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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뮌휀 올림픽 참사

뮌휀 올림픽 참사

뮌휀 올림픽 참사 혹은 뮌휀 학살 사건은 1972년 9월 5일 독일 뮌휀에서 개최된 1972년 하계올림픽 기간에 일어난 테러사건으로 일명 검은 9월 사건으로 불립니다.

팔레스타인의 테러 집단인 검은 9월단은 11명의 이스라엘 올림픽 팀(선수 5명, 심판 2명, 코칭스태프 4명)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시도했으나 독일 경찰의 테러 진압 미흡으로 인해 대표팀 전원이 살해된 사건입니다.

뮌휀 올림픽 참사 혹은 뮌휀 학살 사건, 영어 Munich massacre, 독일어Das Münchener Olympia-Attentat, Geiselnahme von München,

히브리어 טבח הספורטאים באולימפיאדת מינכן, 아랍어 1972 عملية ميونخ

뮌휀 올림픽 참사의 발생 과정

 

검은 9월단은 1970년 검은 9월 사건을 계기로 설립되었습니다. 요르단에서 후세인 1세의 군대에 의해 팔레스타인인 수천명이 학살된 이 사건에 보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테러 단체는 철저한 보안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검은 9월단은 뮌휀 올림픽 참사에서 3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하였습니다. 첫째, 세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둘째,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된 200여 명 가량의 팔레스타인 전사들을 석방시키는 것, 셋째, 투쟁을 보여주기 위해 집중된 언론을 이용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서독은 뮌휀 올림픽을 통해 나치즘의 과거에서 벗어나 밝고 진보적인 사회를 보여주고자 계획하였고, 세계 평화를 올림픽의 주제로 내세우고자 의도적으로 행사의 보안을 최소화하였고, 선수촌이나 경기장 어디에도 무장경찰이나 보안요원을 배치하지 않았습니다.

테러 13일전 검은9월단의 남녀가 부부로 위장해 베이루트에서 독일 쾰른-본 국제공항으로 4개의 큰 가방을 짊어진 채 세관을 통과해 뮌휀 중앙역에 있는 보관함에 화물을 집어넣었습니다. 가방 속에는 AK-47 8자루와 총알이 가득 채워진 탄창 12개, 그리고 수류탄 10발이 존재했습니다.

검은9월단은 8월 31일까지 리바아 트리폴리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모두 서독 뮌휀에 도착하였습니다. 테러 하루전까지 평범한 관광객처럼 행동하였습니다.

1972년 9월 5일 이른 아침 2m의 철망을 넘어 올림픽 대회장내 선수촌의 이스라엘 선수 숙소에 무장한 검은 9월단 멤버 8명이 난입했고 범행 그룹은 이스라엘 레슬링 코치인 모세 웨인베르그와 역도 선수인 요세프 로마노를 살해하고 남은 9명을 인질로 붙잡으면서 올림픽 경기는 중단되었습니다.

검은 9월단은 성명을 발표하고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양심수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는데 이에 대해 당시 이스라엘 수상인 골다 메이어는 이 요구를 거절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군대를 통한 사태 해결을 위해 서독에게 양해를 구했으나 서둑의 법률은 외국군의 국내 활동을 제한했기 때문에 서독측은 자신들이 대응할 것이라며 거부하였습니다.

서독 당국과 범행 단체는 교섭을 시작해 비행기로 이집트 수도 카이로로 탈출하는 것에 합의하였습니다. 선수촌에서 비행기가 준비된 뮌휀 국제공항까지 2대의 헬리콥터로 이동하고 그 후 준비된 비행기에 탑승하여 국외로 탈출하는 것으로 타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서독당국의 계획은 공군기지로 이동한 상태에서 경찰특공대와 저격수들이 범행 단체를 사살하고 인질을 구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헬리콥터가 퓌어슈텐펠트부르크 공군 기지에 착륙했고 범행 단체 중 2명이 준비된 비행기를 확인하고 비행기에서 물러날 때쯤 저격수가 발포했지만 총탄은 범행단체 전원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응전을 시작하면서 총격적이 벌어지게 됩니다.

범인들은 헬리콥터 1대를 수류탄으로 파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총격적은 장시간에 걸쳐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인질 9명 전원 및 경찰관 1명이 사망하는 등 사건은 최악의 결과로 종결되었습니다.

범인측은 8명 중 5명이 사살당하고 남은 3명은 도주를 기도하다 체포되었으나 이 3명은 1972년 10월 29일 루프트한자 615편 납치 사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원인

 

1. 보안이 미흡했던 뮌휀 올림픽

서독은 뮌휀 올림픽을 통해 나치즘의 과거에서 벗어나 밝고 진보적인 사회를 보여주고자 계획하였고, 세계 평화를 올림픽의 주제로 내세우고자 의도적으로 행사의 보안을 최소화하였고, 선수촌이나 경기장 어디에도 무장경찰이나 보안요원을 배치하지 않았습니다.

2. 정보의 부족과 정보 전달의 오류

저격수의 저격 실패로 인해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태의 중요한 원인은 정보 부족으로 초기 독일 측은 범인들의 숫자를 5명으로 파악하였으나, 실제로는 8명이었습니다. 나중에야 8명이라는 것을 파악하였으나 이 사실은 공군기지의 저격팀에게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3. 진압 경찰의 능력 부족

당시 독일 경찰에는 대테러 부대가 없었기 때문에 진압 작전에 특별히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경찰이 투입되었습니다.

4. 생중계를 통해 테러 집단에도 정보 제공

당시 진압 시도는 언론에 의해 생중계 되었고, 검은 9월단은 TV로 이를 파악하고 있었고, 진압 작전이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아챈 독일 경찰은 작전을 취소하였습니다.

5. 서독의 헌법상의 제약

이스라엘의 보복작전

신의 분노, 청춘의 샘

이스라엘 정부는 공군에게 팔레스타인 게릴라 기지를 포격하였고, 이로 인해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살해되었습니다.

또한, 테러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검은 9월단 멤버의 암살을 계획하게 됩니다. 뮌휀 참사에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연관된 자들의 정보를 수집하였고, 이를 기초로 암살대상을 결정하였습니다. 모사드 내부의 바요넷이라 불리는 부대에게 암살 실행을 지시합니다.

최초로 암살된 사람은 아라파트 의장의 조카이며 번역가인 '와사르 즈와이델'로서 로마의 자택 아파트안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이후 모사드 공작원들은 암살대상 차례로 제거하였으나, 검은 9월단도 반격을 시작하여 모사드 공작원, 정보 제공자 등을 살해하였습니다.

1973년 4월 9일 베이루트에 있던 PLO와 검은 9월단 간부가 묵고 있던 아파트를 기습하여 '카마르 나사라', '유세프 나지르', '카마르 아드완' 등 3명의 간부를 살해하였습니다.

 

뮌휀 올림픽 참사의 영향

뮌휀 올림픽 참사는 현대적 테러리즘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사건입니다. 참사 이후 독일 최초의 대테러 부대인 GSG-9를 비롯한 대테러 부대들이 세계 각국에서 창설되었고, 최초의 경찰부대용 전문 저격총이라고 할 수 있는 H&K PSG1과 WA2000 등이 개발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4년 서독 월드컵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안전 경비 비용이 상당히 증가하였고, 특히 몬트리올이 진 빚은 30년이 지나서야 겨우 해소했을 정도로 심각하였습니다.

2022년 독일이 배상액으로 2,800만 유로(약 375억원)을 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당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과 희생자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뮌휀 올림픽 테러 50주년 추모식에서 "독일을 대표해 뮌휀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들에 대한 보호와 이후 진상 규명이 부족했던 데 대해 용서를 구한다"로 말하였습니다.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