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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하멜 표류기

하멜표류기 개요

스페르베르호의 불운한 항해 일지가 하멜표류기의 진짜 제목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 선원이었던 핸드릭 하멜(Hendric Hamel)이 1653년 상선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난파되어 제주도에 표류한 후 13년 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탈출하여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귀국한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로 써서 낸게 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의 원 제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네덜란드어: Journal van de Ongeluckige Voyagie van 't Jacht de Sperwer

영어: The journal of the unfortunate voyage of the jaght the Sperwer

번역: 스페르베르호의 불운한 항해 일지

하멜표류기는 1934년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국역본으로 번역한 명칭입니다.

하멜표류기 구성과 출판

 

'하멜 표류기'는 크게 '표류기'와 '조선 왕국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표류기'는 네덜란드를 떠난 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거쳐 다시 네덜란드로 귀국할 때까지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일지이며 난파 경위, 조선에 표복한 이후 하멜 일행이 겪은 체험과 감상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국기'는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형법제도, 종교, 교육, 교역 등 하멜이 조선에서 체류하면서 보고 들은 조선에 대한 각종 정보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멜표류기는 17세기 조선의 생활상을 세세하게 기록한 최초의 유럽 서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습니다.

억류되어 있는 동안 밀려 있던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제출한 일종의 산업재해 보고서이며 이 때문에 자신들이 고생한 부분을 과장했다는 평도 존재합니다.

1668년 네덜란드에서 출판되었으며, 프랑스 번역가 미누톨리가 1670년에 주석을 달고 프랑스에서 출판했습니다.

프랑스 번역판 하멜표류기는 영국인 철학자 존 로크가 직접 이름을 서명한 복사본이 존재합니다.

하멜표류기 제작 배경

 

1653년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했고, 제주도에서 몇개월간 억류되었습니다. 이때 머무른 집이 폐주 광해군이 유배되었던 집이라고 합니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은 하멜의 일을 처리합니다. 하멜표류기에는 제주목사 이원진이 우호적으로 일해을 대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cf, 이원진의 <탐라지>는 조선 중기 제주도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필수 사료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1653년 8월 6일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하멜과 일행 38명은 권극중과 노정이 보낸 군대에 의해 잡히게 됩니다. - 제주목사 이원진의 치계,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1653년) 8월 6일 무진 2번째 기사

한양에 올라와 여러 조사를 받게 되는 데 이때 먼저 조선에 표류해 조선에 정착한 양 야너스 벨테브레(박연)가 이들의 통역을 하였으며, 하멜은 송환 의사를 전달하고 일본으로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기각 되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 대외적으로 청나라에 대한 북벌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하멜 일행은 군사 기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효종의 어가를 수행하는 직을 임명받았고, 매월 쌀 40kg의 넉넉한 봉급을 받았습니다.

하멜 일행중 두사람(생존 선원들 중 최선임자인 1등 항해사 핸드릭 얀스(남이안)와 포술장 헨드릭 야스 보스(남북산))이 청나라 사신의 행차에 뛰어들어 집으로 보내달라고 난동을 부린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조선은 청나라가 화린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조직하고 있다고 의심할까봐 두려워 하였고,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로 일을 무마시키고, 이 둘을 투옥시켰고, 이 둘은 얼마 후 사망하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음식을 거부하여 죽었다고 하였고, 하멜은 참석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효종과 효종의 동생 안평대군은 나머지 33명을,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게 됩니다. 여기서 7년간을 지내게 됩니다. 이때, 하멜 일행은 성벽과 돌담을 쌓는 노역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전라병영에 지내는 동안 근처의 승려들과 아주 잘 지냈다고 하는데, 당시 유교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승려들이 조선에서 괴물 취급을 당하는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과 동변상련을 느껴 자주 교류하였다고 합니다.

현종때, 극심한 흉년으로 나주, 순청 등으로 그룹을 나누어 이배되었으며, 하멜은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를 인계받은 전라 좌수사 이도빈은 네덜란드인을 후히 대접해주고 모든 노역을 면해주었습니다.

1666년 억류 13년 만에 하멜을 포함한 8명의 인원들은 일본으로 탈주를 감행합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에 남은 8명은 조선에서 직접 네덜란드로 송환하였습니다.

하멜 일행은 동인도 회사에 13년간의 임금을 지급다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것이 스페르베르호의 불운한 항해 일지, 하멜 표류기 입니다.

하멜표류기와 관련된 현재의 흔적

이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 제주도라서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의 용머리해안 인근에 하멜을 기리기 위해 커다란 범선 형태의 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다만, 조선의 기록에는 그들의 표류 위치는 대정현지방 차귀진하 대야수연변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멜상선전시관, 출처 : http://news.yonsei.or.kr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에는 당시 전라병영성이 복원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병영성 동문 맞은 편에 하멜 기념관을 지었습니다. 하멜과 일행은 성벽과 돌담을 쌓는 노역에 시달렸다고 하며, 지금도 인근 민가에는 이들 일행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네덜란드 스타일의 돌담이 남아 있습니다. 강진군은 매년 4월 중순에 강진 전라병영성 축제를 개최합니다.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트레블아이 Traveli

강진군 병영면 하멜기념관 인근 돌담, 네덜란드 담장 양식으로 추정, 의사신문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