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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T4작전 - 나치 독일의 우생학에 기반한 장애인 안락사 정책

Reichsleiter Bouhler und Dr. med. Brandt

sind unter Verantwortung beauftragt, die Befugnisse namentlich zu bestimmender Ärzte so zu erweitern, dass nach menschlichem Ermessen unheilbar Kranken bei kritischster Beurteilung ihres Krankheitszustandes der Gnadentod gewährt werden kann.

A hitler

국가지도자 필리프 보울러와 의사 브란트에게

치료에 가망이 없을 만큼 병세가 무겁다고 판단되는 경우, 그 환자에게 병세에 관해 엄격한 감정을 실시한 뒤에 특별히 지명한 의사에게 자비로운 죽음의 처치를 허가할 권한을 부여한다

A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가 서명한 장애인 학살 승인 서류

T4 작전(독일어: Aktion T4, 영어: Action T4, Euthanasia Program)

나치 독일의 우생학 사상에 따라 행한 장애인 안락사 정책입니다. 1939년 9월 1일 부터 개시되어 1941년 중지되었지만 안락사 정책 자체는 계속되었습니다.

T4는 본부의 소재지인 베를린의 티어가르텐 4번지 에서 유래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붙여진 조직의 명칭입니다.

이 작전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약 20만 명,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10만 며의 장애인이 학살당했습니다.

1941년 8월 18일, 나치 독일은 공식적으로 계획을 중지한다고 발표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비밀리에 장애인 학살이 이뤄졌습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T4프로그램 희생자수

 
T4센터
기간
총 희생자 수
그라페네크
1940년 1월 ~ 1940년 12월
9,839
브란덴부르크
1940년 2월 ~ 1940년 10월
9,772
베른부르크
1940년 11월 ~ 1943년 7월
8,601
하르트하임
1940년 5월 ~ 1944년 12월
18,269
조넨슈타인
1940년 6월 ~ 1942년 9월
13,720
하다마르
1941년 1월 ~ 1942년 7월
10,072

출처: Document 87, P. 232 cit. in Ernst Klee. Dokumente zur "Euthanasie", 1985.

T4 작전의 배경

 

독일인들의 육체적 장애를 포함한 "인종적으로 건강치 못한" 요소를 없애고자 했던 우생학적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미 우생학 사상은 넓게 인지되고 있었으며, 1910년대부터 열등분자의 단종이나 치유불능의 병자를 요청에 의하여 죽이는 "안락사"의 개념이 생겼습니다.

1920년대 법학박사로 전 라이프치히 대학교 학장 카를 빈딩과 프라이부르트 대학교 교수로 정신과 의사인 알프레트 호헤에 의해 중도 정신장애인 등의 안락사를 제창한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을 끝내는 행위의 해금"이 출판되었습니다.

1930년대 나치당은 "안락사"를 선호하는 선전 캠페인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민족사회주의 인종정치사무소(NSRPA)가 독일인들에게 불치병과 정신장애인들을 위한 보호시설을 유지하는 비용을 다루는 리플릿과 포스터, 극장에서 상영되는 단편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저항하리라 예상된 카톨릭 단체들을 점차 폐쇄하였으며, 요양 중이던 정신장애인들은 북적대는 국립기관으로 이송하였습니다.

북적대는 국립기관의 더러운 환경은 이후 안락사 선호 캠페인을 지지하는 여론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1930년대 들어 우생학에 근거한 단종이 농의되면서 1932년 7월 30일에는 프로이센 주에서 "열등분자"의 단종에 관한 법률이 제출되었습니다. 부적격자를 자율적으로 거세하도록 하였습니다.

"민족의 피를 순수하게 유지한다"는 나치즘 사상에 따라 유전증이나 정신증 환자 등 "민족의 피를 열등화 시키는 열등분자"를 배제하자는 프로파간다가 개시되었습니다.

이 프로파간다에서는 유전병 환자 등에게 나가는 국고, 지방자치단체의 부담이 강조되면서 이것을 통해 나치정권은 "단종"이나 "안락사"의 정당성을 강조하였습니다.

1933년 7월 14일에는 "유전증근절법 : 유전적 질환의 자손 예방법"이 제정되어 단종이 법제화되었습니다. 유전적 질환을 가진 45세 미만의 여성은 의사들의 판결에 의해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게 되었으며, 의사들의 판결에 불순응할 시 벌금형이 내려졌습니다.

법률 시행 첫 해에 약 4,000명의 사람이 불임화 인가 판결에 대해 항소하였고, 그 중 3,559명이 패소하였습니다. 나치 정권 말까지 200여 개의 유전 건강법원이 만들어 졌으며, 이 법원에서의 판결에 의해 40만 명 이상이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게되었습니다.

1938년부터 1939년데 걸쳐 신체장애와 지적장애를 가진 크나우어라는 소년의 부친이 소년의 "자비살"을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이를 심의한 나치당 지도자관방장 필리프 보울러와 친위대 군의관 카를 브란트는 그 후 안락사 정책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호소는 나중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안락사 정책의 정당화를 호소하는 프로파간다 영화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1938년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발언, "우리의 시발점은 개인에 기반하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는 것은 우리의 관심 밖이다. 우리의 목적은 그와는 색다른 것이다. 그것은 즉, 건강한 인간들로만 세계를 채운다는 것이다."

T4 작전의 시작과 영향

1939년 9월 히틀러가 극비 지령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T4작전이 시작됩니다. T4 작전은 장애인과 정신질환자 등의 부적격자에 대한 집단 살인허가 명령이었습니다.

나치 정권은 이러한 부적격자를 사회에서 제거함으로써 게르만 민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지킬수 있다는 인종위생학을 나치즘의 뼈대로 삼았으며, 이러한 사람들을 쓸모도 없이 음식만 먹는 것들, 열등인간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죽이는 것을 자비로운 안락사로 간주하였습니다.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위 명령서처럼 히틀러의 주치의 중 하나이자 위생학자인 카를 브란트 였습니다. 브란트는 효율적인 안락사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인간을 대상으로 가스와 약물을 재료로 잔인한 생체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맹겔레를 방불케하는 잔인한 실험들은 향후 독일 자국민에 대한 나치의 전쟁범죄로 분류되었습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습니다.

나치 행정부 내에서 강력한 인물이었던 요제프 괴벨스가 오른쪽 다리에 장애가 있어서 육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계획에 포함 시키는 것은 조금 늦어졌지만 결국 포함되었습니다.

1940년부터 개신교 목회자들이 T4에 대해 항의하였고, 지속적으로 프리드리히 폰, 빌레벨트, 폴 게르하르트 등의 루터회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항의를 시작했으며, 주교 프란츠 본바워를 기점으로 8월 시위가 발생하였습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규모 전상자가 발생했고, 장애를 입은 참전용사에게도 이러한 T4프로그램이 일부 시행되었습니다. 중중 부상으로 인한 장애인들에게

군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하며, 종교계와 시민들이 저항하게 됩니다. 종교계에서는 T4 입안 당시부터 격력하게 항의하였고 결국, 1941년 히틀러는 T4 프로그램의 중지를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중지되었으나, 가장 마지막 아이가 희생된 것은 독일이 항복하고도 3주가 지난 1945년 5월 29일 이었습니다.

안락사 프로그램 이후 체계적으로 자행된 유럽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로 진화하게 됩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작전(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이 실행됨과 동시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인력들(의료인력, 관리, 경비원 등)은 절멸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홀로코스트를 본격적으로 실행하게 되었습니다.

나치당의 모순적인 모습

아돌프 히틀러는 잠복고환을 가진 장애인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난 곳은 히틀러가 하등인간이라고 주장하던 체코 슬라브족과 통혼이 매우 흔한 곳이었습니다.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도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단한 장애이었습니다. 괴벨스는 아이만 7명이나 낳았습니다.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 독일의 2인자로 동양인에 가까운 외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폴란드 혈통과 리투아니아 혈통이며, 유대인 혈통이 상당히 섞여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나치당을 상당히 미화하였으나, 유대인 혈통이었습니다.

독일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유럽의 중심으로 유럽에서 가장 혈통적으로 복잡한 나라입니다. 이러한 나라에서 우생학을 기반으로 순수한 아리아인을 찾고자 하였으니 모순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치당은 이에 대응하여 족보를 위조하였는데 조사관에게 거짓 증언을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