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11일, MBC의 특종 TV 연예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당시 심사위원들은 노래를 듣고 7.8점이라는 역대 가장 낮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1992년 그해 TV저널 올해의 스타상,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 디스크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과 신인 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등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고 《Seotaiji and Boys》는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 판매량인 18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습니다.
1992년 음악 관련 모든 상 수상
방송 3사 가요 순위 프로그램 모두 석권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 디스크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과 신인 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
데뷔 음반 최대 판매량 180만장 판매
현재 K-POP 세계의 직접적인 시초가 된 앨범이자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파급력이 강했던 앨범 중 하나입니다.
현재 K-POP 세계의
직접적인 시초가 된 앨범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파급력이 강했던 앨범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의 대성공 이후로 대한민국 가요계는 하나부터 끝까지 다 바뀌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입니다.
먼저 가요계 장르는 트로트와 발라드의 양강 구도에서 댄스 음악 중심으로 바뀌었고, 가요계 소비층은 20대 이상, 특히나 40대 이상 중장년층 중심에서 10대들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무대의상도 컨셉상 입은 의상을 제외하면 정장이 상당수였으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캐쥬얼한 패션, 책가방을 들고 나오거나 캡모자도 많이 착용하는 등 상당한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활동 중단과 컴백도 이때부터 보편화됐습니다.
가요계 장르 : 트로트 발라드 -> 댄스음악
가요계 소비층 : 40대 이상 중장년층 -> 10대
가요계 의상 : 정장 -> 캐주얼한 패션등 상당한 변화
활동중단과 컴백 보편화
신승훈이 1집부터 2집까지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전성기를 누리면서 장기집권할 듯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면서 그 인기에 도전이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신승훈은 1992년 KBS 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하지만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선 1집을 낸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상을 수상하는 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신승훈 1992년 KBS 가요대상 수상
서태지와 아이들 1992년 MBC 10대 가수 수상
대중 소비방식이 빠르게 변화 시작
그 변화가 뜻하는 바는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을 기점으로 한 가수가 최고인기를 장기집권 하는 사례가 없어질 정도로 대중들 소비방식이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60년대에 이미자가, 70년대에 남진, 나훈아, 80년대에 조용필이 3년 이상 그것도 3년 연속 원탑으로 장기집권 했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로 현재까지 장기 집권한 사례는 신승훈, 김건모, BIGBANG, 조성모, 방탄소년단밖에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듣는 음악에서 보고 듣는 무대 중심으로 한국 가요계가 바뀌고 K-POP 시장으로의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의 대표적인 댄스가수는 소방차, 박남정과 김완선이었습니다.
상당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던 이들과는 또 다르게 이지연이나 강수지 등도 일본 아이돌처럼 살랑살랑 흔드는 정도의 무대는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은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선, 양현석, 이주노는 1980년대부터 B-Boy의 시조새격 인물로 방송에서 수준 높은 포인트 안무를 선보여 온 바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영상을 보면 이주노는 이미 박철우 (후에 R.ef로 가수데뷔)와 1989년부터 완성된 컨셉을 갖춘 안무를 방송무대에서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곡 안에서의 백댄서 정도의 위치만 부여받았을 뿐이지, 제대로 된 댄스 브레이크 구간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춤꾼이었던 박남정, 현진영의 1991년까지의 무대를 보더라도, 댄서들이 있는 경우에도 댄스 브레이크는 없고, 안무도 율동 수준으로 댄스 스텝을 밟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서태지는 이들의 댄스실력을 전면으로 내세우기 위해 군무 구간과 댄스 브레이크 구간을 곡 안에 별도로 마련하는 한편, 당시 한국가요에서 도입 태동기에 있었던 샘플링 기법을 활용해서 곡을 만들어 냈습니다.
<난 알아요>의 곡 27초부터 시작되는 첫 간주구간은 샘플링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사례로, 스트링 세션을 샘플링하여 마치 기타로 스트로크를 치듯이 휘몰아치는 간주를 만들어 1991년까지의 기존 가요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사운드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즉 기존의 곡은 스트로크 연주가 가능한 기타로 연주했을 간주 부분을 새로운 기법인 샘플링을 통해 스트링샘플을 기타를 치듯이 조합해서, 기존에는 없던 강렬한 사운드가 나왔고, 이 부분에 포인트 안무인 회오리춤을 집어넣어 선보임으로써 곡에 어마어마한 임팩트를 주었습니다.
지금이야 댄스곡 안에 다양한 단발성 효과음을 따다가 이리 저리 변조해서 흥을 돋우고 트랙에 버무리거나, 신디사이저 음으로 악기를 조합하여 새로운 사운드를 만드는 작업이 상식 중의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이와 같은 시도 자체가 드물었고 기술적으로도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때문에 그 필요성을 알고 있더라도 이처럼 곡 전반에 샘플링을 활용해 써내는 곡은 드물었습니다.
여기에 서태지는 당대 밀리 바닐리를 통해 빌보드에서 유행하던 랩스타일인 '쿨랩'을 국내 가요 가사에 도입하여 비록 각운은 분명하지 않지만 랩 플로우는 갖춘 초기 형태의 랩 구간을 선보였고, 양현석의 제안으로 멜로디 부분을 추가하여 곡을 완성하였습니다.
이어 곡이 인기를 끈 이후에는 스타일링에도 공을 들여 당대의 패셔니스타로 당시 청년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와 같은 시도를 통해 비로소 안무와 곡, 스타일링이 한데 어우러지는 K-pop의 형태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는 그룹 내에서 작곡/편곡/안무구성/스타일링이 자체적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비로소 시도해볼 수 있는 구성이었습니다.
한 가지 정도만 잘 해도 주목받는 신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인데, 처음부터 이와 같은 완성형 무대를 선보인 것입니다.
듣는 음악에서
보고 듣는 무대 중심으로
안무와 곡, 스타일링이 어루러진 K-pop 형태 완성
난 알아요 무대로 돌아가서 보면 의상컨셉만 비슷하게 잡은 다른 의상을 입은 3명의 멤버가 귀를 잡아끄는 충격적인 스크래치 힙합 사운드와 함께 군무로 시작하고, 서태지가 랩을 꽂은 후 메탈 사운드와 함께 댄스 멤버의 댄스브레이크, 다시 후렴에서 서태지의 사랑노래, 곧바로 양현석의 랩과 댄스, 다시 포인트 안무가 들어간 군무, 그리고 3명의 랩과 댄스, 다시 메탈 사운드와 함께 댄스 멤버의 댄스 브레이크, 그리고 후렴에서 서태지의 사랑노래로 이어지는 꽉찬 구성은 이전의 가수들의 무대와는 그야말로 별세계의 모습입니다.
이런 특징은 특히 SM이 철저히 연구해서 다른 가수들에게도 적용시키던 것이 H.O.T.에서 폭발하고 또 그것을 다른 소속사들이 다 따라해 지금까지 한국 K-POP 시장의 핵심코드로 자리잡게 되는데, 핵심적인 요소는 이미 이 서태지 1집 무대에 거의 다 들어가 있습니다.
1세대 아이돌 이전의 가수들도 이 앨범 이후 달라진 판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가수들은 급격하게 사라진 반면 서태지의 방법론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서 적용할 수 있던 가수들은 크게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서태지 이후 가요계가 댄스 음악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 전에도 댄스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인기가 약한 장르도 아니었습니다.
서태지 이후의 한국 가요계가 서태지의 방법론을 따르는 댄스 음악 중심으로 바뀌었는데, 그 파괴력은 서태지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상상 이상이었다고 정리해야 옳은 해석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예시가 바로 한국 흑인음악의 아버지라고 자부하는 현진영이 있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의 현진영과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의 현진영의 무대는 완전히 다른 가수의 무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리고 인기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의 현진영은 이름이나 조금 알린 정도였다면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의 현진영은 절정의 인기를 자랑하는 가수가 됩니다.
당시 최고 수준의 흑인음악 이해도와 열정, 아직도 한국 역대 최고의 댄서로 꼽는 전문가들이 있을 정도로 초월적인 댄스 실력, 남부럽지 않은 가창력, 잘생긴 얼굴까지 완성형 가수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던 것이 현진영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댄서인 구준엽과 강원래를 옆에 끼고 등장했던 데뷔 시절을 생각하면, 흔히 사람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성공조건이라고 말하는 거의 모든 것을 현진영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진영이 초절정 인기가수가 된 것은 뛰어난 실력과 성공조건을 갖춘 데뷔초부터가 아니라 서태지에 엄청난 영향을 받은 무대를 들고 나오면서부터입니다.
2010년대 후반부터 소위 탑골 GD라고 불리면서 놀라울 정도로 시대를 앞섰다고 칭송을 받고 있는 양준일도 서태지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엄청난 것은 현진영과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본토에서 직접 흑인음악을 듣고 한국에 들고 나온 양준일이지만 서태지 이전은 미래적인 모습보다는 과거의 가수들과 비슷한 색깔의 무대를 보여줬습니다.
반면 서태지 이후는 동일한 양준일임에도 무대의 색깔과 임팩트가 완전히 다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이후로는 한국 가요계에 완전한 단절, 단층이 생겼습니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비슷한 위치인 플리퍼즈 기타와 그들의 영향력으로 J-POP 시장이 크게 변화한 것과 비교하면, 그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끼친 이 한 장의 앨범과 무대가 K-POP 시장을 재편했다는 것은 해가 지나갈수록 더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90년대에서 가장 중요한 한국 가요 앨범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
90년대 가장 중요한 한국 가요 앨범
2집 Seotaiji and BoysⅡ 1993년 6월 21일
하여가, 우리들만의 추억, 너에게
엄청난 성공을 거둔 1집 활동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방송가의 관행을 깨고 돌연 잠적을 했습니다.
2집을 준비하기 위한 휴식기였지만 당시엔 활동종료 - 휴식 및 다음 음반 제작 - 컴백의 패턴이 생소한 것이어서 해체설, 사망설 등 다양한 루머가 돌았고 활동중지가 오히려 대중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2집 컴백 무대를 당시 제일 잘나가던 예능 프로였던 특종! TV 연예에서 했습니다.
컴백 몇 주 전부터 광고를 엄청나게 했고, 예능 정보 프로에서도 계속 떡밥을 뿌렸으니, 당시 청소년들은 진짜 어떤 노래를 들고 나올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발매 당일 동네 레코드점에선 당연스레 매진이었고 큰 레코드점에선 번호표까지 나눠주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당연히 당시 기성 언론에서는 마케팅의 천재라는 부정적인 별명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컴백 당시 양현석과 이주노의 레게머리나 너에게 활동 당시 앞머리에 빨간색 브릿지를 넣은 서태지의 헤어스타일 때문에 언론에서도 방송사에서도 많이 시끄러웠습니다.
결국 그룹은 '너에게' 활동 도중 방송정지크리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음반은 잘 팔려나갔고 곡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하여가는 처음에는 많이들 이상한 노래라고 갸우뚱했지만, 하여가가 나온 날 학교 앞 노래방은 만실. 노래방에서는 서태지의 곡이 추가될 때마다 입구에다 <서태지 "너에게"> 이런 식으로 노래 들어온 걸 광고했습니다.
록 음악으로의 회귀를 선언한 앨범이며 동시에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기 시작한 앨범으로 서태지 팬들 사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 중 최고의 음악성으로 평가받습니다.
수많은 악재들로 인해 앨범 판매고가 크게 떨어졌다는 게 150만장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 중에서도 특히나 록 음악의 색깔이 강한 앨범으로, 전체적으로 자신의 음악적 뿌리인 스래쉬 메탈을 주축으로 하나,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 앨범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대 전 세계 록의 흐름을 주도하던 얼터너티브 록이었습니다.
록 매니아들 사이에선 기존의 록 음악과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음악으로 불렸던 만큼 골수 정통록/헤비메탈 키드인 서태지의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텐데 이 앨범에선 꽤 높은 수준의 흡수력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발해를 꿈꾸며>의 전개부에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스타일의 펑키한 기타 연주가 나타나고 후렴부에는 U2의 디 에지를 연상시키는 쌩딜레이톤이 나타납니다.
두 밴드의 음악 스타일은 꽤 다르나, 그 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주목할 만한 기타 연주의 스타일들이 이 곡엔 자연스럽게 공존합니다
록 성향이 강한 앨범
전세계 록의 흐름 주도 얼터너티브 록
타이틀곡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주제인 <발해를 꿈꾸며>였습니다.
김대중 前 대통령은 이 곡을 듣고 서태지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나중에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발해를 꿈꾸며>는 교과서에도 실렸는데, 요즘은 대중가요가 교과서에 실리는 일이 종종 있지만, 발해를 꿈꾸며가 처음 실렸을 때는 흔치 않은 일이라 기사화 되며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실 이데아>로 입시 제도를 비판했습니다.
이전까지 서태지가 청소년, 청년층을 대변한 가치는 자유와 도전 같은 추상적 내용이었다면 교실 이데아에선 교육이라는 구체적인 논쟁거리를 던진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민중가요라고 해서 사회를 비판하는 노래 자체는 엄연히 불려지고 있었지만, 포크송 위주였기 때문에 이미 당대 청소년들의 취향에 맞는 음악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러한 사회비판적인 노래를 당대의 인기 장르와 결합하는 식으로 불렀고, 서태지는 단순한 10대들의 우상을 넘어서서 문화대통령으로 불리게 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이 발매되었던 당시의 시대배경을 보자면 사회가 문민화, 자유화되는 것과는 상관없이1986년부터 교복부활이 시작되어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할 시점에는 교복 착용이 완전히 재정착되었고, 청소년 일탈을 막는다는 명목하에서 학생 두발단속도 염색이나 장발, 파마만 아니라면 어느정도 풀어주던 1980년대에 비해 크게 강화되어, 심하면 1970년대식으로 빡빡머리와 단발을 강제 하는 학교들도 종종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도 체벌남용과 촌지, 0교시, 야간자율학습은 여전히 횡행하는 등 당대의 청소년들은 사회전반의 자유화와 문민화의 흐름에서 한창 소외되었습니다.
사실 입시위주 교육과 과도한 사교육으로 인한 학생 혹사 문제는 이미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심각한 사회문제로 지적을 받아왔을 정도로 유서깊었기 때문에 교육문제 비판 자체는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거기에 더해서 일선학교에서 대학을 보내야된다는 이유로 청소년들의 자유와 개성을 무조건 억압하는 세태를 노골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이었습니다.
문화 대통령으로 등극하는 데는 위 두 곡이 가장 주목을 받았지만, 소재의 다양성을 늘렸다는 점에서 <내 맘이야>, <제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곡도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그리고 3집 컨셉으로 치마를 입고 나와 나름 충격을 안겼습니다.
아마 내 맘이야에 나오는 가사 내용을 실제로 써먹은 듯 합니다.
이후 치마 콘셉트는 조금 순화되어 삼국시대 복장 비슷한 걸로 바뀌었는데 치마 콘셉트는 발해 왕자의 이미지를 살리려는 당시 코디네이터의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원래 전공이 한국 전통 의상이었기 때문에 바지 위에 덧입은 치마가 금관조복을 연상시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생활한복에 가까운 의상을 제작해 입히기도 했다.
문화대통령이 되다
서태지 안티가 발생하기 시작한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크게 음악적 안티와 사회/문화적 안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음악적 안티는 이 앨범이 락으로 회귀하면서 발생했습니다.
시나위의 베이스 주자였던 서태지는 원래부터 본류라 할 수 있는 정통 메탈 사운드 마니아들에겐 전향자 취급받고 있었고, 3집의 행보는 오히려 자존심 센 락매니아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특히 <교실 이데아>에 협력하고 라이브에서는 아예 특별게스트로 참가한 크래쉬 같은 경우는 '배신자'라는 소리까지 듣는 바람에 나중에 인터뷰에서 보컬 안흥찬이 해명한 적도 있을 정도. 이 때가 PC 통신의 확산기라고 할 만한 시기였는데 음악 게시판 등지에서 많은 논쟁이 오갔었습니다.
음악적 안티의 등장
정통 메탈 사운드 마니아들 전형자 배신자 취급
사회/문화적 안티는 3집의 사회비판 메시지에 반발한 기성세대에서 등장했습니다.
1집, 2집에서도 대중문화의 주축이 10대로 넘어가는 현상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감은 있었다지만 음악 산업 분야에 한정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서태지가 3집에서 보여준 내용은 사회 전반에 걸쳐 세대간 담론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언론을 중심으로 '서태지 죽이기'로 통칭되는 공격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교실이데아 루머 문단에서 소개할 '피가 모자라' 사건 때문에 개신교계에서도 안티가 발생했고 기존 팬들의 동요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대 교육계 입장에서는 교복부활이 막 완료되었고, 청소년 탈선방지를 명목으로 두발단속도 강화해놓은지 몇년이 채 안되던 시기였는데 톱스타가 이러한 흐름을 뒤엎으려고 하니까 당황해했고, 당대의 40대 이상 보수적인 기성세대들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트로트가 한물간 음악 취급받기 시작하고, 힙합과 랩이 주류가 되는 등 음악시장의 유행이 자기네들 취향과 맞지 않게 흘러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거기에 대놓고 민중가요적인 가사를 넣은 노래까지 내놓자 여기에 발작한면이 있었습니다.
소속사를 통해서 1996년 1월 23일 은퇴 의사를 밝혔고, 같은 달 31일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유림회관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갖고 공식적으로 그룹 해체를 발표했습니다.
1996년 1월 31일 은퇴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유림회관
그룹 해체 공식 발표
이들은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건 다 보여 주었다"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말 그대로 돌연 은퇴를 선언했고 지상파 3사 저녁 메인뉴스의 첫번째 소식을 전부 차지하였으며, 스포츠신문 1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한 건 물론이고 일간지의 1면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로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깜놀하게 되었는데, 이 반응이 정말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띄우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통령이 사임을 했다는 반응과 거의 비슷했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10~20대 정도의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큰 충격에 빠졌으며 "서태지가 은퇴한다니? 이젠 한국의 대중가요계가 텅 비었다" 같은 반응이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학교에선 서태지 은퇴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오르내렸고 심지어 골수 여학생 팬들은 해체를 반대한다면서 매일 서태지의 소속사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습니다.
당시의 증언을 빌리자면, 나이어린 초등학생들 고학년 사이에서도 "도대체 왜 해체하는데?"라는 말밖에 안 나왔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인 30대, 40대, 50대에게도 이들의 은퇴 소식은 엄청난 화제였습니다.
미공개 영상을 보면 기자회견을 하고 떠나는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들을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는 기자/카메라맨들과 오빠들 따라가려고 울부짖는 팬들이 뒤엉켜 아비규환. 여담으로 서태지는 "아직도 이때를 얘기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은퇴설이 나돌던 기자회견 며칠 전에도 은퇴하면 죽겠다는 등 극단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팬들의 모임도 있었을 정도 였습니.
신문 등지에서는 불안정한 자녀들을 안정시키는 방법도 게재되었습니다.
해체 기자회견을 가진 당일 서태지와 아이들이 미국으로 출국한다는 소식이 들려와 김포공항에 취재진들이 죽치고 기다렸지만 기상악화로 인해 하루 늦게 출국했습니다.
김포공항에는 수많은 팬들이 마지막 모습을 보러 출국게이트에서 기다렸지만 혼란이 걱정되었던 건지 잠실 선착장에서 헬기를 따로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이 헬기에 타면서 팬들에게 서태지와 아이들로서의 마지막 인사를 하는 영상은 이후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 굿바이 비디오 테이프에 기자회견 영상과 함께 굿바이 뮤직비디오에 포함되어 공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