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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여수 순천 사건

여수순천사건

여수순천사건

1948.10.19~10.27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또는 여순 사건(麗順事件)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있었던 사건입니다.

14연대 군인 2,000명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 거부 반란

당시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제주 4·3 사건 진압하는 명령을 하달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승만 정권 14연대 진압

민간인 학살

이승만 정권은 명령을 거부한 14연대 군인들을 모두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반란군과 진압군에 의해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여수순천사건의 배경

일본 제국 경찰

미 군정에서 고스란히 경찰로 채용

일제강점기 민중을 가까이에서 억압한 것은 일본 제국 경찰이었습니다. 당시 순사들에 대한 공포와 증오는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국내 실정을 아는 경력자인 순사들이 미군정 경찰로 고스란히 채용된 것입니다.

미 군정의 방관과

부족한 군 입대 자원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 광복군 출신자 등은 국군(과 그 전신인 국경경비대)에 입대하였습니다.

당시에 군 신병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미군정에서 사상에 대해 특별히 제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에서 특별한 신원조회 없이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들도 속속 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군과 경찰의 충돌

이러한 상황속에서 군과 경찰은 총격전을 벌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러한 군과 경찰 사이의 갈등은 제1공화국에서도 지속되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상대적으로 경찰을 싸고 돌자, 군사지도자였던 이범석이 정변까지 모의할 정도였습니다.

해방정국 3개 좌파 군 조직

남로당계열 : '콤서클''병사소비에트

북로당계열 : ''인민혁명군'

 

해방정국 당시 군에는 크게 3개의 좌파 조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하는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

남로당 지방 도당에서 관할하는 병사들의 조직인 '병사 소비에트',

마지막으로 남로당을 견제하기 위해 북로당(북한 조선로동당의 전신)이 경상남도 일대에 조직한 '인민혁명군'입니다.

당시 '콤 서클'의 지휘관 김지회 중위는 북한 공작원으로 '콤 서클'은 남로당 계열에서 북로당 계열의 '인민혁명군' 소속으로 변경되게 됩니다. (김지회는 철저히 신분을 숨기로 있었으므로 참여 장교들은 자신들을 남로당 계열로 인지 하고 있었습니다.)

'병사 소비에트'는 지창수 상사가 이끌고 있었습니다.

14연대 창설과 요직 장악

1948.5 초

1948년 5월 초 14연대가 창설되고 김지회는 신설 14연대 작전참모 보좌관, 지창수는 연대 본부 선임하사관격인 연대 인사과 선임하사관, '병사소비에트' 부책인 정낙현은 연대본부 정보과 선임하사관이라는 요직을 죄다 차지하였습니다.

당시 신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였는데 주로 전남 동부에서 모집하였으나, 지원자가 부족한 탓에 불온사상 여부를 가리지 않고 지원자는 무조건 입대 시켰습니다.

좌파 운동 수배자 및 각종 범죄자

14연대 입대

이러한 이유로 각 지방에서 좌파운동을 열렬히 하던 청년들이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면 14연대에 입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또한, 남로당 전남도당에서도 지원을 적극 독려하였고, 각종 범죄자들 또한 경찰들을 피해 입대하였습니다.

4연대에서 설문조사를 하여 박현영과 이승만 중 누가 더 나은지 설문하여 박헌영을 선택한 군인만을 추려 14연대로 보냈습니다.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

1948.9.11

당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과 하지 간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군대의 작전권은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있었고, 1948년 9월 11일에 체결된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은 주한 미군정청이 보존하고 있는 재산, 물건, 현금, 예금, 설비 및 군수물자 등에 관한 모든 권리, 권한 및 이익을 양도한다고 규정되었으며, 이는 국군 창설에 필요한 모든 장비와 시설 및 군수물자와 지휘권이 미국 장악하에 있었습니다.

여수순천사건의 전개과정

당시 여수에 주둔중이던 14연대는 이미 9월 중순부터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제주도 출동을 예정하고 있어서 10월 초부터 다른 부대로부터 박격포와 기관총 등을 차출하여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신무기인 개런드 소총과 M1 카빈, 자동소총, 기관단총을 비롯 각종 통신장비 등이 다른 부대에 앞서 우선적으로 100% 공급되었습니다.

14연대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 거부 반란

1948.10.19

이들은 1948년 10월 19일14연대 일부 군인들이 동포 학살은 할 수 없다는 보도문을 발표하고 제주 파병을 거부하며 무장 반란을 일으킵니다.

반란의 주동자 지창수 상사

1948.10.19

지창수를 중심으로 한 병사위원회는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발란을 일으키기로 하고, 대대별로 파병 반대 선동을 하는 한편, 연대를 장악한 후 연대원들을 집결시킵니다.

지장수는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는 한편, "미제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며 선동하였고, 경찰이 쳐들어오고 있다고 외치며 경찰과 싸우자며 단결을 유도하였습니다.

반란을 반대하는 장교 등 20여명의 장교를 살해하였는데 이들 중 15명이 남로당 중앙당원이었습니다.

지창수는 스스로 연대장에 취임하고 병사위원회 소속 하사관들을 즉석에서 지휘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남로당의 지령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군인반란으로 시작되었으며, 남로당은 사건이 일어나자 당황하였으나 결국 승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란군 여수 순천 장악과 학살

1948.10.19 ~10.20

 

14연대 일부 군인들은 경찰과 많은 우익 인사들을 살해합니다.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명, 한민당 여수지부당,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후원회장 등과 그 가족을 포함해 70명이 살해당했습니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후 순천시로 이동해 중위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결탁해 순천을 장악하고 살인, 약탈, 방화 등을 저질렀습니다.

반란군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하기도 하고 인민재판을 통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을 학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더해, 혼란을 틈타 평상시 감정있던 사람들을 죽이거나 부자들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여수인민대회

제주도 출동거부병사위원회

성명서 발표

1948.10.20

1948년 10월 20일 오후 1시 여수 중앙동 광장에서 여수인민대회를 열고, '제주도 출동거부병사위원회'이름으로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 인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민족반역 정권의 명령에 대하여 조선인민의 아들로서의 사명하에 이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동포를 위하여 일어섰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승만 정부

여수, 순천 지역 계엄령 선포

1948.10.21

반란군은 벌교, 보성, 고홍, 광양, 구례를 거쳐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정부 당국에서는 반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21일에 이르러서야 국무총리의 공식적인 담화발표가 나왔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에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해 10개 대대 병력으로 진압을 명령합니다.

진압군 순천 공격 시작

1948.10.21

순천시가지 회복작전은 21일 오후 10시부터 시작되었고, 진압군이 오후 3시에 순천 시가지에 진입하자, 반란군의 주력은 광양 및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압군 순천 장악

1948.10.23

진압군이 오전에 순천을 장악하였고, 광양 일대의 반란군 주력을 섬멸하고, 여수를 탈환하기 위한 2단계 작전에 들어갑니다.

반란군의 주력은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망칩니다.

진압군의 여수 탈환 시작

1948.10.25

진압군의 여수 시내에 대한 박격포 사격을 시작으로 시가전이 이틀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진압군 여수 완전 장악

1948.10.27

진압군이 여수를 완전히 장악하고 반란군은 모두 진압됩니다.

미국의 개입

이승만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국군을 동원하여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미군이 직접 진압에 나설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미군은 이승만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남한 내 전복 세력들 억제와 제거"라는 목표에 따라, 여수순천사건과 관련된 모든 회의를 주도하였습니다.

직접 사건에 관여하지 않고, 전투병력을 투입하지도 않고, 작정통제와 조언을 원칙으로 사건에 개입하였습니다.

이러한 미군의 지원은 이승망 정부가 존립하고 반공체제를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합니다.

여수순천사건 이후

진압군과 경찰

대대적인 반란군 협조자 색출 작업

진압군과 경찰은 여수, 순천 등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반란군 협조자 색출 작업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2,500여 명의 민간인이 억울하게 상해당했습니다.

'미국 주둔에 관한 결의안'

1948.11.20

1948년 11월 20일 총99명의 국회의원은 '미군 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하여 통과시킵니다.

당시 최윤동 의원의 발언 '미군은 여수.순천 사건과 대구사건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만약 미군이 없었더라면 국군은 전멸 당했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

반공체제 구축과 숙군작업

국가보안법 제정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군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숙군작업'을 벌이는 한편,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 처벌을 하였습니다.

국군 부대명에서 사라진 '4'

여순사건 이후 서수 '4'는 대한민국 국군의 독립 부대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14연대는 없어졌고,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되었습니다.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