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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홍경래의 난(洪景來ㅡ亂)

홍경래의 난(洪景來ㅡ亂)

홍경래의 난(洪景來ㅡ亂)은 1811년(순조 11년) 음력 12월 18일(양력 1812년 1월 31일)부터 1812년(순조 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까지 홍경래·우군칙 등을 중심으로 평안도(청천장 이북)에서 일어난 넓은 의미에서의 농민 반란입니다.

홍경래의 난의 원인으로는 크게 2가지로 파악되며, 하나는 사회적 모순이고, 또 하나는 한때 지역감정으로 남아 있던 서북 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홍경래의 난의 배경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습니다.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지식인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사로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지만, 종래의 관직 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포섭할 수 없어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인 역량의 성장

=> 교육과 경제력의 성장

=> 종래의 체제와 방식으로 불만 세력 증가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 발전과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중앙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 되었고 지역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었습니다.

서북 지방은 고려 시대 때부터 여요전쟁 등의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으로서 지속적으로 수난을 당해 왔습니다.

게다가 묘청의 난, 조위총의 난 등 반란도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중앙정부가 보낸 군대에게 진압당했습니다.

결정적으로 후기에는 몽골의 침략에 아예 직통으로 갈리고 동녕총관부라는 이름으로 편입되기도 하는 등 가루가 되도록 얻어맞았습니다.

원나라 말기엔 홍건적도 침략해왔습니다.

이렇듯이 전쟁이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기에 서북 지방은 조선 시대에 와서도 고전적 양반이라는 계층이 생길 여지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청야 전술이 주된 전술이었기 때문에, 농사도 좀 짓고 해서 경제력이 상승하려 하면 전쟁 터져서 다시 갈리고의 무한 반복이었습니다.

특히나 서북지방은 하천 유량이 부족해 대대적인 치수관개사업이 수반되어야 제대로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이게 안되니 무려 19세기까지도 수도건파법이라는 변칙적인 재배방법을 쓸 지경이었습니다.

자연히 삼한 시기부터 토지 개간과 치수관개에 힘써온 하삼도 지방과 비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표면상 이유로는 조선 시대에 서북인을 일반적으로 문무 고관에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격문에서 홍경래는 “임진왜란 때 재조(再造)의 공이 있었고, 정묘의 변에는 양무공(襄武公, 정봉수의 시호)과 같은 충신이 있었다. 돈암(遯庵, 선우협(鮮于浹: 1588~1653)의 호)·월포(月浦, 홍경우의 호)와 같은 재사가 나도 조정에서 이를 돌보지 않고, 심지어는 권문세가의 노비까지 서북인을 '평안도 놈'이라고 멸시하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완급(緩急)의 경우에는 서북인의 힘을 빌리면서도 400년 동안 조정에서 입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북방 출신인 태조와 태종 대에도 이 지역은 무시당하였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는 '서북 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평안도, 함경도 두 도에는 300년 이래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 자신이 서북보다 더 차별받은 동북 지방 출신이므로 그런 명령을 정말로 내렸을 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이에 대해서 후에 태조의 이름을 팔아서 서북 차별을 정당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세종조의 4군 6진 개척 과정에서 시행된 사민 정책이 시간이 지나 중종 대에 이르러서부터는 죄인의 가족을 서북 지방으로 보내 버리는 형태로 변질되면서 서북 지방은 완전히 유배지로 낙인찍혔습니다.

특히 함경도는 열악한 기후에다 원래 여진족이 다수 거주했던 지역이라는 점과 더불어서 당시 조선 사람이 서북 지방을 보는 시각은 과거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보는 시각, 혹은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를 본 시각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다만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서북인의 불평불만을 이용하여 거사의 첫 조건으로 내세워 민심을 얻기로 꾀하였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서북인에 대한 차별

조선 서북인을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지 않음

당시 과거 제도도 크게 부패하여 권문세가의 자제는 무학둔재(無學鈍才)라도 급제의 영예를 차지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쉽게 성공할 수 없으며, 특히 평안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있으니, 이것이 홍경래로 하여금 개조범상(改造犯上)의 뜻을 굳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제도 부패

권문세가 자제 무학둔재(無學鈍才)라도 급제

그렇지 못하면 성공 요원

 

16세기에는 직전법이 폐지되어 전주 전객제가 소멸하고 지주 전호제가 확산되었고, 17세기에는 신분질서의 동요와 유통경제의 성장으로 인하여 지주 전호제가 경제적 지주 전호제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토지 소유에 있어서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농민층이 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재정 부족에 시달리던, 조선왕조는 부세 징수에만 급급하여 농민들의 체제 이탈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른바 무토불농층(無土不農層)이라 불리는 이들은 숙종 31년 경상 감사의 장계에서 5만여, 충청 감사의 장계에서 10만여가 언급됩니다.

기민(飢民)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땅 없이 떠돌면서 사회 불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에 유난히도 빈발했던 각종 자연재해들은 사회 불만을 더욱 극대화시켰습니다.

1809년 발생한 기록적인 흉년으로 대대적인 기민이 발생했습니다.

흉년 때마다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이들을 돕기 위해 곡식을 무상제공하는 진급제도가 마련될 정도.

1810년 순조실록에는 기민이 840만 1,209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숫자가 언급됩니다.

진휼을 마친 이후인 <순조실록> 순조 10년 5월 27(경진), 47 집 658 면의 기록에 따르면 ‘수원이 14만 1천 1백45구口, 내하전 별순 2만 7백 87구, 광주가 4만 5천 3백 12구, 경기도와 여주 등 28읍에서 38만 7천 8백 89구, 호서의 평특 등 50 읍진과 역에서 1백 31만 1천 9백 59구, 호남 전주 등 90 읍진이 4백 76만 4천 4백 57구, 영남의 경주 등 71읍진과 기민이 1백 72만 9천 6백 60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모두 840만 1천 2백 9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황당하게도 그 해 말에 기록된 8부 5도의 총 인구 758만 3,036명 보다 더 많은 숫자입니다.

<순조 실록> 순조 10년 12월 30(경술)에 기록된 한성부에서 올린 인구 조사 기록을 보면 경조(京兆)에서 민수(民數)를 바쳤습니다.

5부(五部) 및 8도(八道)의 총 원호(元戶)는 176만 1,887호였는데, 남자는 375만 4,890구(口)이였고, 여자는 382만 8,156구(口)였습니다.

남녀를 더한 총 인구수가 758만 3,036명이다.

기민과의 차이는 무려 81만 8,163명이나 됩니다.

이런 이들은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을 떠나서 서북 지방으로 이주했는데, 서북 지방의 광산붐에 편승해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맹아론과 연결되는데, 왜냐하면 몰락한 농민들의 상업적 잠채로 연결되는 모습이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 이후 몰락 농민이 일거리를 찾아 임노동자로 변하는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조선은 잠채가 산업발전과 연결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민고의 폐단에 고리대로 농민층의 몰락이 극심했던 기민들까지 몰려드니, 서북 지방은 그야말로 거지 소굴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가장 많이 몰린 것이 잠채, 그중에서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금광이었습니다.

그래서 홍경래 군이 금광이 난다는 소문을 터뜨리고 농민들을 모집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돈에 고용된 광산 노동자 또는 향임에 의해서 동원된 부대로서, 그리고 될 대로 되라거나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홍경래 군에 가담하여 홍경래 군의 세를 늘려줬습니다.

농민들의 몰락

이른바 무토불농층(無土不農層) 기민(飢民)

대규모 서북 지역으로 이동

잠채와 금광

18세기 중반 이후 서북 지방 수령들은 다른 지방 수령에 견주어 더욱 긴밀하게 세도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수탈이 매우 심해졌습니다.

매향(賣鄕)과 민고(民庫)가 대표적이었습니다.

매향은 상인들에게 향임을 강제로 떠넘겨 부세 행정을 맡도록 하게하였으나, 이 과정이 강제적이고 워낙에 많은 돈을 뜯어내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민고로, 민고는 청나라로 사신을 보내느 것을 의미하는 연행의 경비와 각 읍의 경비를 서북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충당하게 한 창고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잦은 연행으로 부담이 엄청났고, 조선 후기에 연행이 감소할 무렵에는 수령의 사금고화로 뇌물 창고 기능을 하였습니다.

매향으로 수탈하고 민고의 부족분을 다시 향인들에게 전가하여 수탈하였습니다.

수령들의 과도한 수탈

매향(賣鄕)과 민고(民庫)가 대표적

이러한 배경으로 서북민의 대한 차별이라는 피해의식과 결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게 되었습니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 전 향임들이 주도하여 봉기를 일으키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남부에서 곤궁에 의해 발생하는 농민 봉기와 달리, 서북 지역에서는 향임들의 주도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1808년 함경도 북청보와 단천의 농민봉기, 주도층 향임이었고, 홍경래의 난 얼마전에 황해도 곡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 역시 향임들이 주도한 수령에 대한 반관 투쟁이었습니다.

서북민에 대한 차별

수령들의 과도한 수탈 - 향임(상인)

=> 중앙정부에 대한 반발

=> 상인 중심의 봉기 발생

홍경래,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모으다

반란을 주도한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사람으로, 과거에 응시할 정도로 뛰어난 유교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유교 뿐만 아니라 병서나 술서, 특히 정감록에 통달하였스빈다.

그러나 1798년 사마시(司馬試)에서 낙방한 뒤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수가가 되어 각지를 전전했는데 이 경험으로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1800년 홍경래는 가산(嘉山)에 있는 재략이 풍부하고 풍수복좌를 업으로 하는 우군칙을 만나 친분을 맺고 반란을 모의했고, 가신의 역속(驛屬)이며 졸지의 부호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李禧著)를 물주로 끌어들였고, 이희저는 광산 다복동에서 광산을 경영하여 사람을 끌어모았고, 밤이 되면 군사훈련을 시켜 반란을 준비해나갔습니다.

1810년 11월 무렵 홍경래와 우군칙은 봉기의 구체적인 계획을 새우고, 문재(文才)가 뛰어난 곽산의 진사 김창시(金昌始) 등을 심복으로 하여 거사에 참여시켰고, 다복동에 30칸 기와집을 짓는 등 봉기군의 본부를 차리게 됩니다.

1811년 7월 이후 태천의 김사용(金士用), 곽산의 홍총각, 개천의 이제초(李濟初)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그 밑에 평양의 양시위(楊時緯), 영변의 김운룡(金雲龍) 등을 비롯한 장사들을 모두 선봉장 겸 군사 지도자로 하였습니다.

지휘부

가산 우군칙, 무과 급제 이희저(李禧著)

곽산 진사 김창시(金昌始), 태천 김사용(金士用)

곽산 홍총각, 개천 이제초(李濟初) 등

선봉장 겸 군사 지도자

평양 양시위(楊時緯), 영변 김운룡(金雲龍) 등

이 장사들은 주로 홍경래의 조직활동에 의해 봉기의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평안도 남부 및 황해도로부터 모여든 인물들이었으며,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없는 농민이나 임금노동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박천의 김혜철(金惠哲), 안주의 나대곤(羅大坤) 등 상인들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참여하였습니다.

상인들은 특히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절대적인 성과를 올렸습니다.

자금조달과 병력모집

상인

박천 김혜철(金惠哲), 안주 나대곤(羅大坤) 등

주도 세력은 또한 철산의 정경행(鄭敬行), 선천의 유문제(劉文濟) 등 청천강 이북 각처의 권력을 쥐고 있는 명망가들과 행정 실무자들을 포섭하여 내응세력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봉기군을 맞아들이고 자기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가산의 대령강(대령강) 인근 다복동(多福洞)에 비밀 군사 기지를 세워 내응세력을 포섭하고, 거사하기 전부터 이곳에 옮겨와 금광 채굴을 구실로 유민을 꾀어 장정 일꾼을 모아들였습니다.

행정 실무

철산 정경행(鄭敬行), 선천 유문제(劉文濟) 등

이리하여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1811년(순조 11년)에 종래에 없었던 큰 흉년이 들게 되어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궁민(窮民)을 끌어들여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우군칙을 참모로 한 본대는 가산·박천을 함락시킨 후 한양으로 남진케 하고, 1대는 김사용을 부원수, 김창시를 참모, 박성간(朴聖幹)을 병참장(兵站長)으로 하여 곽산·정주를 점령하고, 선천의 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안주를 공략할 방책으로 거병하였습니다.

그런데 거병이 막히지 않고 잘 이어갔습니다.

거병

1811년 순조 11년 대흉년

홍경래 스스로 평서대원수

홍경래의 난 진행과정

1811년 음력 12월 18일(양력 1812년 1월 31일) 삼경에 이희저의 일대가 가산군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고 난을 일으켰습니다.

홍경래의 난

이희저 가산군 관아 습격

1811년 음력 12월 18일

1812년 양력 1월 31일

 

군수 정시(鄭蓍)와 그의 아버지 정노(鄭魯)를 죽이고, 서북의 수령들에게 격문을 보내 항복을 종용하며, 청천강 이북 지역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당시의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자제(父老子弟)와 공사천민(公私賤民)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라. 무릇 관서는 기자와 단군 시조의 옛터로서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고 급제하고 문물이 발전한 곳이다. 저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으며, 또한 정묘호란에는 양무공 정봉수가 충성을 능히 바칠 수 있었다. 돈암 선우협의 학식과 월포 홍경우의 재주가 또한 이곳 서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존하고 또한 과거 시험에 당하여서는 서토의 글을 빌었으니 400년 동안 서토의 사람이 조정을 버린 적이 있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권신들의 간악한 짓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김모, 박모(박종경)의 무리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고 재앙별과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 흉년이 거듭 이르고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가 구렁에 빠져서 산 사람이 거의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세상을 구제할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의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나면서 신령함이 있었고 5살 때에 신승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으며 성장하여서는 강계 사군의 여연에 머무르기 5년에 황명(皇明)의 세신 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 10만으로 부정부패를 숙청할 뜻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곳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므로 차마 밟아 무찌를 수가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병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으니 의로운 깃발이 이르는 곳에 소생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각 주, 군, 현의 고을원들에게 보내니 절대 동요치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밟아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니 마땅히 명령을 따라서 거행함이 좋으리라. 위 격문을 안주병사, 우후목사와 숙천부사, 순안현령, 평안감사, 중군, 서윤과 강서현령, 용강현령, 삼화부사, 함종부사, 증산현령, 영유현령에게 내리노라. 대원수.

격문의 한계

평안도 서북지방 차별로 지역 고립

평안도 전역에만 격문 발송

홍경래가 평서대원수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군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 방면을 공략하고, 김창시와 우군칙이 모사,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都摠)을 맡았습니다.

봉기군 본대는 가산군과 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2월 15일(음력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의주를 위협하였습니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습니다.

봉기군은 청천강 이북의 여러 읍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요해처인 영변에서 내응세력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경계태세가 정비됨으로써 병영이 있는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홍경래 암살 미수사건

영변 공략 안주 진격 계획 지연

1811년 음력 12월 21일

1812년 양력 2월 3일

홍경래군은 남하하는 제1관문인 안주를 공략하기 위하여 박천의 송림리(松林里)로 집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李海愚)와 목사 조종영(趙鍾永)이 필사의 각오로 천여 명의 병사를 모아 2대로 나누어 2월 11일(음력 12월 29일)에 송림리의 홍경래군을 공격하였으며, 곽산 군수 이영식(李永植) 휘하 원군의 도움으로 홍경래군은 대패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었습니다.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정주성에는 박천·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습니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함으로써 군사를 해산하고 주요 인물들은 정주성에 들어갔습니다.

송림전투 반란군 패배

관군 약탈 학살 초토화작전

반란군 정주성 농성 시작

1811년 음력 12월 29일

1812년 양력 2월 11일

한편 이 변보가 1812년 2월 2일(1811년 음력 12월 20일) 평양에 전해지자 평안감사 이만수(李晩秀)는 1812년 2월 4일(1811년 음력 12월 22일) 순안의 병사를 안주로 향하게 하고, 다시 열읍(列邑)의 병사를 계속 동원하게 하고, 도내의 곳곳 요새를 굳게 지키게 하며, 만일을 위하여 창의(倡義)의 유생·문사를 모집하여 평양을 방비하게 하고 일부는 출정시켜 안주의 관군에 부속시켰으나 송림리 전투에서 적을 추격·섬멸치 않았다는 이유로 이만수는 파면되었습니다.

정부에서는 병조참판 정만석(鄭晩錫)으로 양서위무사 겸 감진사(監賑史)에 임명하여 반란지를 위무케 하고, 난군에게 귀순을 권고하였습니다.

1812년 2월 6일(1811년 음력 12월 24일)에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요헌(李堯憲)으로 양서순무사에 임명하고, 박기풍(朴基豊)을 중군으로 삼아 서적(西賊) 토벌에 관한 군무를 보게 하고, 1812년 2월 9일(1811년 음력 12월 27일) 선봉대로 한양을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1812년 2월 13일(음력 1월 3일) 정주성 아래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는 송림리 전투 후 5일 만입니다.

이와 전후하여 곽산에서도 관군이 이겨 박천·가산을 회복하였으며, 8읍 중 정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하였습니다

관군 8읍중 정주 제외 모두 회복

반란군 정주성 고립

1812년 음력 1월 3일

1812년 양력 2월 13일

따라서 정주성은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관군은 사방의 의병과 더불어 유리하였습니다.

홍경래군은 성을 굳게 지키고 여러 번 성 밖으로 돌격하여 나왔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농성을 계속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봉기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초기 주도 세력이던 향임층과 상인층이 이탈한 반면, 농민층이 주도 세력으로 급부상하며, 내부에서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식량을 고루 배급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또한, 관군의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으로 격분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농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향임 중심 봉기에서

농민 중심 봉기로

관군의 무자비한 초토화작전 영향

관군은 회유를 시도하는 한편, 겨울 폭설과 반란군의 저항등으로 농성이 장기화 되자, 관군은 방침을 바꾸어 정주성 전체를 완전히 에워싸고 고립시키게 됩니다.

관군은 주변의 지원군을 소탕하여 외부 지원을 차단하고, 주민들을 외지로 소개했으며, 진영을 성과 가까운 곳으로 이동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은 계속해서 승리하게 되지만, 점점 고립되어 갔고, 성내 탈주자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됩니다.

초초해진 반란군은 성내에서 자진해서 나와 싸우게 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정주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게 됩니다.

이에 정부군은 땅굴을 파들어가 화약으로 성의 아래를 폭발시키고 성내로 돌입하여 함락시키니 5월 29일(음력 4월 19일)로 농성한 지 100여 일, 거병한 지 5개월 만이었습니다.

정수성 봉쇠 고립 후

정주성 함락

18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

농성 100여일만

거병 5개월만

이때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우군칙·홍총각 등 다수는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음력 5월에 참형되었습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842명)와 열살 이하의 남자 소년(224명)을 제외한 1,917명이 전원 처형되었습니다.

홍경래의 난의 의의와 한계

홍경래의 난은 체제 갈등이 아니라 체제 변혁의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단순한 계급적 저항이 아니라 계급 의식을 기초하여 일어난 최초의 봉였습니다.

또한,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예언서 정감록을 전면에 내걸고 나선 최초의 농민 봉기였습니다.

계급 의식을 기초하여 일어난 최초의 봉기

정감록을 전면에 내건 봉기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저항 행위의 정당성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일종의 감결 사상으로서 홍경래 불사설이 확산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동안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농민들이 정주성 농성 단계에서 능동성을 표출하면서 백성이 형성되는 초보적인 단계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신분제에 대한 의식의 성장을 통해 농민 항쟁의 수준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그가 이끈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지배 체제가 아니라 기층 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대규모의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중세 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습니다.

때문에 정주성 항쟁 시기를 강조하는 이들은 이를 '평안도 농민 항쟁', '평안도 농민 전쟁', 심지어는 '홍경래의 혁명'이라고까지 칭하기도 합니다.

평안도 농민 항쟁

평안도 농민 전쟁

정주성 항쟁은 농민이 주도

봉기군이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사례가 정주성이 함락된 뒤의 모습인데, 정주성을 함락한 관군은 성 내의 향교, 사당, 관아 등이 거의 멀쩡하게 보존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편 홍경래의 난은 봉건적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사회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봉건 권력의 교체에만 집중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란에 가담하고 내응한 자들은 주로 향임이나 상인들이었습니다.

물론 기민 같은 하층민도 가담하긴 했지만 반란 초창기만 해도 주도층은 향임이었고 반란군에게 임명된 유진장들도 향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수령질서에 반감을 가졌지만 반봉건 개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반란군에게 점령당한 고을들도 수령만 바뀌었을 뿐, 지배질서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한계 1

봉건적 사회 극복이 아닌

봉건 권련 교체에 집중

또한 홍경래는 봉건적 사회 모순을 서북민에 대한 차별만으로 여겨 삼남 지방의 농민 항쟁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봉쇄하였습니다.

물론 난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후기에는 향임과 상인층이 이탈하고 관군에게 쫓긴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농민 항쟁과 비슷하게 성격이 바뀌면서 지휘부의 생각도 달라졌지만, 이땐 이미 반군의 세력이 붕괴된터라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한계 2

서북민 차별로

스스로 연대 봉쇄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