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 반란(그리스어: Στάση του Νίκα, 영어: Nika riots)
니카 반란은 532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 폴리스에서 약 일주일에 걸쳐 일어난 반란입니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이었고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수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진압으로 약 수만 명(3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반란의 명칭인 '니카'는 그리스어로 '승리'란 뜻입니다.
반란의 주체인 두 당파의 기원은 전차 경주 응원단인데 이 때 외치는 '니카!'라는 구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니카 반란
동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반란
하기아 소피아 등 수많은 건물 파괴
유스티니아누스 1세 진압 3만명 이상 사망
532년
니카 반란의 배경
고대 로마에서는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 경주가 상당히 발달했고 인기를 끌었습니다.
제국 전역에 큰 도시는 대부분 히포드롬이라고 부르는 원형경기장이 있었습니다.
또한 각 전차경주는 4개의 팀으로 나뉘어있는 경우가 보통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다른 색깔의 유니폼을 입어 서로를 구분했는데 각각 적색, 청색, 녹색, 백색이었습니다.
고대 로마 이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던 전차 경기
4개의 팀 적색 청색 녹색 백색
동로마 제국에서는 4개의 전차경주팀은 2개로 줄어 녹색당과 청색당이 남았는데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각각 큰 파벌을 이루고 현대의 정당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히포드롬은 고대 로마의 포롬이나 아테네의 아고라처럼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내세울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전차경주팀은 현재의 정당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
2개팀 녹색당 청색당
파별 형성 현대 정당에 버금가는 위상
당시 청색당은 주로 대지주와 그리스-로마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고 그래서 전통 기독교인들이 많았으며, 고대 로마 서부의 전통을 이어받은 집단인데 반해 녹색당은 상인, 기술자 등 중간 계층이 주로 후원했고 종교적으로는 단성론에 가까웠으며, 고대 로마 동부에서 새로 발흥한 집단이었습니다.
청색당
대지주 그리스-로마귀족 후원 전통 기독교
고대 로마 서부의 전통
녹생당
상인 기술자 등 중간계층 후원 종교 단성론
고대 로마 동부의 신흥 집단
양 파벌은 마치 정당처럼 조직을 이루고 지도자를 선출했으며 황제는 중요한 공공사업을 그들을 통해서 벌였고 심지어 각각 사병조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양측은 서로 빈번히 충돌했는데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의 시기인 493년, 501년, 511년에 충돌했고 특히 511년에는 황제가 직접 나서서 황제의 직을 걸고 폭동을 해결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양상을 띠었습니다.
번번히 충돌했던 청색당과 녹색당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 시기
493년 501년 511년 충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27년 즉위할 당시 청색당을 지지했고 이들의 지지에 입는 바가 컸는데 점차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지자 녹색당뿐만아니라 청색당도 억압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두 당은 강력한 형사적 처벌 조치와 탄압을 받았고, 고토 수복으로 대표되는 대사업은 제국의 주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주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역에서 황제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었습니다.
거기에 트리보니아누스와 카파도키아의 요한 등 휘하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로 시민들의 불만이 점차 팽배해졌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527년 즉위 당시
청색당 지지
권력이 공고해 지자
녹색당과 함께 청색당도 억압하하는 정책
관리들의 부정 부패 시민 불만 표출
니카 반란의 전개과정
532년 1월 10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 청색당과 녹색당이 집결하여 서로 연대하여 황제의 절대 권력에 대항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532년 1월 10일 콘스탄티노폴리스 히포드롬
청색당과 녹색당 집결
"자비로운 녹색당과 청색당이여, 모두 영속하라"
군중은 폭동을 일으켰고 감옥을 부수고 관리들의 집에 무차별 방화를 하였습니다.
이때 발생한 화재로 원로원 의사당, 하기아 소피아 성당까지 불에 타버렸습니다.
하기아 소피아, 출처 : 나무위키
하기아 소피아 등 소실
폭동은 다음날과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고 황제는 군중의 요구대로 관리들을 경질했으나 군중은 전임 황제의 조카인 노인 히파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며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군중, 전임 황제의 조카
히파티우스를 황제로 옹립 시위 계속
유스티니아누스는 경기장에서 그들을 진정시키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황궁으로 피신했습니다.
황제와 측근들은 도망갈 채비를 하고 막 도피를 논의 했습니다.
그 때 황후 테오도라가 회의장에서 황제를 꾸짖으며 당당히 맞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도망쳐서 안전할 수 있다하더라도 도망가서는 안되며 황제로서 부끄럽게 도망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은 끝까지 황궁을 지키겠다고 당당히 주장했습니다.
그녀의 주장을 듣고 황제와 측근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란진압을 모의하였습니다.
우선 나르세스가 노회한 책략가다운 면모를 확실히 발휘했습니다.
나르세스는 반란 세력의 연대를 해체하는 게 선결과제라고 보았고, 테오도라에게 받은 뇌물을 가지고 청색당의 지도부와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유스티누스 1세와 유스티니아누스의 공동 통치기에 청색당에 베풀어진 은혜를 상기시키며 새 황제로 선포된 히파티우스는 녹색당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를 통해 나르세스는 청색당의 지도부와 담판을 짓는 데 성공했고, 강력한 연대를 이루고 있던 양 당은 결국 분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르세스 장군
청색당 지도부와 접촉 녹생당과의 분열 획책
그리고 이 시점에 제국 최고의 용장이자 전술가라고 할 수 있을 벨리사리우스가 나섰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던 병력들을 지휘하여 반란의 진원지였던 히포드롬으로 진격했습니다.
공격은 신속하고 기습적이었습니다.
허를 찔린 봉기자들은 벨리사리우스 부대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했고, 전해지기로는 약 3만명이 이 진압 과정에서 학살당했습니다.
벨리사리우스 장군
히포드롬 기습
3만명의 군중 학살
군중들로부터 얼떨결에 황제로 추대된 노인 히파티우스도 황제 앞에 잡혀왔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가 자신의 의사에 반해 황제로 추대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용서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황후 테오도라가 제지하며 처형을 주장했습니다.
한번 군중에 의해 제관을 받은 몸이니 나중에라도 반란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습니다.
결국 히파티우스도 처형되었고 이로써 반란은 모두 진압되었습니다.
히파티우스 처형
반란 모두 진압
니카 반란의 결과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자유시민의 전통을 확실히 꺾고,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고 표현합니다.
이 반란의 와중에 전소된 하기아 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손에 의해 재건되었고,그는 완공된 성당을 보고 "솔로몬이여, 짐은 그대를 능가했도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절대적인 황제로 자리매김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었습니다.
절대적인 황제권 확립 성공
하기아 소피아 재건
그러나 수백 년을 이어온 사회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 이후에도 로마의 공화적 전통은 이어졌습니다.
로마의 공화적 전통은 이어짐
이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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