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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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8일에서 1905년 9월 5일까지,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만주와 인근 해역에서 벌인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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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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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문의 삽화, 당시 러일전쟁을 바라보는 유럽의 시선,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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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풍자화, 철처 : 나무위키
전쟁 초기, 구미열강들은 대체적으로 러시아의 승리를 예상했으나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을 강요당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5년 후 강제 합병되어 멸망하고 약 35년간의 일본 통치에 들어갔습니다.
러일전쟁
1904년 2월 8일 ~ 1905년 9월 5일
일본 제국의 승리, 포츠머스 조약 체결
청나라의 만주 수복
전쟁중 피의 일요일 사건 발생
러시아 제국의 멸망 가속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병력과 피해규모
러시아제국
몬테네그로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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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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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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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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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만 5천명
제1,2태평양함대 발트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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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만명
연합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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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43,300 ~ 120,000명 사망
146,032명 부상
74,369명 포로
전함8천 침몰, 전함 2척 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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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00 ~ 86,100명 사망
157,432명 부상
전함 2척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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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의 배경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에 2억 냥이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당시 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 영토까지 할양해야 했는데 그중에 요동반도의 할양을 러시아가 반대했습니다.
청일전쟁 일본의 승리
1894년 7월 25일 ~ 1895년 4월 17일
요동반도 할양 러시아 반대
북동항으로 반도 끝자락의 천혜의 군항인 뤼순을 일본이 차지하자, 일본의 세력 확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러시아는 독일 제국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을 반환하도록 압박했습니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간선
일본에 요동 반환 압박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상태였던 조선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와의 외교를 돈독히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세운 친일내각이 실각되고 친러파가 진출하게 됩니다.
조선 청일전쟁의 여파로 일본에 점령 상태
친일파 -> 친러파
1895년 을미사변
친러파 -> 친일파
1896년 2월 고종이 단행한 아관파천으로 일본이 세운 친일내각이 몰락하고, 다시 친러내각이 수립되자 일본은 러시아와 줄곧 협상을 벌였습니다.
1896년 5월 베베르-고무라 각서, 1896년 6월 러청 비밀협정, 그리고 3일 뒤 야마가타는 39도선에서 한국을 분할하자고 제안했으나 로바노프 외상은 반대했고, 대신 비밀조항에서 소요 발생시 양국 군대를 파견할 수 있고 충돌을 막기 위해 중립지대를 설정할 수 있다고 야마가타-로바노프 의정서를 채택했다.
그 사이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했습니다.
1896년 고종의 아관 파천
대한제국 선포 광무개혁 추진
야마가타-로바노프 의정서
일본 러시아 협상
1897년 11월 러시아와 밀약을 맺은 독일이 청나라의 칭다오 주변을 점령했고, 러시아는 1898년 3월, 청나라에게서 만주 중에서도 요충지인 뤼순과 다롄을 조차받아 이곳을 포트 아르투르로 칭하여 해군기지 및 요새를 건설하였습니다.
1898년 3월 러시아 뤼순 다롄 조차
포트 아르투르 해군기지 및 요새 건설
러시아와 일본제국은 1898년 4월 로젠-니시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양국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인정하여 내정 간섭을 자제하면서도,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내에서 이룩한 상업 관계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한제국 내 일본 경제권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만주 지역의 러시아의 지배권을 인정하였습니다.
1898년 4월 로젠-니시 협정
대한제국 내정 간섭자제
일본의 대한제국 경제권 우위 인정
만주지역 러시아 지배권 인정
1900년 청나라 북부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는 15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만주로 보내 점령하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시작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만주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본이나 다른 열강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1900년 러시아
150,000명 대군 투입
시베리아 철도 건설 시작
만주에서지 지배권 강화 목적
일본이나 다른 열강들의 반대
1903년 8월 12일 줘 공사 쿠리노 신이치로가 한국을 완전히 일본 세력하에 둘 것을 요구하고,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권한을 철도 경영에 한정시키려하였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10월 3일 39도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일본을 이 제안을 거절하면서 한반도와 만주를 분할하고, 남북 각 50km 중립지대를 설정하자고 제의했습니다 .
이러한 러,일간의 교섭은 1904년 초까지 계속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904년 초
일본 러시아
만주와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협상 계속
일본은 러시아의 병력을 100,000명으로 파악했고, 시베리아 철도의 미완성 상태로 보았습니다.
당시 일본은 250,000명을 전선에 투입시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일본보다 훨씬 강력했지만, 극동까지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극동의 교두보를 급습해 제압하여 협상은 제안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1904년 1월 21일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이후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면서 요충지를 차지하였습니다.
영국도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저리리 지원하였습니다.
일본은 전시 동원체제의 확립과 아시아주의라는 이념무장, 만주지역에 대한 대러시아 첩보망 갖춰놓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러시아가 전쟁준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하고 1904년 2월 전쟁을 개시하였습니다.
일본 초기제압 승리 확신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영국의 러시아 남하정책 저지위해 적극 차관 지원
러시아 전쟁준비 되지 않음
1904년 2월 8 러일전쟁 시작
러일전쟁의 진행과정(요약) - 글 후반에 상세한 진행과정 있음(읽기 비추천)
일본군의 대한제국 상륙
1904년 2월 6일
제물포 해전
1904년 2월 8일 ~ 2월 9일
일본제국의 승리
일본 러시아에 선전포고
1904년 2월 10일
러시아 일본에 선전포고
1904년 2월 16일
뤼순항 해전
1904년 2월 8일 ~ 2월 9일
무승부
일본의 뤼순항 봉쇄시도 지속
압록강 전투
1904년 4월 30일 ~ 5월 1일
일본의 승리
진저우-남산 전투
1904년 5월 24일 ~ 5월 26일
일본의 승리
텔리수 전투
1904년 6월 14일 ~ 6월 15일
일본의 승리
히타치마루 사건
1904년 6월 15일
러시아의 승리
모티엔 전투
1904년 7월 10일
일본의 승리
대석교 전투
1904년 7월 24일 ~ 7월 25일
일본의 승리
시무청 전투
1904년 7월 31일
일본의 승리
뤼순 공방전
1904년 8월 1일 ~ 1905년 1월 4일
일본의 승리
뤼순항 함락
제1태평양함대 궤멸
황해해전
1904년 8월 10일
일본의 승리
울산 해전
1904년 8월 14일
일본의 승리
코르사코프 해전
1904년 8월 20일
일본의 승리
요양회전
1904년 8월 25일 ~ 9월 3일
일본의 승리
사하 전투
1904년 10월 5일 ~ 10월 17일
일본의 승리
산데푸 전투
1905년 1월 25일 ~ 1월 29일
일본의 승리
봉천전투
1905년 2월 20일 ~ 1905년 3월 10일
병력열세의 일본군이
병력우위의 러시아군을 상대로
우회기동 편익포위 실현
일본의 승리
쓰시마해전
1905년 5월 27일 ~ 5월 28일
일본 제국 해군 압승
러시아 발트 함대와 태평양 함대 와해
러일전쟁의 결과
전쟁 중에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나서서 중재했습니다.
이 중재로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 모두 전쟁을 계속했다간 재정이 파탄나게 생길 터라 반 강제적으로 전쟁을 끝냈습니다.
종전 협정이 열렸던 포츠머스에서는 매년 포츠머스 조약체결일에 축제를 여는데, 자신들이 중재하여 전쟁을 멈추고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의 결과로 한반도는 끝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불과 5년 만에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지극히 열강에 치우친 발상입니다.
포츠머스 조약 체결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중재
노벨평화상 수상
1905년 9월 5일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일본의 승리와 러시아의 패배 원인
일본
승리 요인 :
대한제국내 항구 선점
기습과 뤼순항 러시아 해군 일정기간 고립
본국과 가까운 점
영국과 미국의 재정적 지원
상대적으로 풍족한 전쟁물자와 군의 사기
전쟁중 약점 :
무능한 지휘력
조급한 공격 방법
재정압박
일본군은 러일전쟁 발발 이틀 전인 2월 6일 부산, 마산, 울산 등지에 상륙해 대한제국 내 항구들을 선점하였고 대한제국 전신국을 점령하고 근해에 정박 중인 러시아 상선을 나포하는 등 철저히 전쟁 초기 기습이 알려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인천과 뤼순의 기습 성공으로 인천항과 서울을 장악하고 뤼순항에서 러시아 해군을 일정기간 고립시켰습니다.
러시아군 사령관 쿠로팟킨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40일이 지난 뒤에야 현지에 나타납니다.
그 자신의 판단으로도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대규모 회전을 치르기에 미비한 상태였으므로 객관적인 전력상의 우세를 점한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서부 러시아에서 지원이 오려면 무려 40일이 넘게 걸렸기 때문에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서 섬멸하자는 전략을 택합니다.
하지만 일본 역시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가 극심한 근대식 대규모 회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어 몇 차례의 전투 후 본인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간 벌인 전쟁들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 규모에다가 객관적인 국력의 현저한 열세로 인해 어떻게든 한 방 제대로 먹여 러시아군을 괴멸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쿠로팟킨이 의도한 장기전에 따라 러시아군은 매 전투마다 조금 불리해진다 싶으면 주저없이 철수해버렸고, 봉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압도적으로 괴멸시키지 못하면서 그저 부분적으로 타격을 가해 후퇴시키기만 했습니다.
이러는 동안 슬슬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고 여기에 일본군의 무능한 지휘력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앞선 청일전쟁이야 상대가 상대였으니만큼 그럭저럭 먹혔고, 이후의 중화민국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 제국은 좀 달랐고, 훗날 미국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전쟁은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어도 함대를 보내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은 있었다.
가장 유능했던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부임하여 몇 차례의 해전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후려잡고 무능한 지휘관들을 쳐내며, 유능한 지휘관으로 교체하는 등 강직하고 훌륭한 지휘관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미처 러시아 해군이 집결하기 전에 기뢰가 터져 기함과 함께 전사하는 바람에 해상을 일본이 장악하게 됐습니다.
일본 역시 기뢰로 구축함 하츠세, 야시마에 순양함 요시노, 수뢰정 아카츠키, 포함 오시마를 잃었으나 마카로프 제독의 끔살을 본 러시아 해군 장교들의 행동은 소극적이기만 했습니다.
그동안 일본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했고, 만주로 진군해 러시아군을 압박했습니다.
지독한 뤼순 공방전 이후, 1905년 뤼순까지 내주고, 봉천전투 패전으로 패색이 짙어지던 러시아는 국내외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고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최후의 결전을 벌였습니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끌고 온 발트 함대는 이 해전에서 우월한 성능의 전함과 숙련도 높은 승조원들, 그리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아키야마 사네유키라는 명장을 보유한 일본 연합함대에게 전멸되었고, 결국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맺으며 전쟁을 끝내었습니다.
러시아의 패배 요인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에 있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병참과 후방 기지 역할을 하는 한반도 지역을 습격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고, 일본군과의 전투도 방어만 하다가 불리하면 철수하는 식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만 임했다. 물론 이를 두고 일본군을 유인하려는 전술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문제는 그렇게 후퇴만 거듭하다가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본국에서 반전 여론이 일어나 결국 전쟁 자체를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입니다.
러일전쟁 내내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보급이나 병참을 끊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이 당시 러시아의 세력권이던 만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한반도 내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려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러시아군은 일본군과의 교전 내내 수동적인 방어전으로만 일관했으며, 일본군을 먼저 공격하거나 하는 식의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러일전쟁의 주무대인 만주에 주둔 중이던 러시아군은 고작 수가 8만 명 내외였고, 그래서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20만 명 가량의 일본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독일 국경에 주둔 중인 100만 명 가량의 주력 부대를 보내지 않고 새로 모병한 병사들 40만 명을 훈련시키느라 바빴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러시아 본국인 우랄산맥 서쪽의 유럽에서 머나먼 극동인 만주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르는 역할을 맡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러일전쟁이 벌어지던 1904년에는 아직 완공조차 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러시아는 일본보다 많은 병력을 극동으로 보내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전쟁 무렵 러시아군 병사들은 사용할 총탄조차 무려 2800만 발이나 모자랐을 만큼 물자가 부족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전장인 만주와 본국의 거리가 러시아보다 상대적으로 가까웠는데다, 전쟁 초기부터 제해권을 잡았기 때문에 배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르면 되는 상황이라 보급이 수월했습니다.
또한 교통 이전에 러불동맹의 존재로 동맹국인 프랑스가 러시아의 주전력이 동아시아쪽으로 이동하는 것에 반대습니했다.
병사들의 사기와 훈련도에서 빚어진 차이도 있었다. 러일전쟁 기간 동안 러시아군은 일반 병사들 중 상당수를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로 충당했습니다.
헌데 이들 중 많은 수는 러시아의 전제정치에 불만을 품은 정치범들이었고, 그래서 '우리가 왜 머나먼 극동에 가서 싸우다 죽어야 하냐?' 하는 불만을 품었고 따라서 사기 또한 낮았습니다.
한 예로 러시아 발트 함대의 수병은 러시아 본토에서 극동으로 가는 사이에 자기들끼리 총격전을 벌여 사상자 수십 명이 발생했을 만큼 군기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지휘관들도 이 수병들을 가리켜 "똑같은 명령을 5번이나 계속해서 전달해야 겨우 알아 듣는다."라고 한탄했을 만큼 훈련도도 낮았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러시아군보다 병사들의 사기와 훈련도가 높았고, 그래서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대부분 우세를 점유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지면 일본은 망하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온 나라가 총력전 체제에 들어갔으며, 러시아군의 진지나 요새를 상대로 한 뤼순 공방전 같은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계속 추가로 병력을 보내는 식의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여 러일전쟁 내내 시종일관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또한 전쟁 중 일본은 러시아 내 좌익 및 공산주의자들에게 거금을 주어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도록 도왔습니다.
이는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국제적인 외교 상황도 러시아에 불리했습니다. 러일전쟁 내내 러시아는 국제 외교에서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영국과 그에 버금가는 강대국인 미국은 잠재적 적국인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일본한테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며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은 언론을 통해 일본을 찬양하고 러시아를 폄하하는 식으로 여론전을 폈으며, 프랑스와 독일이 러시아에 자금을 지원하려 하자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서서 "만약 당신들이 러시아를 돕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압박을 넣어 중단시켰습니다.
러시아
패배요인 :
40일만에 지휘관 현지 도착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의 죽음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
전쟁중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
본국과 상대적으로 먼점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부실
부족한 전쟁물자
러불동맹, 프랑스 러시아 동아시아 전력 이동 반대
병력의 대부분 죄수(정치범)
병력의 사기와 훈련도 낮음
국제정세 미국, 영국 등 서구 열강 러시아 견제
잘한점 : 장기 유인전 유도
러일전쟁 이후의 러시아
러시아 제국은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부코베츠키(А. И. Буковецкий(2006))의 계산에 따르면, 대일 전쟁의 직접 지출액만 23억 4690만 루블에 달했습니다.
여기에 간접지출(전투행위로 인한 파괴, 채무이행, 유족 및 상이자 보상금)까지 고려하면 총지출액은 30-40억 루블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으며, 여기에 만일 볼셰비키의 혁명으로 채권이 무효화되지 않았을 경우 1950년까지 지출해야 할 총액은 90-100억 루블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참고로 1904년 러시아 제국 세입이 20억 1800만 루블이었으니 5년치 세금을 지불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다만 경제적 손실은 당시 재무장관이던 블라디미르 코콥초프가 프랑스에 대규모 차관을 받아내는데 성공함으로서 급한 불을 끕니다.
재정손실
1904년 러시아 제국 세입 20억 1800만 루불
전쟁 직접 지출액 23억 4690만 루불
총지출액 30~40억 루불 추산
프랑스에서 대규모 차관 차입
그러나 경제적 손실보다 끔찍한 것은 군사적 손실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대일전쟁에서 29만의 병력 손실을 입었습니다.
포로 7만 4천을 제외해도 21만 6천 명의 병력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러시아가 자랑하던 발트함대와 태평양함대의 전멸이었습니다.
러시아의 해군력은 세계 3위에서 6위로 추락했습니다.
한때는 태평양까지 넘보던 러시아 해군이었지만, 러일전쟁 직후에는 독일을 상대로 발트해 연안을 지키는 것으로 대외전략을 전면 수정했습니다.
군사적 손실
29만 명 병력 손실
포로 7만 4천 제외 21만 6천명 병력 손실
발트함대와 태평양 함대 전멸
해군력 세계 3위 -> 6위
독일 상대 발트해 연안 사수 대외전략 전면 수정
마지막으로 정치적 타격.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대립하고, 러시아 국내에서 소수민족의 반란이 격화하는 시점에서 대일전쟁 패배는 반황실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패전한 러시아 제국은 1905년 혁명이란 대격변을 겪었으며, 국민들은 로마노프 황가에 대한 마지막 기대와 신뢰를 거두었습니다.
정치적 손실
전쟁 중 피의 일요일 사건 발생
로마노프 황가에 대한 마지막 기대와 신뢰 파괴
세계 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일본의 패배를 생각하고 거문도를 점령해 해군기지화하는 등 러시아군과 맞설 계획을 하고 있던 영국은 1세기간 이어졌던 그레이트 게임을 종결했습니다.
이는 영러 협상으로 이어져 러불 동맹, 영불 협상과 함께 유럽 대륙에서 삼국 협상이 탄생하고 이에 대응한 삼국 동맹이 상호 대립하는 구도를 형성하였습니다.
또한 10년 뒤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되어 세계 공산화에 큰 족적을 남긴 소련 탄생의 배경도 됐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삼국 협상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쟁으로 인한 경제 붕괴와 식량난을 견디지 못한 러시아인들의 분노로 붕괴되고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들어서게 되고, 1945년 만주 작전으로 러일전쟁의 굴욕을 되갚아주게 됩니다.
물론 러일전쟁이나 만주 작전이나 한국 입장에선 여러 가지로 나쁜 쪽으로 영향이 컸던 사건인데,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러시아-소련과 일본이 싸웠던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러일전쟁에선 일본이 승리하며 러시아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이 소멸하며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지만, 만주 전쟁에선 소련이 승리하며 북한의 전신인 소련군정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소련 탄생의 배경
러시아 제국 에서 소련으로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
뭐가 어찌되었던 '러시아가 먼저 손을 내민' 다음 '일본이 이를 잡아주고' 러시아가 순순히 물러났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축제분위기였습니다.
열강인 러시아에 승리하면서 일본은 다른 열강들로부터 그들과 동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한반도에 대한 실질적인 종주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에 일본은 '비유럽 국가 자력의 군대에 의한 유럽 주류 강대국에 대한 첫 승리' 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웠으며 이는 대동아 공영권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일본이 아시아의 대표로 서양에게 한 방 먹였으니, 니들은 우리를 도와서 함께 싸워야 한다'는 얘기. 그리고 일본 외에도 열강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아시아 각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중에 일본이 제국주의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일본의 이런 사상에 잠깐이나마 동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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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반도 상률군 웅악성 점령지도, 출처 : 나무위키
이 전쟁은 또한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고양해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결속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각 도시들과 마을들의 중심가에 위와 같은 삽화들이 걸려 모든 국민들에게 일본군이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덴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지를 상세히 보여주었습니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 때 애국심을 고취하는 군가를 연주, 녹음하였습니다.
군함행진곡, 눈의 진군, 히로세 중좌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본의 승리
애국심 고양 국내 결속 계기
문제는 실익이었다. 이 전쟁에서 막대한 군비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포츠머스 조약에는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배상금 지불 의무가 명시되지 않아 배상금도 없었습니다.
영토라고 할양받은 남사할린도 당시로서 큰 가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당연히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고 또 당연히 받아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대한 시각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 유럽에서의 전쟁은 일종의 정치 시위 중 하나였기 때문에 원하는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구태여 상대를 두들겨 패서 내 밑으로 숙이고 들어오게 만들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전쟁은 서로의 서열간의 상하관계를 명백하게 결정하자는 목적이 강하였기 때문에 패자는 무조건 승자의 밑으로 수그리고 들어가서 승자를 상전으로 모시면서 승자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들어줘야 하는 문화가 강하였습니다.
도쿠가와 막부 이전까지 있었던 전국시대에선 이게 매우 흔한 일상이었고, 시대의 흐름을 지나 정치체제만 쇼군의 막부 체제에서 천황의 전제주의 체제로 바뀌었을 뿐 사회 구조는 거의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보니 여전히 일본인들의 전쟁에 대한 인식은 전국시대의 그 문화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승자이니만큼 마땅히 패자에게 갑질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으나 현실적으로는 그게 불가능했는데,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부조리한 대우를 받고 있다 판단하여 분노가 폭발, 이로 인해 일본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습니다.
대표젹인 사건이 히비야 방화 사건으로 1905년 9월 5일, 일본 도쿄에 위치한 히비야공원에서 일어난 폭동입니다.
집회는 러일전쟁에 대한 보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집회 도중 흥분한 민중들이 폭도로 돌변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도들은 내무대신 관저, 어용 신문이었던 고쿠민 신문사, 파출소 등에 불을 질렀습니다.
다음 날인 9월 6일 일본 정부는 긴급 칙령에 따른 행정 계엄 형태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소동을 진압한 후, 11월 29일 계엄령을 해제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17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다쳤으며, 2천 명 이상이 검거되고 검거자 중 87명은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한편 도쿄제국대학 '7인의 교수회' 같은 국수주의 지식인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30억 엔을 배상하고 연해주 및 캄차카 반도까지 할양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만약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
하지만 포츠머스 조약이 러시아에게 딱히 불리하지 않은 내용으로 체결된 이유는 당시 전황이 일본에도 딱히 유리하지 않아서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불리한 내용은 숨기고 자국에게 유리한 것만 국민들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사정을 모르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승전국인데 배상금도 없는 이상한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루스벨트가 일본을 속였다는 소문이 돌아 폭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포츠머스 조약의 결과에 대한 불만과 일본 국민들의 불만은 1910년대 말부터 시작되는 민주주의 운동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승리, 그러나
가치가 별로 없는 사할린 할양
배상금 없는 포츠머스 조약
하비야공원 폭동 발생
1910년 말 민주주의 운동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근본 원이이 됨
그러나 일본이 이 전쟁에서 얻어낸 가장 큰 성과는 열강으로의 인정이었고 이후 일본은 강대국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최강자이자 조정자라고 불릴 만한 위신을 얻게 됩니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든 다음 최종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요동 등 남만주도 사실상 영향권 내에 편입시켰습니다.
일본이 얻은 것
대한제국 속국 편입 최종 합병
요동 등 남만주 사실상 영향권 편입
동아시아 최강자 및 조정자 지위 획득
그 당시 일본의 경제규모는 러시아의 30%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러시아가 러일전쟁 전비로 최대 1억 7,100만 파운드 정도를 썼었고 일본도 러시아와 거의 비슷한 1억 8,800만 파운드를 지출했습니다.
그당시 일본 정부의 보유한 금이 1,200만 파운드이고 연간세수가 1,900만 파운드였습니다.
19개월 전쟁기간 발행한 엔화 국채는 총 7,200만 파운드, 영국과 미국에 진 외화국채가 8,200만 파운드. 즉 전비의 83%가 국채로 충당되었습니다.
그동안 일본의 국방비가 GDP의 16.6%로 치솟고 정부 부채 비율도 무려 40-50% 포인트가 늘어 전후에 일본 정부는 8년치 정부 세입을 넘는 부채를 졌습니다.
이런 큰 재정적 압박을 받자 일본 정부는 이를 상환하기 위해 정부지출을 축소하는 긴축재정과 여러 영리사업에 나섰습니다.
1895년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은 대만섬 개척에 돈이 많이 드니 외국(프랑스)에 팔자는 주장도 나왔고 그 후에도 대만의 특산수출품인 장뇌 가격을 대폭 인상하는 등 식민지 경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각종 물자를 팔아넘기며 10~15년이 걸려서야 부채 비율을 겨우 회복했습니다.
재정적 손실
일본 정부 보유금 1,200만 파운드
연간세수 1,900만 파운드
19개월동안 엔화국채 발행 총 7,200만 파운드
영국과 미국에 외화국채 차입 8,200만 파운드
10~15년 걸려 부채 비율 회복
군사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은 결과적으로 일본군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약 25만명의 병력 손실이 이었습니다. 총 58,000~ 86,100명 이 사망하였고, 157,432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 육군과 해군의 군사사상은 유연성을 잃은 상태로 경직되었고 이 같은 상태가 40년 뒤인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두고두고 이어졌습니다.
우선 일본 육군은 위의 정신력 우월주의와 함께 봉천 전투, 203고지 전투 등을 겪으면서 반자이 어택 같은 보병의 총검 돌격을 통한 공세로만 일관된 전술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해군의 경우 쓰시마 해전의 승리와 같은 예외적인 사례를 통해서 함대결전사상과 점감요격작전에 뼛속까지 중독되어 버렸습니다.
군사적 손실
약 25만명 병력손실
군사사상의 경직
러일전쟁 이후의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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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에서의 대한제국을 잘 표현한 그림, 출처 : 나무위키
러일전쟁은 대한제국에게는 그야말로 국권 상실의 전조가 되어버린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던 친일과 친러간의 세력 균형마저 깨졌습니다.
당장 한국의 입장에서는 둘이 계속 대립하다가 그 과정에서 완충지대로서 주권국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종전 후 일본은 유일한 경쟁자가 사라졌고 열강은 운이든 뭐든 러시아를 쓰러뜨린것은 사실이니 자신들의 동남아 방면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를 일본 제국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합의했으며 동맹인 영국은 인도국왕을 인정받았고 미국은 필리핀 실질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한반도에 관심을 끓겠다는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어버립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DxZtx/btsMcJcPiwT/IzejNkgL2s0vrGsaB2tcrK/img.webp)
1894년부터 1905년 사이 동아시아의 외교 정세 현황, 출처 : 나무위키
대한제국 국권 상실의 전조
영국 인도왕국, 미국 필리핀, 일본 한반도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렇게 국제적으로 고립된 대한제국은 을사5적을 주도로 을사조약을 맺으면서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고 얼마 안 가 1910년에 일본에 강제병합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일본 제국은 사실상 러일전쟁의 유일한 전리품이었던 한반도를 있는대로 쥐어짜내 그간의 지출을 만회해야 했고 한반도를 병참기지화 하여 중일전쟁에 대비했습니다.
그 결과 식민지배 10년도 안 되어 전국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패전국 러시아보다 훨씬 더 불행해진 것은 대한제국인데, 만약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한반도는 세계 열강이 부딪히는 경계선으로 작동하여 동시기의 태국이나 에티오피아같이 중립국 위상을 유지했을 수 있거나 핀란드나 폴란드 같이 러시아에게 흡수병합되어 먹히지는 않더라도 러시아-투르크 전쟁 당시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이탈, 독립하여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편입됐던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발칸반도의 국가들처럼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되어 친러시아 성향의 국가가 되었을 확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국제사회는 한반도를 완전한 일본의 영향권이라고 판단했고, 결과적으로 한반도가 본격적인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간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이 전쟁으로 인하여 고종이 평양부를 제2의 수도로 육성하려던 계획이 무너졌습니다.
한일 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의 조약은 기본적으로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체결되었던 조약이었고, 경부선과 경의선의 건설도 매우 수탈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명백히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이었음에도 을사조약과 같은 반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제외하고는 러시아로부터 한국을 지켜주겠다는 일본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미 중립을 유지할 국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의 상황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때 친미파, 친러파였던 것으로 알려졌던 이완용은 이 때를 계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하여 을사조약의 주역이자 악역이 되어서 을사오적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친러파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배척하던 성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의 주도권이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고 여기에 미일 간의 카츠라-태프트 밀약까지 더해지자 앞으로 일본 편에 서는 게 자신에게 더 유리할 거란 판단이 섰던 것인지 이때를 기점으로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데에 앞장서고 5년 후에는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일본에게 넘겨버리는 주역이 됨으로써 평생 친일 매국노가 되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edcwUX/btsMcZ7x1sU/IGXiqWJYk9x3nTkeryX1iK/img.webp)
한일협약도(韓日脅約圖)'일본이 한황을 위협ᄒᆞ야 됴약을 륵뎡(함)', 실제로 이 장소에 고종이 있지는 않았다,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풍자화에 넣은 것, 출처 : 나무위키
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경술국치
1910년 8월 29일
이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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