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드 마젤란과 세계 최초의 세계일주 탐험
페르디난드 마젤란(영어: Ferdinand Magellan 퍼디낸드 머젤런, 포르투갈어: Fernão de Magalhães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 스페인어: Fernando 또는 Hernando de Magallanes 페르난도/에르난도 데 마가야네스,1480년 봄 ~ 1521년 4월 27일)
포르투칼 태생으로 태어났으나 스페인으로 귀화하였습니다. 당시 유럽은 1492년 신대륙이 발견되고, 1498년에 새로운 동방무역항로가 포르투칼에 의해 개척되면서 대항해시대가 열렸습니다.
서회항로 개척을 위한 세계일주 탐험이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지원하에 추진되었습니다. 1519년 9월 20일 5척이 스페인을 출발하였고, 침몰과 무단이탈로 3척을 이끌고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후 태평양을 횡단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빅토리아호 1척만이 1522년 9월 6일 스페인 산루카 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출발할 때 승선인원은 270명 이었으나, 18명만이 생존하여 귀국하였습니다.
마젤란은 1521년 4월 필리핀 막탐섬에서 사망하여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마젤란의 일생과 스페인의 서회항로 개척 과정
페르디난드 마젤란, 출처 : 나무위키
1480년 포르투칼 왕국 사브로자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12살때 포르투칼 왕궁에 들어가 시종생활을 하였습니다.
1505년 3월 25일 포르투칼령 인도 총독으로 임명된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가 1,500명의 병력과 22대의 함선을 이끌고 인도에 가기위해 리스본을 출발했는데, 이때 25살의 마젤란도 평범한 사병의 자격으로 합류하여 배에 승선하였습니다.
1505년 11월 인도에 도착한 후 알메이다가 이끄는 포르투칼 해군의 일원으로 인도양에서 복무하였습니다.
1513년 모로코 파병중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하였습니다.
1514년 11월 포르투칼로 귀환한 이후 아시아에서 구상한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질러 아시아로 가는 모험 항해를 후원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국왕인 마누엘 1세를 들이받는 기행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1517년 10월, 스페인 세비야로 건너가 서회항로 탐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시작하였습니다.
1518년 3월 22일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1세(황제 카를 5세)의 허락을 얻은 후 왕실과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계약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항해 자금 전액 지원, 발견한 영토에 대한 총독 직위 약속, 항해 수익의 20% 분배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좋은 조건을 얻을 수 있는 배경으로는, 당시 포르투칼은 이미 동방 항로를 통해 전 인도양에 걸친 무역망을 건설 중이었고,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거두고 있는 수익은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이에 스페인은 새로운 수익원이 필요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마젤란의 지리정보와 제안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포르투칼 정부는 전방위적인 방해 공작을 펼치며 마젤란에게 포르투칼 귀환과 원정포기를 강요하였으나 마젤란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1519년 8월 10일 약 1년 5개월 간의 탐험준비 작업은 거친 후, 5척의 배와 270명로 구성된 탐험대를 이끌고 스페인의 세비야를 출발하여 산루카 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1519년 9월 20일 최종점검을 마친 서회항로 개척팀은 산루카 항을 출발하여 대서양으로 향했습니다. 목표는 남미대륙의 남단에서 통로를 개천한 후 동남아시아에 있는 몰루카 제도로 가서 향신료를 싣고 희망봉을 돌아 귀국하는 것이었습니다.
1519년 년말 남아메리카의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였으며, 1520년 1월에는 리플라타강 하류에 이르러 겨울을 보냈습니다.
1520년 3월 31일 남미 산홀리아 항에 입항하였습니다.
1520년 4월 2일 스페인 출신 선장들(카르타헤나, 멘도사, 케사다, 엘카노, 코카)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튿날 마젤란의 기습공격을 통해 빅토리아호의 선장 멘도사를 제거한 후 모든 반란을 제압하는데 성공합니다.
반란의 주동자들은 해상법과 전쟁법규에 따라 재판을 거친 후 단호하게 처벌하였습니다. 케사다에게는 사형이 즉시 집행되었고, 카르타헤나와 카톨릭 신부는 유배형을 선고하여 산홀리안 해변가에 내려놓았습니다. 엘카노는 용서하였고, 가담한 선원들도 일손 부족으로 용서하였습니다.
1520년 5월 22일에 산티아고호가 항로탐사를 하던 중 난파되어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1520년 8월 24일 나머지 4척의 배가 산홀리항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1520년 10월 21일에 (마젤란) 해협 입구에 도달하였습니다. 먼저 탐사팀을 보내 항해로를 찾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1520년 11월 8일 탐사를 보낸 산안토니오 호가 선단을 이탈하여 도망쳐, 스페인으로 돌아갔습니다.
1520년 11월 28일 산안토니오가 난파된 것으로 판단하고, 3척을 배를 이끌고 마침내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였습니다. 해협을 통과한 이후 마주한 잔잔한 바다를 태평양이라고 이름지었고, 지나온 해협은 마젤란 해협으로 명명하였습니다.
1521년 3월 28일 태평양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태평양 횡단을 감행하였고, 괌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1521년 4월 7일 마젤란 함대는 항해를 계속하여 필리핀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젤란을 처음 세부섬에 상륙하여 이 지역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1521년 4월 27일 마젤란은 막탄섬에 갔다가, 스페인 왕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추장 라푸라푸와 막탄 전투를 벌이게 되고, 이때 마젤란은 4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마젤란의 종이었던 엔리케는 마젤란의 죽음을 선원들의 잘못이라고 잘못이라고 생각하여 세부의 술탄을 충동질했고, 술탄의 식사 초대에 응한 선원들은 독살을 당하고 남은 선원들은 공격을 받고 겨우 탈출하였습니다.
1521년 5월 4일 남은 선원들은 3척이나 되는 배를 운항할 인원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콘셉시온 호를 자침시켰습니다.
1521년 12월 18일 남은 빅토리아 호와 트리니다드 호는 남쪽 말루쿠 제도로 항해하여 정향을 구매하였는데, 정향을 너무 많이 구매한 탓에 트리니다드 호는 침수되어 수리를 위해 말루쿠 제도에 남겨두고 빅토리아 호만 귀향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포르투칼 세력권이었던 남은 항로 동안에 거의 보급을 받지 못하여 괴혈병과 영양실조에 시달린 끝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1522년 9월 6일 결국 출발 당시 5척의 배와 270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던 함대는 빅토리아 호 1척과 선장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와 피가페타를 포함한 18명, 도중에 승선한 인도오 3명까지 포함하면 21명으로 줄어든 상태로 스페인 산루카 항에 귀환하였습니다.
스페인 서회항로 개척의 결과
빅토리아 호에 실려온 정향의 가치는 이 항해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충당하고도 남았습니다.
말루쿠 해협에 남겨진 트리니다드 호는 4개월만에 수리가 끝났으나 귀항중에 포르투칼 함대에 포획되는 바람에, 3년의 시간이 다시 흘러 단 4명만이 스페인으로 살아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세계최초의 세계일주
이 항해로 마젤란 함대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사라고사 조약
마젤란 함대가 세계일주 성공으로 스페인과 포르투칼 사이에는 동남아의 말루쿠 제도의 귀속을 둘러싸고 영토다툼이 벌어집니다. 마크 제도, 부루섬과 스람섬으로 구성된 말루쿠 제도는 당시에 매우 고가에 거래되었던 정향 등에 향신료 산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494년에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대서양을 중심으로 한 경계를 명시한 것으라 지구 반대편인 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토 경계선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양국은 협상을 통해 1529년 4월 22일 사라고사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말루쿠 제도의 동쪽 29.7 리그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두 번째 경계로 했습니다. 부루섬의 동쪽 1425Km, 동경 144도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자오선은 뉴기니섬 중앙부를 통과합니다.
포르투칼은 이 조약을 통해 말루쿠 제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인정받는 대신 스페인에게 35만 듀카트를 배상금으로 지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포르투칼의 마카오의 권익이 승인되었습니다. 스페인은 호주 전역에 대한 우선권을 획득하고, 필리핀은 훗날 필리핀령이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지 수탈
1565년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에 의해 시작되었고, 19세기 말까지 300년 이상 스페인의 통치가 지속되었습니다. 나라이름은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로마 카톨릭이 국교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스페인 서회항로 개척의 기록
스페인 왕실 서기였던 막시밀리안 트랜실바노는 엘카노를 포함한 3명에게 사정을 청취하여 청취보고서를 남겼으며, 이는 마젤란의 항해에 대해서 공신력을 지닌 최초의 기록입니다.
이후 스페인 왕실은 엘카노에 대하여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인물로 공인하였으며, ‘프리머스 서컴데디스티메’(Primus circumdedistime, 라틴어, 우리 주위를 최초로 돈 사람)이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18인의 생존자 중 한 명이며 빅토리아 호의 항해사였던 프란시스코 알보는 항해 일지를 남겼는데, 이 기록은 3년간의 항해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기록입니다.
피가페타는 항해가 끝난 다음 이탈리아로 돌아갔으며, 교황의 권유를 받아 자신의 체험단을 기록했고, 이후 이것을 로도스 기사단 단장에게 보낸 서간문의 형태로 발표했는데, 이것이 바로 <마가야네스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Relazione del Primo Viaggio Intorno Al Mondo)입니다. 이 서간의 일부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서 유럽 전체로 퍼졌는데 특히 프랑스어 본이 유행하였습니다.
이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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