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11테러(September 11 attacks, 9/11 attacks)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조직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4차례의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입니다.
알카에다 주도의 테러리스트들은 납치한 항공기를 미국의 주요 건물에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테러를 일으켜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D.C.의 국방부 청사 건물인 펜타곤을 공격하였습니다.
백악관 또는 미국 국회의사당도 목표로 노려졌으나 이 공격을 위해 납치된 UA93기는 승객의 저항으로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광산에 추락하였습니다.
3천 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최소 6천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여 2024년 기준 가장 큰 인명피해를 유발한 테러 공격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유나이티드항공 175편이 2WTC에 충돌하는 모습, 아메리카항공 77편이 충돌한 미구 국방부 청사 펜타곤의 모습, 출처 : 나무위키
이 테러는 피해 당사국인 미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우방국과 적대국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고, 미국 내부에서는 이 사태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에 대한 무제한 응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이 테러는 테러리즘이 단순한 범죄를 넘어 전쟁에 준하는 수준의 안보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2001년 911테러의 배경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후 이슬람권 각지에서는 '불신자 공산군'과 싸우는 아프간 무슬림들을 돕기 위한 지하드의 일환으로 궐기한 무자헤딘 전사들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의 등장
냉전, 소련에 대립하던 미국이 지원
냉전으로 소련과 대립하던 미국 정부는 CIA를 통해 그들을 지원했고, 서방 유학을 통해 영어에 능통하던 오사마 빈 라덴이 그 지도자가 됐습니다. 그러던 1988년 소련이 전쟁에서 손을 떼고 철수를 개시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의 배신, 알케에다 창설
소련의 철수
대항 세력의 변경 소련 -> 미국
소련에 대항한다는 방향성을 잃은 지하디스트 세력을 유지하려던 빈 라덴은 지하드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고, 그 대상은 바로 기존의 동맹이던 미국이었습니다.
같은해 빈 라덴은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의 무자헤딘 베테랑들과 함께 페샤와르에서 '지하드의 선봉'이 될 조직으로 알카에다(아랍어로 근본)를 창설했습니다.
1990년 걸프전쟁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
1990년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빈 라덴은 무자헤딘 조직의 활용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지원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사우디 왕가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이후 미군이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자 빈 라덴은 사우디 왕가에 타크피르(배교자)라며 지하드를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아라비아 반도의 비무슬림을 추방할 것이라는 하디스를 인용하며 1996년 사우디에 주둔하는 미군에 퇴거를 명령하는 파트와를 내렸습니다.
미국의 걸프전쟁 개입과
알카에다의 대테러 시작
알카에다 창설 전부터 이스라엘과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정권들을 지원하는 미국에 반감을 품어오던 빈 라덴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알카에다는 케냐 미 대사관 폭탄 테러와 탄자니아 미 대사관 테러를 감행하면서 전세계 이슬람 극단주의에 있어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알카에다의 세력확대와
911 테러 계획
같은해 빈 라덴은 미국의 대 이스라엘 정책과 중동 개입을 성토하며 전세계 무슬림들이 단결해 '이슬람 국가들의 공공의 적인'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중동은 물론,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의 산하에 모여들었습니다.
충분한 세력을 확보한 빈 라덴은 1998년 말부터 미국 본토에 테러를 감행할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의 주동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도 있었습니다.
이후의 인터뷰에서 빈 라덴은 1982년 레바논 내전 당시 이스라엘 공군이 미제 무기로 베이루트 도심 고층건물들을 사정없이 폭격하는 것을 tv로 목도하고는 이를 갈면서 이스라엘의 후원자인 미국의 마천루.펜타곤.백악관 등 미국 건물들에 대한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으나 빈 라덴의 이러한 심리와 실제로 그러한 공격을 감행한 칼리드의 합류는 9·11 테러 계획의 구체화로 이어졌습니다.
알카에다의 911테러
실행을 위한 준비
알카에다의 최종목표가 된 미국 본토 공격에 있어 빈 라덴은 미국 군사력의 기반은 미국 경제력에 있고, 따라서 미국 경제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무역센터를 테러의 주요 목표로 선정했습니다.
또한 9월 11일을 실행일로 정한 것은 그가 누차 서방의 중동 개입 시작으로 간주한 제2차 빈 공방전이 절정에 달하던 날이었고, 또한 유엔 총회 개막일이자, 빈라덴 자신의 궐석재판 하루 전날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들이 겹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테러 실행시간도 이른아침 시간대라 관광객들이 아닌 출근하는 미국 시민들을 노린것으로 추정됩니다.
1999년 테러 실행방법으로
비행기 납치 결정
한편, 1999년 빈 라덴의 참모 모하메드 아테프는 테러 실행방법으로서 비행기 납치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인원을 모집했습니다. 그 결과 교육수준이 높고 서방 유학 또는 거주 경험이 있어 영어가 능숙한 이들이 납치조 약 20여명으로 꾸려졌습니디다. 당시 탈레반의 초청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본거지로 삼던 알카에다는 이들을 초청해 훈련시켰습니다.
2000년 봄 부터 납치조 입국
납치조는 2000년 봄부터 차례대로 미국에 들어갔고, 빈 라덴은 사우디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척을 포섭해 그들의 여권을 발급했습니다.
2000년에 들어간 1차 납치조는 플로리다의 허프만 비행장 등지에서 조종훈련을 받았고, 2001년 봄에는 2차 납치조가 합류했습니다. 2001년 7월, 납치조장 격인 모하메드 아타는 스페인에서 알카에다 간부와 접선하여 최종계획을 브리핑했습니다.
미국 CIA, FBI의 이상 감지와
안일한 대응
빈 라덴은 이를 승인하고 최대한 빠른 실행을 지시했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실 미국 정보당국도 어느 정도는 알카에다의 음모를 눈치챘었습니다. 이미 2000년 전후로 사우디 정보당국의 협조로 CIA는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미국 비자를 소지했음을 확인했고, 세계 각지 요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2000년 7월, CIA는 알카에다 조직원 2인 이상이 미국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고 FBI는 미국내 비행학교에서 이상한 조짐을 감지했습니다.
하지만 두 정보당국의 협조는 거의 없었고, 당연히 이들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고 그저 테러리스트들의 개별 행동으로 치부했다. 심지어 알카에다 조직원에 대한 FBI의 정보공개요청을 CIA가 거절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2000년 USS 콜 테러사건 이후에도 알카에다가 단순히 해외에 주둔한 미군 공격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여겨 해외 소재 미국인들의 경계 강화에만 치중했다.
2001년 8월, 요르단 정보당국은 미국 측에 알카에다가 미국내에서 비행기와 연관된 음모를 진행중이고, 이는 한 달 안에 집행될 것이라는 중요한 첩보를 전달했습니다. 그 후 비로소 민간비행학교에 알카에다 조직원이 있다는 FBI의 의혹제기를 받아들인 CIA는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국내에서 비행기 납치 등의 형태로 공격이 예상된다'고 보고했습니다.
8월 16일에는 알카에다 조직원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미네소타의 비행학교에서 보잉 747기의 조종훈련을 고집하다가 의심을 받아 체포됐습니다. 하지만 FBI 뿐만 아니라 조지 부시 대통령을 위시로 한 미국 수뇌부 역시 알카에다를 과소평가하며 납치 후 인질극 정도 벌일 뿐 감히 미국 본토를 향한 직접 공격을 감행하진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빈 라덴이 설정한 테러 개시의 날은 묵묵히 다가왔습니다.
2001년 9월 11일
모든 일들은 9월 11일 오전 8시에서 11시까지 약 2-3시간에 걸쳐 벌어졌습니다.
사건 당일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항공기들의 비행경로, 출처 : 나무위키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의해 AA11, UA175 · AA77 · UA93 비행기 4 편이 납치됐고 UA93을 제외한 비행기 3 편은 테러의 목표지점에 충돌했습니다. UA93 편은 승객들의 저항에 의해 목표지점까지 가지 못하고 도중에 추락했습니다.
오전 8시 13분경 모하메드 아타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아메리칸 항공 11편, AA11 편을 납치했습니다. 이후 AA11 편은 뉴욕으로 향해 오전 8시 46분경 제1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다.
오전 8시 43분경 마르완 알 셰히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 UA175편을 납치했습니다. 이후 UA175편은 뉴욕으로 향해 오전 9시 3분경 제2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습니다.
오전 8시 51분경 하니 하뇨르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아메리칸 항공 77편, AA77 편을 납치했습니다. 이후 AA77편은 워싱턴으로 향해 미합중국 국방부 청사 펜타곤에 충돌했습니다.
오전 9시 28분경 지아드 자라를 비롯한 4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UA93편을 납치했습니다. 이후 UA93편은 워싱턴 D.C.으로 향했으나, 승객들의 저항으로 인해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광산에 추락했습니다. 원 목표는 백악관 또는 미국 국회의사당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19명 중 15명은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으로, 이들 중에는 법대 재학생이나 재벌집안의 자녀 등 부유한 가정의 도련님들이 많았습니다. 즉, 굳이 자진해서 테러를 할 필요가 없는 금수저임에도 저지른 것인데, 유달리 사우디 출신이 많은 것은 두 성지를 품은 조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이교도'인 미군이 주둔하던 것에 불만을 품은 사우디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충돌 : 제1세계무역센터
8:46 a.m
아메리카항공 11, AA11
세계무역센터에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하는 순간의 영상으로 마침 뉴욕시의 신참 소방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던 프랑스 출신 영화제작자 쥘 노데(Jules Naudet)가 찍은 것으로, 현재까지 발견되고 알려진 영상 중 1WTC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모습이 유일하게 제대로 담겨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리면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쥘 노데가 카메라 앵글을 돌리다가 우연히 비행기에 피격당하는 1WTC 건물을 찍은 것입니다. 엄청난 불길과 폭발음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Holy Shit!" 같은 반응을 보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알 수 있습니다.
1WTC에 충돌한 항공기는 아메리칸 항공 11편으로, 대장인 모하메드 아타 등 5명의 하이재커를 제외한 76명의 승객과 승무원 11명을 태우고 비행했습니다. 초유의 사태에 연방항공국은 긴장했고 미국 공군은 사라져 버린 AA11편을 찾으려고 전투기를 내보냈지만 그 때는 이미 충돌한 지 한참 지난 후인 데다 첫 충돌 비행기가 AA11편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해 모두가 보이는 곳에서 불타던 AA11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헛수고를 벌였습니다.
목격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고의 연쇄 테러의 첫 공격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조종사의 실수나 비행기 오작동으로 충돌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미 첫번째 충돌 시점에서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공격이라고 인지한 사람들 또한 많았습니다.
현재 공개되어 있는 9.11 관련 다큐나 많은 영상에서 최초 충돌 직후 사람들이 '의도적인 충돌이었다'고 증언하는 부분이 꽤 나오며, 소방관들의 다큐에서도 의도적 공격으로 의심하는 증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다.
오전 8시 49분 경, 언론들은 이 사고를 긴급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후 WTC에서 사람들에게 비상대피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충돌이 일어난 곳은 1WTC 였기 때문에 2WTC에 있는 사람들의 피난을 중단시켰고 사람들을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습니다.
2WTC에 있던 사람들은 건너편에 불이 났나 보다라고 생각했고 2WTC 방송실에서는 "긴장하지 말고 제자리에 편안히 있으라"는 방송을 했습니다. 당시는 첫 충돌이 '고의 연쇄 테러의 첫 공격'이라는 것이 파악 안 된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옆의 1WTC가 곧 무너질 것이었기에 2차 테러가 없었더라도 대피를 하는 것이 옳았으나, 이 정도 규모의 사고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1WTC가 무너질 것이라는 결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두 번째 충돌 : 제2세계무역센터
9:03 a.m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
결국 1WTC가 불타는 모습이 언론사들을 통해 전세계에 거의 생방송으로 중계되던 9시 3분(한국시각 오후 10시 3분),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방송 카메라가 전부 WTC를 향한 상태에서 두 번째 비행기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각 언론사들이 1WTC가 불타는 모습을 중계하던 중 또다른 비행기가 2WTC에 충돌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목격한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속보 방송 앵커들은 1WTC 화재를 테러로 보도하지 않고, 여전히 비행기 충돌 원인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해야 할 아나운서들조차 중계 카메라를 통해 들어오는 참상을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최대한 자제해서 비속어를 내뱉으는 등 경악했습니다. 당시 NBC, ABC, CBS 등 미국 지상파 모든 방송이 1WTC의 화재 현장을 속보로 전하고 있었고, 미국인 상당수가 이를 시청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비행기 충돌로 불타던 1WTC 바로 옆의 2WTC에 여객기가 충돌하는 순간, "미국이 공격 받았다"는 사실을 수천만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확인한 셈이었습니다다.
위 CNN 동영상의 카메라맨은 항공기소음이 커지던 시점부터 크게 동요해 화면이 크게 흔들렸고, 아나운서와 취재진은 10초 가량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생방송 중 실시간으로 발표 등을 중계하는 게 아닌 이상 아나운서나 리포터가 10초씩이나 말이 끊기면 방송사고인데, 이 전대미문의 상황은 모두 할 말을 잃게 하였습니다.
이는 9·11 테러가 굉장히 치밀하게 계획된 테러였음을 증명하는데, 1WTC 충돌직후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시간차를 두고 한 번 더 2WTC에 충돌해 미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테러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고현장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두 번째 테러가 가해진 것은 현재까지도 정말 유례를 못 찾아볼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사례입니다. 알카에다가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뉴욕을, 그것도 두 번의 공격이 가능하고 충격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을 갖춘 쌍둥이 빌딩을 선택한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9-11 WTC Attacks Original Sound. Steve Vigilante (youtube.com)
두 번째 충돌 이후의 혼란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열기와 유독가스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그 고층에서 뛰어내려 추락사했습니다. 희생자들은 내부에서 유독가스로 질식사하거나 문자 그대로 하늘을 뚫을듯한 건물인 마천루의 고층에서 뛰어내려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지밖에 없던 것입니다.
오전 9시 30분경엔 추락하는 투신자에 직격으로 맞은 소방관이 죽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렇게 추락사로 사망한 사람의 수만 200명이 넘으며, 추락사한 사망자들의 시신은 대부분 얼마 후 건물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유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대개 신원조차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리고 이 광경은 비행기 충돌 후 계속 돌아가던 뉴스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미국 전국에 생중계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세계무역센터에서 투신한 투신자들이 0명이라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거듭된 항의에 따라 몇 년이 지나서야 200명 이상의 희생자들이 투신으로 인해 숨졌음을 인정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불타는 잔해물들이 아래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에서도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었습니다. 불가항력이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을 건물 밑에서 보고만 있어야 하는 소방대원들은 억울하고도 애처로운 분노를 곱씹었을 뿐이며, 무력감을 느끼는 시민들은 그저 하염없이 절망만 할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1층에서 대기, 지시를 하고 있던 소방관들은 최소 60층 이상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추락하는 쾅 소리의 엄청난 굉음을 계속적으로 들을수 밖에 없었기에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할수 없었을거라 예상됩니다.
실제로 처음 쾅 소리가 났을때만 해도 소방관들은 엄청난 충격의 소리에 단체로 당황했으나 이내 그게 어떤 소리인지 깨닫고 말을 잇지 못하는 영상이 추후 공개됩니다.
옥상으로 헬기를 보낼 수 없었냐고도 하지만 화재현장, 특히 초고층 건물 화재에 헬기를 동원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화재현장에서 올라오는 엄청난 기류를 헬기가 그대로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연기 때문에 시야확보까지 잘 안되는 상황에 잘못하면 헬기마저 건물에 충돌하거나 열기에 의해 공중에서 폭발해버릴 위험이 매우 크고, 이런 까닭에 당시 사건 현장에 투입된 헬기들은 구조작업은 엄두도 못내고 건물 곁을 빙빙 돌면서 실시간으로 상황 보고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빌딩 상층부에 갇힌 희생자들도 헬기 생각을 하고 옥상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빌딩 상층부로 통하는 문을 포함해 제어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쌍둥이 빌딩의 모든 문을 어떻게든 모조리 개방하려는 직원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충돌로 망가진 제어 시스템에 의해 굳게 닫힌 옥상은 빌딩이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에게 피격당한 2WTC에 9시 37분 뉴욕 경찰 항공대의 헬리콥터가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무역센터의 옥상으로 착륙과 강하(레펠)를 시도했으나, 화재의 열기 때문에 엔진 온도가 급상승해 실패했습니다. 급기야 9시 41분에는 뉴욕 경찰국이 "헬기 구조 작업을 포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세 번째 충돌 : 펜타곤
9:37 a.m
아메리카 항공 77편
그러나 사건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다. 여전히 교신이 안 되는 비행기들도 있었으며 항공국은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을 금지함과 동시에 고층 건물이나 대도시 인근을 지나는 비행기들을 감시해야 했습니다.
미국 공군은 만일을 대비해 전투기의 추가 출격을 준비하였고, 여객기 격추 명령을 허가받으려 했으나 절차적 문제와 윤리적 문제로 인해 지연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동부 지역이 사실상 비행기 테러 공격에 무방비인 상황이 드러나자 미국 정부는 곧바로 백악관과 미국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워싱턴 D.C.와 뉴욕 일대의 모든 주요 시설과 공공기관 건물에 대피 명령을 내렸고 추가적인 납치 비행기 수색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칸 항공 77편의 교신이 끊어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지만, 항공기의 진로를 막을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했고 결국 항공기는 미국 국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펜타곤에 오전 9시 37분 46초경 서쪽 편에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그 전까지도 단순 비행기 사고로 생각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때부터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첫 번째 충돌과 두 번째 충돌로 인해 혼란한 와중에 연방 정부 건물, 그것도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에까지 여객기가 충돌하니 누가 뭐라고 해도 고의적인 테러인 것을 확신했고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 되었습니다.
부시대통령에게 보고
9:37 a.m
백악관 비서실장 앤드루 키드로부터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출처 : 나무위키
같은 시각 플로리다 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 동화책을 읽어 주던 수업에 참관 중이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앤드루 키드 비서실장으로부터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듣게 됩니다. 부시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뒤에도 아이들에게 계속 책을 읽어주다가 약 7분이 지난 후에야 교실을 떠났습니다.
Behind the scenes: In Sarasota classroom, Bush learns of Sept. 11th attack (youtube.com)
이후 조사위원회로부터 "왜 7분 동안 교실에 머물렀냐"는 지적을 받자 부시는 "학생들과 이후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시간을 약간 지체했다."고 해명했습니다. 이후 인터뷰에서도 그 상황에서 바로 격앙된 반응을 내서 학생들이나 이를 지켜보던 취재진 등을 당황하게 할 수 없어서 태연한 척했다고 말했습니다.
사건 당시 백악관 측에서 "부시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즉시 교실을 떠났다"고 과장해서 이런 논란이 벌어진 것. 다만 소식을 듣자마자 태연한 척을 하다가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어지고, 수업 참관에 집중하지 못한 채 여러 생각에 잠긴 부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2 세계 무역센터 붕괴
9:59 a.m
펜실베니아 주 한 광산에 추락
10:03 a.m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UA93편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되어 목표 지점으로 향하던 중 승객들의 저항으로 오전 10시 3분경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광산에 추락하였습니다.
이 비행기의 목표가 어디였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나 정황상 워싱턴 D.C.의 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한 것임은 분명했습니다.
원자력 분야 전문가들은 이들의 목표물이 백악관도 국회의사당도 아닌 미국 동북부의 원자력 발전소였을 가능성도 제기하였습니다.
93편의 승객들은 테러리스트들 몰래 가족들과 연락하여 이 항공기가 자살 테러를 목적으로 납치된 것임을 알아차렸고 저항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필사적으로 테러리스트들과 싸웠습니다.
결국 항공기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하였고 탑승객은 전원 사망했지만 테러로 발생하였을 추가적인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UA93편의 승객들은 사후 미국인들에게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서 존경받고 있으며, 이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플라이트 93이 제작되었습니다.
제1 세계 무역센터 붕괴
10:28 a.m
부시대통령 대국민 담화
10:00 p.m
직후 부시 대통령은 학교 체육관에서 9·11 테러에 관한 첫 번째 긴급 대국민 담화를 가졌다. 이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친 대국민 연설로 충격에 빠진 미국인들을 안심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 연설들 중 9월 11일 밤 10시에 한 연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조지 W. 부시 연설] 9/11 Address to the Nation | 9/11 대국민 연설 - YouTube
2001년 911테러의 피해
9.11 테러의 규모가 워낙 거대했고, 피해 지역도 광범위해 사상자 집계에만 수년이 소요되었습니다. 뉴욕과 펜타곤에 시신 확인이 안된 사망자도 그만큼 많았고, 실종자 역시 많았기 때문입니다. 당장 테러 당일 구조 작업 중 사망한 뉴욕 소방국(FDNY) 소속 소방관 희생자가 343명에 달했고, 뉴욕 경찰(NYPD)은 72명이 현장에서 순직했습니다.
세계무역센터에 미국 지사가 위치해 있던 국내 기업들 사무실에서 한국인 희생자 28명 대부분이 나왔습니다. 초기에 21명으로 알려졌던 한국인 사망자는 실종자까지 28명으로 늘었습니다.
당시 그라운드 제로의 뉴욕 다운타운은 9월 11일 이후 수개월간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는데 소호 길거리 곳곳에는 WTC에 근무하던 실종자들의 사진과 신상이 동료, 친지들에 의해서 붙여졌습니다.
110층의 쌍둥이 건물이 붕괴됐기 때문에 사망 확인이 된 희생자가 드물었고, 사망자 대부분이 한동안 실종자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한동안 길거리에서 실종된 사람들을 찾는 인파가 다운타운에 넘쳤습니다.
정부 입장에서도 당장 실종자들을 사망자로 확인할 수도 없었고 반년 넘게 이어진 잔해 해체작업에서도 오래동안 이어진 잔해 화재로 신원 확인이 안된 희생자들도 상당수에 달했습니다. 그만큼 DNA 확인을 통해서 수년만에 사망확인이 된 희생자도 많았습니다. 전시상황에 가까웠던 당시 뉴욕의 참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재산피해
|
항공기 AA11기, UA175기, AA77기, UA93기 완파
구 세계무역센터 붕괴, 펜타곤 일부 붕괴
도이체방크 뉴욕지점 사옥 대파, 국제금융센터 반파
뉴욕시 GDP 273억 달러 감소
여행 관련 지출 비용 전년 대비 20% 감소, 관련 직종 실업자 43만 명 발생
|
사망자수
|
총 사망자 수 2,996명
세계무역센터 2,606명
펜타곤 125명
4개 기체 탑승자 246명 전원 사망
|
부상자수
|
최소 6,000여 명 ~ 최대 25,000여 명
|
분진피해자
|
5,771명 ~ 75,000여 명
|
2001년 911테러 이후
2001년 9월 20일
부시대통령 "테러와의 전쟁" 선포
이 사건으로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월 20일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였습니다. 테러 단체, 국가에 맞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싸울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2001년 10월 7일, 미국·영국 연합군은 아프가니스탄 주변에 350여 기의 항공 전력을 배치하고, 아프가니스탄 영토에서 자유로운 전투·폭격기를 이용한 공습과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군을 앞세워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으며,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함락하였습니다.
이어 다음 달 22일 연합군은 반 탈레반 정권인 과도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탈레반과의 전쟁을 종결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이 전쟁의 목표로 삼았던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 알카에다를 뿌리뽑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은 2003년 3월 20일에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알카에다와 동맹한 이라크 정부를 20일 만에 함락시키고 새로운 과도정부를 출범시키는 등 대테러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2006년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 사살
사담 후세인 처형
또한, 2006년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 사살과 사담 후세인을 처형하였습니다.
2011년 오사마 빈 라덴 사살 후 수장
제로니모 작전
2011년 5월 제로니모 작전의 일환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 후 수장하였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의 미친 영향
2011년 아프가니스탄 종결과 함께
미국의 절대 패권 약화
테러와의 전쟁은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의 부재 및 이라크 공습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
위키리크스 등으로 밝혀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미군의 인권 유린 행위 발각
애국자법(2001)과 같은 감시권한 강화에 대한 논란
대침체와 더불어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불리던 미국의 절대 패권 약화에 기여
등 국내외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에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9·11 테러를 21세기 현대사의 핵심적인 사건으로 평가합니다.
미국이 9.11을 기억하는 방법 - 9.11 메로리얼 & 뮤지엄
메로리얼 & 뮤지엄
National September 11 Memorial & Museum
180 Greenwich St, New York, NY 10007
9.11 메로리얼 & 뮤지엄, 출처 : 나무위키
미국 뉴욕시 맨해튼 구 세계무역센터 1, 2번 건물 자리에 있는 9.11 테러 추모 공원.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정사각형 모양의 인공폭포가 바로 테러로 붕괴된 1, 2동의 자리입니다.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9.11 테러로 사망한 2,977명의 희생자와,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로 사망한 6명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구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현장(그라운드 제로)에 지어졌습니다.
9.11 테러 10주년인 2011년 9월 11일에 개장하였습니다.
테러로 붕괴된 두 개의 쌍둥이 건물 자리에 두 개의 풀과, 각 풀에 거대한 구멍과 폭포가 설치되고 물이 흘러내리는 사진, 1번째 사진 - 테투리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둘러싸여 있고, 두번째 사진 - 매년 희생자의 생일 때 그 자리에 꽃을 꽂아둡니다. 세번째 사진 - 매년 9월 11일 Trubute in light라는 서치라이트를 비춰 희생자들을 추모합니다, 출처 : 나무위키
메모리얼 뮤지엄은 메모리얼 공원 지하 전체를 차지합니다. 디자인적으로 벽과 계단 등에 예각과 둔각을 혼합하여 참사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였고 화강암과 철근 등을 이용하여 건물들의 중압감과 무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박물관 전체의 크기도 매우 커서 최소 1~2시간은 잡고 관람하여야 하지만 음성, 영상, 실물자료 등이 적재적소에 잘 배치되어있어 분위기가 엄청나기 때문에 몰입이 잘 됩니다.
의외로 지극히 사적이고 소소한 흔적도 많습니다. 사고를 전해 들은 각국 사람들의 외마디,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진 희생자의 음성, 어느 생존자가 신고 뛰었던 피 묻은 하이힐, 소방관이 구조 당시 입었던 타 들어간 방화복, 건물 붕괴 당시 깔려 반파된 소방차, 남쪽 타워에 충돌했던 두 번째 비행기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의 엔진 잔해 등등 입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마음의 준비는 필수이며 감정적으로 견디기 힘들어진 사람들을 배려하여 얼마든지 도중에 나갈 수 있도록 나가는 문을 곳곳에 배치했고 휴지도 마련해놓았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직육면체는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바로 그 자리이며, 저 공간 안에도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전시 주제는 그날의 비극과 관련한 "회상"에 맞춰져 있습니다. 알카에다가 왜 미국을 공격하게 되었는가는 전시동선 끝부분에 한 벽면을 장식하는 설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9.11 음모론' 떡밥도 알카에다와 반미주의 다음의 섹션에 더 조그만한 크기로 전시되어 있는데, 9.11 음모론을 검증한 잡지 파퓰러 사이언스에 헌정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데브그루 대원 로버트 오닐 상사가 빈 라덴 사살 당시 착용했던 전투복과 군장도 기증받아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국이 삼풍백화점 참사를 기억하는 법
이상끝
'오늘의 사건사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사 상륙 작전 (6) | 2024.09.16 |
---|---|
일등락률표 - 저점 대비 고점(aka.포지션표)(2024.09.13 금요일) (2) | 2024.09.14 |
일등락률표 - 저점 대비 고점(aka.포지션표)(2024.09.12 목요일) (0) | 2024.09.13 |
일등락률표 - 저점 대비 고점(aka.포지션표)(2024.09.11) (0) | 2024.09.12 |
2024년 9월 10일 일등락률표(aka. 포지션표) (0) | 2024.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