아의 와 유바는 쿠리오가 호민관 시절 누미디아 왕국을 없애고 속주로 편성해야 한다는 법안을 제출하였으나, 폼에이우스에게 적극 로비하여 이를 무효화 하였습니다.

이에 유바는 쿠리오의 우티카 점령을 결사 항전으로 막고자 하였습니다.

병력에서 불리했던 쿠리오는 결국 포위당하여 항전중 사망하였고, 이렇게 1차 아프리카 전역은 2개군단 500명의 기병은 비참하게 소멸되며 실패하였습니다.

1차 아프리카 전역 실패

바그라다스 강 전투

쿠리오 전사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집정관 카이사르

이러한 상황중에 독재관에 임명된 카이사르는 로마에 귀국하자마자 선거를 관리하면서 집정관에 입후보하였습니다. 곧 선거가 치뤄졌고, 카이사르는 세르빌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됩니다.

12개군다, 즉 기존의 갈리아에 머물던 자신의 8개 로마 군단병과 에전에 속주에서 편성되어 종다리 군단이라고 불리다 정식 군단병으로 승격한 1개 군단, 그리고 신규 3개 군단이 합쳐진 12개 군단을 브룬디시움으로 소집하라고 명령합니다.

카이사르는 그 뒤 독재관을 사임한 뒤 현직 접정관의 신분으로 폼페이우스와 싸우고자 하였습니다.

집정관 카이사르

12개군단 소집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펌페이우스의 병력

폼페이우스는 1년 동안 그리스에 머물면서 카이사르와 싸울 군수물자와 병력을 모집합니다.

자신의 옛 고참병으로 구성된 1군단과 역시 키케로 휘하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었던 고참병 1개 군단, 전해의 집정관이었던 렌툴루스 휘하 2개 군단, 이탈리아에서 소집한 5개 군단까지 총 9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장인인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시리아에서 2개 군단을 이끌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 진영은 2개 군단을 제외하고 군사 경험이 없었으나, 카이사르 진연은 3개 군단을 제외한 9개 군단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진영이었습니다.

폼페이우스 11개 군단 - 전투경험 2개군단

카이사르 12개 군단 - 전투경험 9개 군단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카이사르의 그리스 도해

카이사르는 브린디스움에 도착하여 승리할 경우 병사들에게 엄청난 보수를 약속하였습다.

7개 군단을 승선시켜 바다를 건넜으나, 승선 병력은 갈리아 전쟁의 결원으로 2만 남짓이었습니다.

반면 폼페이우스의 군단은 신규 편성 군단으로 결원이 거의 없어 병력은 5만에 가까웠습니다.

카이사르는 그리스에 도착하자 마자 오리쿰으로 강행군하였고, 오리쿰 주민들은 카이사르가 직접 오자 그에게 항복하였습니다. 그 뒤 바로 아폴로니아로 이동하였으며, 이 곳 역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이들이 쉽게 항복한 이유는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언제 도착할 지 모르고, 카이사르가 로마의 현직 집정관으로 로마 정부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습니니다.

카이사르 그리스 도해

오리쿰 아폴로니아 항복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다라키움 근처에서 서로 대치하였습니다. 다라키움은 폼페이우스가 상당히 근접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지 않았고, 다라키움 인근에서 서로 진을 구축하여 서로 대치하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카이사르는 2만, 폼페이우스는 5만의 가까운 군사를 보유하였습니다.

병력차는 상당하였으나, 당시 전쟁에서는 병사 개개인의 전투능력이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에, 카이사르 군의 전투능력과 경험치가 당시 지중해 지역에서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서로 공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다라키움 북쪽의 모든 해안선을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해상은 비불루스의 함대가 해상을 지키고 있었으나, 비불루스의 함대는 보급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상에서 비불루스는 중병을 얻어 선상 사망하였고, 지휘관이 없던 상태에서, 해상 봉쇄는 느슨해 질 수 밖에 없었고, 마침내 카이사르의 2진이 도착함으로써 카이사르의 병력은 두 배 가까이 증강됩니다.

비불루스의 해상봉쇄

비불루스의 죽음

카이사르 2진 도착 병력 2배 증가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메텔루스 스키피오 군

당시 시리아 총독이었던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시리아에서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여 모든 병력을 이끌고 시라아를 떠납니다. 스키피오가 마케도니아에 이르자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을 쪼개 그를 상대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부하인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1개 군단과 200명의 기병을 주어 테실리아로, 그리고 가이우스 사비누스에게 5개 대대와 약간의 기병을 주어 아이톨리아 지방으로, 그리고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겐 고참병 2개 군단과 500명의 기병을 주어 마케도니아로 보냈습니다.

사비누스의 5개 대대가 도착한 아이톨리아 지역은 폼페이우스의 지원이 차단된 상태였으므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합니다.

이렇게 스키피오와 도미티우스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습니다.

시리아 총독, 폼에이우스의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 2개군단

마케도니아 대치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디라키움 포위 작전

카이사르는 오리쿰에 자신의 함대를 정박시키고 3개 대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이에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라니우스 폼페이수는 함대를 이끌고 공격하여 카이사르의 함대를 모두 불태웁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로 폼페이우스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 다리키움으로 향하게 됩니다.

폼페이우스는 교전을 거부하였는데, 카이사르의 군대가 정예이고, 이에 따라 지구전을 벌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카이사르는 역으로 폼페이우스의 다리키움에 포위 진영을 구축하여 폼페이우스를 고립시키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카이사르의 포위망은 26킬로미터에 달하였고, 이에 따라 2만여명의 병력으로 모든 통로를 막는 것을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의 진영이 물자부족으로 고통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카이사르 진영의 물자 풍족해 지며, 반대로 폼페이우스 진영은 카이사르의 포위로 인하여 사기가 저하되고 물 부족과 물자 부족현장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공격하여 교전이 발생하게 됩니다. 도미티우스와 대치하던 스키피오는 폼에이우스는 응원하기 위해 도미티우스와의 대치를 풀고 다리키움으로 이동합니다.

한편, 카이사르 진영에서 기병들의 봉급 횡령이 발각되어 곤란을 겪던 두 형제이며 원원 의원이었던 장교 로우킬루스와 에구스는 폼페이우스의 진영으로 넘어와 카이사르 진영의 중요한 군사기밀을 알려줍니다.

폼페이우스는 이러한 군사기밀을 바탕으로 카이사르 진영의 취약한 부분을 공격하였고 이후 2번에 교전에서 1천여명의 카이사르 군이 목숨을 잃게 되고, 카이사르의 포위전은 완벽한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디라키움 포위 작전

카이사르의 패배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테살리아 진격

디라키움 포위 작전에서 진영을 거둔 카이사르는 아폴로니아로 이동하였습니다. 도미티우스의 2개 군단이 합류하여 다시 테살리아로 진입하게 됩니다. 곰피와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고 항복을 받아내자 대부분의 그리스의 도시들은 카이사르를 따르기로 합니다.

카이사르 테살리아로 진격

도미티우스 2개 군단과 합류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파르살루스 전투

두 진영은 파스살루스 언덕에 진을 치고 마주하였습니다.

두 진영은 다음과 같이 포진하였습니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좌익에 카이사르에게 넘겨받은 2개 준단을 배치한 뒤, 중앙엔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데려온 시리아의 2개 군단을, 그리고 우익엔 자신의 고참병과 히스파니아에서 온 군단을 배치합니다. 우익의 군단은 가장 정계병력이었습니다. 남은 군단은 좌익과 중앙, 우익 사이에 모두 배치합니다. 보병은 약 4만 5천, 기병은 7천 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우익에 10군단을, 좌익에 9군단을 배차하고 나머지는 중앙에 두었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좌익에, 우익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술라를, 중앙은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지휘하게 하였습니다. 카이사로 본인 폼페이우스 맞은 편에 위치하였습니다. 그의 병력은 2만 2천, 기병은 1천 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고 카이사르 군에서는 '승리의 여신, 베누스(아프로디테)'라는군호가, 폼페이우스 군에서는 '불굴으 헤라클레스'라는 군호가 각기 하달 됩니다.

카이사르 진영의 4열 병사들의 결정적인 활약과 카이사르 진영의 풍부한 전투경험으로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의 진영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파르살루스의 전투 결과는 즉시 각지에 퍼지게 되었으며,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해상을 봉쇄하고 시칠리아 섬을 공격하던 폼페이우스군은 모든 해상봉쇄를 풀고 철수하게 됩니다.

파르살루스 전투

카이사르의 완벽한 승리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폼페이우스의 죽음

폼페이우스는 바다를 건거 키프로서 섬으로 간 뒤 이후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안타키아)에 가려했으나 안타오키아는 폼페이우스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프톨레아이오스13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집트에서는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를 접수한 뒤 카이사르와 맞서고자 하는 의도라고 생각하여 폼페이우스를 맞이하는 배위에서는 폼페이우스를 살해합니다.

이집트 - 폼페이우스 살해

이로써 역사적인 두 라이벌의 대결은 카이사르의 승리와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알렉산드리아 전쟁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 7세 공동집권 중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 뒤 사막 지대에서 병력을 규합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아르시노에 4세도 별도로 반란을 일으켜 이집트에 파라오가 3명이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7세는 이 상황에서 카이사르를 찾아가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고, 프틀레마이오스 12세의 공동통치를 로마가 보장해 달라는 유언이 있었기에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7세의 공동 통치를 권고하였습니다.

또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14세와 아르시노에4세는 키프로스에서 통치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13세는 아르시노에4세와 동맹을 맺고, 많지 않은 병력을 가지고 이집트에 온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를 모두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을 선동하여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카이사르군은 보병 3,200 기병 800에서 보병 8,000 기병 800으로 보강되었으며, 다시 보병 20,000, 1,000기병으로 보강되었습니다. 해군 병력은 19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하였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왕조군은 보병 27,000 기병 2,000과 해군 병력 전함 27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지휘관은 아킬라스에서 가니메데스로 나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13세가 직접지휘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있는 파로스 섬을 효과적으로 수비하였으며, 지역을 요새화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갔습니다.

기원 47년 초 카이사르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파견한 구원군이 미트리다테스의 인솔하에 알렉산드리에 입성하였고, 47년 2월 나일 강변에서 카이사르 20,000보명 1,000기병, 프톨페아이오스13세의 군대, 보명 27,000 기병 2,000이 전투를 별였으며, 이 전투에서 가니메데스는 전사하였고, 프톨레마이오스13세는 달아나던 중 나일 강에 빠져 익사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평정한 뒤 클레오파트라7세와 프톨레마이오스14세를 공동 파라오노 선임하였고, 아르시노에 4세는 로마에 보냈으며 훗날 개선식을 벌일 때 전리품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이이라는 아들을 낳았습ㄴ디ㅏ.

알렉산드리아 전쟁

이집트 내전 진압

클레오파트라7세

프톨레마이오스14세 공동 파라로 선임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젤라 전투

기원전 47년 5월 21일 소아시의 젤라에서 벌어진 전투로 카이사르의 로마군과 파르나케스2세의 폰토스 왕국군이 격돌한 전투입니다.

당시 폰토스 왕국의 국왕 파르나케스 2세는 로마인들이 내전으로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 소아시아 정복 전쟁을 단행하였습니다. 기원전 48년 12월 파르나케스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바수르를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하고 소아시아의 절반을 확보한 뒤 나머지 소아시아 영역마저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카이사르는 유대 지방을 거쳐 시리아로 행진하면서 내전 동안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외국 왕과 로마 총독들을 사면하고 그들로부터 공물과 군사 지원을 받습니다.

안티오카에 머물며 소아시아 일대의 로마군을 규합한 후 기원전 47년 5월 20일 젤라 마을 근처에서 진영을 구축하게 하고, 폰토스군도 젤라 북서쪽 9km 지점에 진영을 갖추게 됩니다.

카이사르군은 보병 12개 군단, 니코폴리스에서 파르나케스 2세에게 패배한 6개군단 잔여 병력, 갈라티아 부족 연합군, 사르마티아인 경기병대, 아르메니아인 중기병대, 갈리아 기병대를 포함한 소규모 기병대, 총 병력 10,000~11,000명이었습니다.

폰토스 왕국군은 카이사르 군의 2배에 달하는 2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농민보병대가 대부분이고, 중무장 보병대와 중장기병 경기병도 섞여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의 주력 병기였던 전차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파르나케스2세는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주둔지가 건설중인 상화에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폰투스 군의 주력인 팔랑크스 보병대는 평지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카이사르군이 주둔한 구릉 지대에서는 대열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높았으며, 또한 폰토스 군의 주력 병기인 전차가 언덕에서 위력을 발휘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파르나케스는 이를 간과하고 병력을 우세는 믿고 진격하였으나, 위에 열거한 불리한 조건과 수많은 전투 경험을 가진 로마군인 지리적인 이점까지 활용하여 전투를 벌여 폰투스군은 궤멸되었고, 파르나케스 2세는 몇몇 호위병과 함게 가까스로 전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파르나케스는 보스포로스 왕국으로 도망쳐 스키타이인과 사르마티아인의 소규모를 규합하였으나, 아산드로스가 사병대를 이끌로 공격해와 살해당하였고, 폰토스 왕국은 로마에게 완전히 정복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오는 길에 원로원에게 젤라 전투와 관련된 보고서를 썼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 있었습니다.

젤라 전투의 승리

폰투스 왕국 정복

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2차 아프리카 전투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대세는 완전히 카이사르에게 기울었지만, 내전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2년뒤 북아프리카에서 다시 한번 전투가 벌어 집니다.

루스피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이 카이사르군에 상당한 손실을 안겼습니다.

루스피나 전투 - 카이사르 패배

이어진 탑수스 전투(기원전 46년)에서 카이사르군 최소 8개 군단 5만명, 폼에이우스 군 최소 12개 군단 누마디아 동맹군 약 7만 2천이 맞붙었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파는 히스파니아로 달아납니다. 폼페이우스군의 주요 의원들이 탐수스 전투 이후 거의 사망하면서 사실상 이때 내전이 종결됩니다.

탑수스 전투 - 카이사르 대승

카이사르 내전의 전개 - 히스파니아 전투

1년뒤 히스파니아 남부 문다(기원전 45년)에 다시 카이사르군 약 4만과 폼페이우스군 약 7만이 맞붙었고, 사상자 7천 대 3만으로 폼페이스군이 패합니다. 이때 라비에누스와 폼페이우스의 장남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전사하면서 폼페이스 군의 장군들은 모두 사망하게 됩니다.

히스파니아 문다 전투 - 카이사르 승리

카이사르 내전의 평가

처음 내전이 발발했을 때 상황은 폼페이우스가 압도적으로 유리하였습니다. 원로원과 집정관 모두가 폼페이우스 편에 섰으며, 공화국 전체가 카이사르에게 적대적었고, 카이사르가 굴복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8개 군단 해산 약속의 대가로 자신의 집정관 출마를 보장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폼페이우스가 적극적으로 훼방을 놓게 되고, 이에 카이사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내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 내전에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놀라울 정도로 간단히 로마를 배반하고 반란군인 카이사르에게 협조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로마 시민과 이탈리아 동맹도시들에 대한 차별이 상당한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카이사르는 로마에 입성하여 집정관에 올라 반란군에서 정통정부로 폼페이우스는 정통정부에서 반란군으로 지위가 바뀌게되고, 이후 히스파니아에서 반년만에 아프라니우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1년뒤 현직 집정관 신분으로 그리스로 건너가 폼페이우스와 내전을 벌입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 전쟁와 동방원정, 제2차 아프리카 원정과 제2차 히스피니아 원정을 진압한 카이사르는 내전을 종결시키고 로마의 유일한 권력을 장악합니다.

권력을 장악한 카이사르는 보복과 숙청을 하지 않고 관용정책을 펼쳤으며, 종식독재관이 되어 각종 국가개조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마르쿠스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여 생을 마감합니다.

고대 유럽사에서 포에니 전쟁과 더불어 상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전쟁이며, 이 내전의 결과로 로마 제국의 안정적 정치구조를 마련하여, 추후 오랫동안 유럽 대륙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던 전쟁으로 평가됩니다.

고대 로마 공화정 체제의 붕괴

로마 제정의 기초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