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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을미사변

을미사변(乙未事變, 영어: Assassination of Empress Myeongseong)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경북궁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포함한 조선인 궁중 인사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이 경복궁(景福宮)에 난입하여 건청궁(乾淸宮) 곤녕합 일대에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를 칼로 찔러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에 태운 사건입니다.

일본인에 의해

명성왕후 민씨 살해

다른 명칭으로

명성황후 암살 사건(明成皇后暗殺事件)

명성황후 시해 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

'명성황후 시해'는 잘못된 용어

- 명성황후 시해는 잘못된 용어임, 시해는 신하가 임금이나 왕비를 죽이거나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이므로, 을미사변은 이에 해당하지 않음. 살해로 적는 것이 맞는 표현

당시 명칭

을미의 변(乙未之變)

을미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

일본 작전명

여우사냥(狐狩り 기쓰네가리)

일본 작전명: 여우사냥(일본어: 狐狩り 기쓰네가리)

한국 학계의 다수 견해는 을미사변의 배후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 총리와 내각의 각료 및 원로들이었고, 미우라 고로 직전에 조선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가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이사건으로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 했던 고종의 가장 큰 조력자인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다시 친일 대신으로 내각을 구성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표지기사 <조선 왕비 암살사건(L'ASSASSINAT DE LA REINE DE CORÉE)>, 출처 : 위키백과

을미사변의 배경

1894년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파기하고 조선 정부에 친일 개각을 구성시켰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자주, 독립' 요동 반도와 타이완 섬 할양, 그리고 전쟁배상금을 받아냅니다.

러시아를 포함한 3국 열강의 압박

일본, 청나라에 요동반도 반환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3개 열강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 하였습니다.

고종, 러시아를 통해

일본 견제 시도

고종과 명성황후는 평소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자주 불렀고, 인아거일(引俄拒日, 아라사와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 노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친일 내각 축출을 단행하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러 성향의 관료들을 중용하였습니다.

박영효,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

친일 관료들의 축출

친일 대신이었던 박영효는 명성화후가 자신의 숙청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뒤 명성화후의 암살을 모의하지만 유길준의 내부고발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도주합니다. 이로 인해, 상당수 친일 관료들이 중앙에서 쫓겨나게 되어 일본의 입지는 좁아지게 됩니다.

새로운 조선 공사 부임

미우라 고로

망명한 박영효의 말에 따라 조-러간의 비밀협약 의혹은 점점 신빙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당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오랜 정적이었던 다니 다테키의 추천을 받아 새로 조선공사로 퇴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가 조-일 외교의 전명에 등장하게 됩니다.

을미사변의 진행과정

1895년 9월 1일, 이노우에 대신 부임한 미우라 고로는 이노우에와 같이 입권해서 고종을 만났고 독실한 불교 신자인 척 연기를 하였습니다.

일본 작전명

여우사냥(狐狩り 기쓰네가리)

 

10월 3일 일본 공사관 지하실에서 황후 암살 계획이 구체적으로 짜여 졌습니다.

첫번째, 살해의 범행은 일본 낭인들이 맡고, 외관 상 흥성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청일전쟁 직후 갑오경장 때 일본 군인의 궁궐 점령을 지휘했던 오카모토에게 맡겨졌습니다.

둘째,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들로 구성한다. 이때 낭인 자객들의 동원은 한성에서 발행하는 일본 신문 한성신보의 사장 아다치 겐조가 맡았습니다.

구마모토와 후쿠오카 등 규슈 출신 낭인 30명과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 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사사키 마사유키, 기쿠치 겐조 등의 민간인들을 동원하였습니다.

셋째,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었습니다.

넷째,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이었습니다.

조선인 조력자

흥선대원군, 흥성대원군의 장손 이준용, 유길준, 조선군 1대대장 우범선, 2대대장 이두황, 3대대장 이진호 등, 전 군부협판 이주회, 국왕 친위대 부위 윤석우, 일본 공사관 통역관 박선, 문신 구연수 등,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

조선 정부의 훈련대 해산

10월 7일 예상보다 일찍 훈련대가 해산되자, 거사 일시는 10월 8일 새벽 4시로 앞당겨지게 됩니다.

10월 8일 새벽 3시

'여우사냥' 시작

10월 8일 새벽 3시, 흥선대원군이 공덕리 아소정을 출발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에 도착한 것은 이미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새벽 5시를 넘겨서 였습니다.

10월 8일 새벽 4시, 일본 공관 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는 춘생문과 추성문 등을 포위하였습니다.

고종은 이범진을 보내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하게 합니다.

10월 8일 새벽 4시 30분, 일본 공관 수비대와 조선인 훈련대 병력 등 수백여 명, 이들과 합류한 일본인 낭인 3~40여 명 등이 궁내로 돌격합니다.

조선인 시위대가 미국인 교관 윌리엄 다이의 지휘를 받으며 맞섰지만 이내 무너졌습니다.

10월 8일 새벽 5시, 흥성대원군이 입권하자 끝까지 저항하던 무예청 무사들과 경비병력은 전투를 중단하게 됩니다.

일본 낭인들의 만행

대기하고 있던 일본 낭인들은 건천궁으로 몰려가 왕비를 찾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태자비 민씨는 복부를 가격당하였고,왕태자가 머리채를 잡혔습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권총을 맞고, 두 팔이 잘려나가 사망하였습니다.

옥호루에 황후와 궁녀들이 같은 복장으로 앉아 있었고, 황후로 의시되는 궁녀들을 전부 발가벗겨서 임신했던 흔적을 확인하였습니다.

수많은 궁년들이 죽은 후 황후는 옥호루에서 장안당으로 뛰쳐 나갔지만 붙잡혀 칼에 찔려 살해당합니다.

미우라 고로 공사는 아침에 경복궁에 들어와 고종을 알현하고, 이후 흥선대원군과 3자회담을 진행합니다.

이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낭인들은 경복궁 뒤편 건청군 동쪽 녹원으로 가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웠습니다.

을미사변의 결과

친일본 내각 구성

미우라 고로는 이후 고종과의 회담에서 노골적인 협박을 가하여, 김홍집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 하였습니다.

한성신보를 통한 조작 보도

한성신보는 흥선대원군이 입궐했다는 기사를 싣고 간밤의 사건이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알력으로 벌어진 사건으로 유도하려 하였습니다.

명성황후 폐서인 조칙 발표와 역풍

김홍집은 본인이 서명하고 고종의 명의로 명성황후를 폐서인한다는 조칙을 발표하였습니다.

왕태자(훗날의 순종)이 이에 반발하여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항의했으며,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중심으로 서양 각국도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여 국제 여론도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일본의 헐리우드 액션

명성황후 살해를 조선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속이려 했던 일본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우라 고로 등 사건 가담자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고 재판에 회부했으나 일본 법정은 증거 불충분을 주장했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미파 관료들과 서구의 선교사, 외교관이 대거 개입된 고종 탈출 작전인 춘생문 사건이 터지자 사건 가담자 전원을 석방하였습니다.

석방된 이들은 일본에서 애국자로 칭송받았고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 했습니다.

아관 파천

고종은 이후 춘생문 사건을 거쳐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였고, 을미사변에 가담한 이들과 김홍집 내각을 잡아 들였습니다.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