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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관동대지진

관동대지진, 간토대지진(일본어: 関東大地震 간토다이지신)

1923년 9월 1일(다이쇼 12년) 11시 58분(일본 표준시)에 일본 도쿄도 등을 포함한 미나미칸토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해구형 지진입니다. 일본 제국 시가미 만을 진앙지로 발생한 사기미 해곡 대지진입니다.

지진의 진동은 본진이 시작될 때부터 완전히 멈출 때까지 5분에서 최대 10분까지 오래 지속된 지진입니다. 5분 간격으로 세 차례 일어난 해구형 지진입니다.

최초 11시 58분 M8.1 오다와라와 미우라 반도 진원

두번째 12시 1분 M7.2 도쿄만

세번째 12시 3분 M7.3 야마나시현에서 발생하였고, 모두 5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이 지진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 및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간토 대학살 등을 통틀어 간토 대진재(일본어: 関東大震災 かんとうだいしんさい)라고 부릅니다.

1703년(겐로쿠 16년)에 일어난 지진도 간토 대지진과 거의 비슷한 구조로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 지진을 다이쇼 간토 지진으로 부르고 1703년 간토 지진을 겐로쿠 간토 지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두 지진은 사가미 해곡의 판 경계를 따라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두 지진을 한데 묶어 사가미 해곡 거대지진으로 부르며 간단하게 사가미 해곡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총칭하여 간토지진으로 묶어 부르기도 합니다.

다이쇼 12년 관동 대지진, 출처 : 나무위키

관동대지진, 간토대지진의 전개과정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기 전인 1905년, 도쿄제국대학 교수 오모리 후사키치와 이마무라 아키쓰네 사이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마무라 교수는 잡지 태양에 도쿄 남쪽의 사가미만에서 50년 안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사설을 통해 도쿄 전역은 대지진과 그로 인한 화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장의 근거는 부족하였고, 잡지 기고가 선정적으로 보도되어 다른 학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번 지진 예측에 성공한 세계적인 지진학자였던 오모리 교수는 이마무라 교수를 강도높게 비난했습니다. 오모리 교수는 정기적인 소규모의 지진 발생은 단층의 지진응력을 해소하여 지진의 위험성을 줄인다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간토 대지진 직전의 주기적인 지진으로 도쿄 지역의 대지진의 위험성이 해소되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의해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여 오모리 교수의 가설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1915년 11월 도쿄에서 유감지진이 과거 최다인 18회 이상 발생하였습니다. 이 지진이 진정되며 오모리-이마무라 간토 대지진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21년 규모 M7.0의 이바라키 남부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1922년 규모 M6.8의 우라가 수도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사상자 25명 발생

1923년 5~6월 이바라키현 동부에서 2~300회가 넘는 군발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유감지진이 미토 73회, 조시 64회, 도쿄 17회가 일어났습니다.

관동대지진, 간토대지진 본진의 발생과 여진

 

1923년(다이쇼 12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32초 간토 지방 남부를 진원으로 본진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지진학자인 이시모토 미시오는 도쿄 혼도구의 가속도가 대략 300gal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본진의 흔들림은 진원에서 약 9,000km 떨어진 오스트리아 기상청에도 관측이 되었으며, 오스트리아 기상청 측에서 재빨리 간토 대지진의 발생을 알렸습니다.

1923년 9월 1일

12시 0분 규모 불명 지진 - 누마즈 측후소에서 최대진도 5를 기록하였다.

12시 1분 M7.2 도쿄만 북부 지진 - 도쿄 23구 및 가나가와현 동부의 요코하마-가와사키 지역에서 매우 강한 흔들림을 느꼈다.

12시 3분 M7.3 가나가와현-야마나시현-시즈오카현 경계 지역 지진 - 가나가와현 서부, 시즈오카현 동부, 야마나시현에서 매우 강한 흔들림을 느꼈다.

12시 7분 M6.0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3

12시 11분 규모 불명 지진 - 사이타마현 북부 구마가야시에서 최대 진도 4를 기록하였다.

12시 11분 M5.6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5

12시 17분 M6.4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5

12시 23분 M6.5 사가미만 지진, 최대진도 5

12시 36분 M6.0 이바라키현 남부 지진, 최대진도 3

12시 40분 M6.5 사가미만 지진, 최대진도 3

12시 47분 M6.8 야마나시현 중서부 지진, 최대진도 5

13시 13분 M6.2 지바현 동남쪽 해역 지진, 최대진도 3

13시 20분 M6.2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5

13시 31분 M6.1 시즈오카현 동부 지진, 최대진도 5

14시 22분 M6.6 시즈오카현 이즈 지방 지진, 최대진도 5

15시 19분 M6.3 이바라키현 해역 지진, 최대진도 3

16시 37분 M6.6 시즈오카현 동부 지진, 최대진도 5

17시 0분 M4.3 가나가와현 서부 지진, 최대진도 5

22시 52분 M6.1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4

1923년 9월 2일

3시 4분 규모 불명 지진 -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 최대진도 5를 기록하였다.

4시 13분 M4.6 야마나시현 동부 후지 5호 지진, 최대진도 5

11시 46분 M7.3 지바현 동남쪽 해역 지진, 최대진도 5

18시 26분 M6.9 지바현 동쪽 해역 지진, 최대진도 5

18시 48분 M6.3 지바현 동쪽 해역 지진, 최대진도 4

22시 9분 M6.5 시즈오카현 이즈 지방 지진, 최대진도 5

23시 16분 M6.2 가나가와현 서부 지진, 최대진도 4

9월 8일 2시 32분 M6.1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2

9월 14일 15시 32분 M5.2 이바라키현 남부 지진, 최대진도 5

1923년 9월 26일

17시 23분 M6.8 이즈오섬 근해 지진, 최대진도 4

17시 26분 규모 불명 지진 - 누마즈 측후소에서 최대진도 4를 기록하였다.

1923년 10월 4일

0시 54분 M6.3 시즈오카현 동부 지진, 최대진도 4

14시 5분 규모 불명 지진 - 사이타마현 구마가야시에서 최대진도 4를 기록하였다.

10월 5일 22시 5분 M6.2 야마나시현 동부 후지 5호 지진, 최대진도 3

10월 17일 3시 3분 M5.7 야마나시현 동부 후지 5호 지진, 최대진도 4

11월 5일 5시 45분 M6.3 도쿄 다마 지역 동부 지진, 최대진도 4

1924년 1월 5일 M7.3 단자와 지진 - 19명 사망, 638명 부상

관동대지진, 간토대지진 피해

 

간토 대지진으로 가나가와현 및 도쿄부를 중심으로 인접한 이바라키현과 지바현, 시즈오카현 동부 등 간토 지방 내륙 및 연안 넓은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2004년 9월 일본의 건설회사인 가지마 고보리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진으로 인한 총 사망자를 105,385명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지진 발생당시 점심 시간즈음이었기 때문에 불 사용이 잦았으므로 화재 발생하였고, 화재는 화염폭풍으로 발전하여 도시를 파괴하였습니다.

화재로 인한 단일 최대 인명피해는 도쿄 시내에 있는 리쿠군 혼조 히후쿠쇼(구 일본 육군의류창고)를 화염폭풍이 휩쓸며 일어났는데 지진 후 도쿄 시내에서 약 38,000명이 화재로 사망하였습니다.

쓰나마 피해도 컸는데 최대 10m 높이의 쓰나미가 사가미만, 보소반도, 이즈 제도, 이즈반도 동부 해안을 덮쳐 총 57만 가구의 주택이 유실되고 190만 가구가 집을 잃었습니다.

피해액은 대략 10억 달러(현재의 1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간토대학살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흉흉해진 민심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써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의 특징 때문에 일본인들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습니다.

1923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한다는 전면 기사, 매일신보는 조선총동부의 관제언론 출처 : 나무위키

이에 곳곳에서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시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 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쥬고엔 고주센)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쥬고엔 고쥬센'을 일본어가 어눌한 발음의 '츄고엔 고쥬센'으로 발음하는 것것이었습니다. 이 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학살은 마구잡이식이었습니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어 학살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경찰은 학살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흔하였고 오히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 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 사건도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육군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에 의해 사회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와 가족이 살해당한 아마카스 사건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치안 당국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하에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하였고, 일부는 가담, 조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 그제서야 개입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습니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습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강과 아라카와강은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합니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습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습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는 그의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 피해자가 6,066명이라고 적었지만, 그에 비해 당시 일본정부의 추산은 233명이었습니다.

관동대지진의 영향

일본 제국의 폭주가 시작된 대재해로 평가됩니다. 관동대지진으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고, 이후 1927년 쇼와금융공황과 30년의 쇼와공황, 그리고 대공황을 맞아 경제가 수직 낙하하였습니다.

불만이 쌓여 있던 군부는 폭주하기 시작하여 1932년 5.15사건과 1936년 2.26사건 등을 일으키고, 군부의 주도하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