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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아관파천

아관파천

아관 파천은 1896년(건양 원년) 2월 11일부터 다음 해 2월 20일까지 조선의 대군주 고종과 왕태자였던 순종이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과 친일 내각이 장악한 경복궁(건청궁)을 탈출해 어가를 아라사 공사관으로 옮겨 피신한 사건을 말합니다.

아관파천

조선 고종 황태자 순종

경복궁 탈출 아라사 공관으로 피신

1896년(건양 원년) 2월 11일

1897년(건양 2년) 2월 20일

이 사건으로 조선의 정세가 바뀌었습니다.

 

19세기 무렵의 러시아 공사관(좌측) 현존하는 러시아 공사관의 모습, 출처 : 나무위키

수틀리면 경복궁에 칼 들고 달려가던 일본이었지만, 러시아의 허가 없이는 건드릴 수 없는 러시아 외교 공관에 머무는 고종을 일본은 더 이상 압박할 수 없어 을미사변으로 구성된 일본의 영향력과 친일 내각이 붕괴되었고, 그 대신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친러 내각이 구성됐습니다.

고종이 사용했던 피신 경로, 출처 : 나무위키

아관 파천에 동원된 러시아 태평양 함대 방호 순양함 어드미럴 코르닐로프, 출처 : 나무위키

친일 내각 붕귀

-> 친러 내각 구성

이후 러일 전쟁의 패배로 러시아가 조선에서 손을 떼기까지, 일본은 함부로 조선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또한 원세개를 감국대신으로 임명해서 내정간섭을 일삼은 청나라와는 달리 러시아는 딱히 조선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고종은 자율적으로 대한제국을 건국하고 광무개혁을 주도하여 전기, 전차, 전화, 우편, 수도 등의 근대 문물을 들여오고 대한천일은행, 광혜원, 한성전기회사, 의정부 공부아문 철도국 등을 세웠으며 용산에 공장들을 세워 산업 지대로 육성했습니다.

고종

대한제국 건국

광무개혁 주도

대한천일은행 광혜원 한성전기회사

의정부 공부아문 철도국

용산 산업 지대 육성

행정 부문에서 일본 제국 헌법과 굉장히 유사한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고 야전과 지계를 비롯한 각종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한성 개조 사업을 추진해 한성을 깨끗한 근대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고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면서 개혁은 중단되었습니다.

러일 전쟁 러시아 패배

-> 일제 고종 강제 퇴위

-> 개혁 중단

 

'아(俄)'는 당시 러시아의 중국식 표현인 '아라사(俄羅斯)'의 머리글자이고, '관(館)'은 '공사관(公使館)'의 관을 뜻합니다.

'파천(播遷)'이라는 단어는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이르던 말입니다.

즉, 아관 파천(俄館播遷)이란 임금이 아라사 공사관으로 피신했다는 뜻입니다.

일본식 음차인 '노서아(露西亞)'의 앞머리를 따서 노관 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아관 파천(俄館播遷)'이란 용어는 국왕에 대한 일본의 노골적인 폄하의 뜻이 담겼고 '아관 망명(俄館亡命)'이 올바른 용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당시 외국에선 대부분 '망명(asylum)'이라고 표현했고, 고종실록에는 '이어(移御)'나 '이필주어(移蹕駐御)' '이차(移次)'라고 기록했습니다.

실제로 고종은 한양 도성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파천이 아니고 외국 대사관 또는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사례를 망명이라 하기 때문에 뜻으로도 정확합니다.

일본 공사관과 일본인이 설립한 한성신보, 그리고 친일파들만이 '파천'이라고 불렀습니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황태연 동국대 교수,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회장/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아관 망명이 올바른 용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관파천

or 아관망명

아관파천의 배경과 진행과정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일본과 친일 세력으로부터 경복궁에 감금당한 고종은 명성황후처럼 자신도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경복궁을 수시로 탈출하려 했습니다.

을미사변 : 네이버 블로그

고종의 경복궁 탈출 첫 시도는 1895년(고종 32년) 11월 28일에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진호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춘생문 사건입니다.

이때는 이범진, 이재순 등의 친미파 고관들과 미국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서 피신할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영국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러시아 대사인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도 도움을 주는 등 그야말로 다국적적인 시도였으나 친위대장인 이진호가 배신하며 실패했습니다.

춘생문 사건

미국 공사관 피신 계획

친위대장 이진호 배신

실패

두 번째 시도가 바로 이 아관 파천입니다.

1896년(건양 원년) 2월 2일, 니콜라이 2세가 조선 왕실 보호를 위한 러시아 해군 파견을 승인하자 인천항에 입항한 어드미럴 코르닐로프호에서 2월 10일, 중무장한 러시아 수병들이 상륙해 공사관의 경비를 강화]하고 2월 11일, 궁 관계자와 보부상, 러시아 해군의 호위하에 고종과 순종이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였습니다.

이때 훗날 순헌황귀비가 되는 엄 상궁이 계책을 내어 탈출하기 며칠 전부터 궁녀 1명과 함께 2채의 가마를 타고 궁궐을 출입하여 일본군과 경비대의 경계를 늦췄고 당일 고종과 황태자가 이 가마를 타서 검문을 피하며 빠져나갔습니다.

이는 또한 각지에서 봉기한 을미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김홍집 내각의 조선군은 물론 일본군까지 지방으로 내려가 수도가 빈 상태에서 이범진과 이완용 등의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였습니다.

아관 파천

1896년 건양 원년 2월 11일

고종과 순종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이어

김홍집 내각 을미의병 진압위해 일본군 지방이동

이범진 이완용 등 친러파의 치밀한 준비

성공

고종은 옮긴 당일에 내각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외부대신 김윤식, 내부대신 유길준, 탁지부대신 어윤중, 군부대신 조희연, 법무대신 장박, 정병하, 김종한, 허진, 이범래, 이진호를 면직하고, 유길준 등을 체포하도록 명습니했다.

이때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가 순검 혹은 군중에게 살해되고 유길준과 조희연, 우범선 등은 망명하였습니다.

 

고종 친일 내각 붕괴 명령

총리대신 김홍집, 외부대신 어윤증, 내부대신 유길준, 탁지부대신 어윤중, 군부대신 조희연, 법무대신 장박, 정병하, 김종한, 허진, 이범래, 이진호 면직 및 체포 명령

김혼집, 어윤중, 정병하 순검 및 군중에 살해

유길준, 조희연, 우범선 망명

일제를 증오하던 고종은 친일 요소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을미개혁을 무효화하고 친일 내각을 붕괴시키며 친러 내각을 수립하였습니다.

이 내각에는 총리대신 김병시를 비롯해 심순택, 윤용선, 조병직 등 보수파 대신들이 대거 기용되는 가운데 이재순 등 황족들과 박정양, 이완용, 이윤용 등 친일파가 아닌 개화파 인사들도 참여했습니다.

천러 내각 수립

총리대신 김병시, 심순택, 윤용선, 조병직 등 보수파 대신 대거 기용

이재순 등 황족 참여

박정양, 이완용, 이윤용 등 개화파 참여

고종은 왕태후 홍씨와 순명효황후를 경운궁으로 이어시키고 경운궁의 수리 및 중창을 명하는데 이는 고종이 아관 파천 당시에 이미 후일의 계획을 세워놨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 사건 이후 신임 조선 공사 고무라 주타로 차관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찾아가서 사태의 원만한 수습과 환궁을 요구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되었습니다.

이는 러일 전쟁이 벌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일본, 러시아에 수습과 환궁 요구 실패

조선에서 일본 영향력 감소

러일 전쟁의 원인 중 하나

고종은 1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기간 동안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만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고종은 경운궁에 나아가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경복궁을 방문하며 백성들을 안심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896년 5월 16일에는 경운궁에서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를 접견했으며 7월 16일에는 일본 특명 전권 공사 하라 다카시를 접견하였습니다.

덕수궁사에 의하면 고종은 경운궁 대유재에서 주로 외국 공사를 접견하였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에 민영환을 특사로 파견하였습니다.

민영환은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고 재무상 세르게이 비테, 외무상 로바노프 로스토프스키 등 러시아 각료들과 회담을 가졌으며, 고종의 친서를 직접 전달했습니다.

이후 러시아를 비롯해 일본, 미국과 영국 등 해외를 7개월 동안 일주하면서 조선의 근대 국가 모델을 구상하였고, 귀국 후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러시아 군사 교관에 의한 군사 양성을 주관하였습니다.

또 훗날 대한제국군이 되는 장병 900여 명을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시키고 러시아 교관들에게 3개월간 훈련시킴으로써 고종이 환궁할 경우 궁궐을 경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조선의 요청으로 재정, 군사 고문단 파견과 한-러 은행 개설 등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갔습니다.

또한 경원군과 경성군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貯炭所) 설치권 등의 이권을 따냈습니다.

사실 러시아의 요구는 독립협회에서 과장해서 반대해서 그렇지, 일본을 견제한다는 목적 하나만으로도 의미는 있었습니다.

문제는 다른 국가들과 체결해 놓은 최혜국 대우 조항 때문에 러시아에 하나 내주면 다른 곳에도 자동으로 하나씩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고종과 조선의 작전으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열강들에게 일부러 골고루 이권을 나누어 줌으로써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려 할 때 반발할 방패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조선에서의 러시아 영향력 확대

니콜라이 2세 즉위식 민영환 특사 파견

장병 900명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

러시아 교관들로 하여금 교육받도록

러시아 군사 고문단 파견 한-러 은행 개설

러시아에 채굴권, 채벌권, 저탄소 설치권 제공

러시아가 조선에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보내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나 극동 지방의 군사력이 미약한 상태였고, 일본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로바노프와 야마가타는 1896년 5월 28일부터 6월 9일에 걸쳐 비밀 회담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서로가 조선의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각자가 군사적으로 준비되기까지 조선을 완충 지대로 남겨둘 것을 골자로 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협정을 맺습니다.

로바노트 야마가타 협정 체결

조선을 완충 지대로 남겨줄 것을 골자로 함

1896년 5우러 28일 ~6월 9일 비밀회담

여기에 최익현의 상소와 독립협회 등이 중심이 된 환궁 청원으로 있고, 고종과 궁궐을 방어할 호위군이 갖춰지자 1897년(건양 2년) 2월 18일, 고종은 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고 이틀 뒤인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환궁했습니다.

아관파천의 결과와 평가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하고 있는 1년간 모든 정치는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으며, 당시 탁지부 고문 알렉세예프(Alexeev)는 사실상 재무장관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 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위시한 열강의 손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열강에 수많은 이권 상실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후에 왕은 비로소 군주권을 회복합니다.

이전까진 일본이 일본식 제대로 내각이라는 것을 만들어 친일적 인사를 총리대신이 되도록 하여 그가 일본공사관의 지시를 받아 국사를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왕은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빼앗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왕정을 원상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한 등급 승격시켜 제국으로서 재출발하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근대화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습니다.

군주권 회복

대한제국 건국 개혁 추진

러일전쟁 종료 후 고종 퇴위시 까지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일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의 의도를 봐야 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자주적이지 못한 외세 지향의 행동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룹니다.

 

일본 세력으로 벗어나려 했던 노력

자주적이지 못한 외세 지향 행동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