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학생 항일 운동
1929년 11월 3일 광주
광주 학생 독립 운동(光州學生獨立運動) 또는 광주학생 항일 운동(光州學生抗日運動)1929년 11월 3일부터 전라남도 광주 시내에서 일어난 일본 학생의 조선 여학생 희롱으로 일어난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 간 충돌과 11월 12일 광주지역 학생 대시위 운동을 거쳐, 호남지역 일대 및 서울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된 항일운동으로 1939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독립운동을 말합니다.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1929년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 최대규모의 대중적 항일 운동으로 꼽히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을 제정하였습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배경
일본의 우민화 정책과 억압
당시 일제는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20년간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안정적 수준으로 확고해 있다고 확신하고, 중국 본토 및 동아시아 전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우민화하기 위해 고등교육 제한, 직업교육과 일본어.일본사 교육 등을 실시하였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자치활동 금지, 조선인 학생의 대한 무시와 억압을 하였습니다.
일본 학생의 한국 여학생 희롱 사건
1929.10.30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이광춘.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박춘재는 항의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아 학생들간의 난투극이 벌어집니다. 일본 학생 50명 조선 학생 30명이 싸웠으나, 일본 경찰들이 일본 학생들의 편을들자 조선 학생들이 이에 집단 항의하였습니다.
당시 열차에 있던 광주일보의 일본인 기자가 신분을 밝히면서 조선학생들의 일방적 잘못이라며 비난하자 열차의 탔던 다른 승객들도 조선 학생들을 비난하였고, 조선 학생들은 그렇게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전개
1929년 11월 3일 일요일
일본의 명치일(메이지 천황 탄생일)
조선의 개천절(음력 10월 3일)
1929년 11월 3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일본에게는 메이지 유신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일(明治日)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음력 10월 3일로 개천절이었습니다.
일본은 학생들에게 등교할 것과 신사참배를 요구했습니다.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서 기미가요 제창과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
조선 학생들은 10월 30일 사건을 편향되게 보도한 광주일보사에 찾아가 편파 기사에 대한 정정을 요청했으나 신문사에서는 이에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광주에서의 첫번째 시위
1929.11.3
이러던 중 신사참배를 마친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에게 광주고보 조선인 학생이 테러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광주중학교와 광주고보의 학교간 싸움으로 번지게 됩니다.
광주보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광주농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일제제 항거하는 내용의 행진가를 부르며 가두시위를 하게 됩니다.
일본 경찰 조선 학생 60명 구속 검사국 송치
일본 경찰은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조선 학생 75명과 일본 학생 10명을 체포하였고, 11월 9일까지 임시 휴교 처분을 내렸습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은 이 일이 전국적으로 번지지 않도록 학생운동을 철저히 탄압하라고 각 학교에 지시하였습니다.
광주에서의 두번째 시위
1929.11.12
1929년 11월 10일 다시 등교하게 된 광주고보 학생들은 잡혀간 학생들의 석방을 하기 위한 시위를 계획하고 전단을 인쇄하였습니다. 전단에는 학생들의 석방, 식민지 교육 폐지, 교내의 경찰관 침입 금지,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이었습니다.
1929년 11월 12일 광주고보 학생들이 거리에 전단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고, 광주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전단은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와 광주여자보통고등하교에서도 뿌려졌으나 학교에서 철저하게 학생들을 통제하는 바람에 시위에 바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학생체포와 무기정학 무기 휴교
언론 탄압
일본 경찰들은 광주고보학생 300여 명, 광주농업학교 학생 100여 명을 체포하고, 시위에 참여한 학생은 전부 무기정학, 학교는 무기 휴학을 시키고, 이 일을 신문에 싣지 못하게 언론을 탄압하였습니다.
서울지역 학교들의 항일시위 시작
1929.12.9
1929년 12월 9일 서울에서는 일본 경찰의 예비검속 속에서도, 경신학교 학생 300여 명, 보성고보 학생 400여 명,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700여 명,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 명, 협성실업학교 학생 15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습니다.
이날 하루에만 1,200여 명의 시위학생들이 경찰에 체포 되었습니다.
이후 12월 13일까지 서울지역에서만 1만 2,000여 명이 학생이 시위, 동맹휴학에 참여하였고, 그중 1,400이 체포 되었고, 45명 구속, 35명이 최종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전국으로 번진 항일 운동
~1930.3
항일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됩니다. 목포상업학교, 정명학교, 나주고등보통학교 등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3월까지 전국 320개교에서 학생 5만 4천여 명이 참여해 1,462명이 퇴학, 3천여 명이 퇴학 혹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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