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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부마민주항쟁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영어: Bu-Ma Democratic Protests)

부마민주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현재의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마산시(현 소재지 : 창원시)에서 유신체제에 대항한 시위가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4공화국 유신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YH사건과 함께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부마민주화운동 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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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의 배경

유신 헌법 제정 이후

학생 운동 시민 운동 탄압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유신 헌법 제정이후로 학생운동, 시민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졌으며, 이를 누르기 위해 학생 및 시민운동을 탄압했습니다.

2차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위기

1978

1978년 건설주 파동으로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경제나 나빠지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2차 오일쇼크로 경제가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경공업 중심 부산 마산지역

중소업체 직격탄

1978

이로인해 경공업이 중심이 된 부산, 마산 지역의 많은 중소업체들이 당시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신설 등의 여파로 직격탄을 맞게되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민심이 크게 악화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금권 관권 선거

1978.12

1978년 12월에 실시된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는 금권 및 관권선거가 영향을 크게 미쳤습니다. 그럼에도 집권 민주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에 지지율에서 패배하였습니다. 다만 농촌에 유리한 선거제도로 인해 의석은 더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민주화 시위

민주 인사 연행과 투옥

1979

1979년은 민주화 시위가 널리 퍼지면서 당시 민주 인사들에 대한 연행과 투옥 등 탄압 강도가 강화되었습니다.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신민당 점거 농성

노동자 사망 사건 발생

1979.8.9~11

같은 해 8월 YH무역의 폐업에 항의하여 4월 13일부터 장기 농성에 들어갔던 YH무역주식회사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경찰에 의해 11일 강제 해산 되는데 이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모두 강제연행 되고, 노동자 중 한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김영삼 뉴욕 타임스 인터뷰

1979.9.12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 대통령을 제어해줄 것이며 이를 위해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라는 취지로 발언하였습니다.

김영삼 국회 제명과

국회위원 사퇴서 제출

1979.10.13

당시 민주공화당은 김영삼 총재 의원직 재명 파동을 일으키게 되고, 10월 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과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은 국회의원 사퇴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의 전개과정

<부산의 도심 시위> 곽영화, 출처 : 나무위키

부산대학교 학생

유신철폐 독재타도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구호

1979.10.16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하였습니다. 부산대 도서관 팡에서 수백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2,000명으로 불어났으며, 교정을 돈뒤 시내 진출을 시도하였습니다.

전경은 최루탄을 쏘며 교내로 진입했는데 이에 반발하여 교내의 다른 학생들까지 시위대에 합류하였습니다.

오전 11시경 5,000명 가량의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였습니다.

시위 확산

고신대 동의대 학생 합류

1979.10.16 오후 3시

오후 3시 부터 고신대학교와 동의대학교 학생들의 합류로 시위규모는 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응원해 주었습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고, 응원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시위 확산

회사원 노동자 상인 합류

5~7만 여명

1979.10.16 오후 7시

퇴근시간 이후 회사원, 노동자, 상인들도 시위에 합류하여 5~7만여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 간선도로를 꽉 채웠습니다. 시위대는 부산을 돌아다니며 격렬이 저항하였습니다.

 

시위대, 출처 : 나무위키

시위대와 경찰의 공방

1979.10.16 ~ 17

16일 남포, 부평, 보수, 중앙 등 총 11곳의 파출소가 파괴되었고, 경찰은 17일 최루탄과 곤봉을 마구잡이로 휘둘렀지만, 시위대는 끈질기게 저항아며, 중구, 서구, 동구 지역 내의 모든 파출소, 경찰서, 공공기관을 공격하였습니다.

부산 계엄령 선포

1979.10.18 새벽 0시

부산시내 주둔중인 장갑차, 출처 : 나무위키

박정희 유신정권은 10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 특전사 2,000여명을 투입하여, 66명을 군사 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마산으로 시위 확산

1979.10.18

시위는 마산으로 확산되어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의거탑에서 1,000여명이 스크럼을 짜는 시위를 전개하였고, 저녁부터는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대규모 군중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마산 및 창원 일대 위수령 선포

1979.10.20 오전 12시

10월 20일 오전 새벽 0시를 기해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을 출동시킨 후 민간인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정권의 언론통제

당시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로 인해 당시나 직후에 부산, 마산 바깥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수도권에 본사를 둔 전국지 신문에는 그저 작은 소요사태로 보도되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당시에는 무슨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박정희, 김재규에 의해 암살

1979.10.26

부마민주항쟁이 진압되고 6일 후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전두환, 12.12 군사 반란

1979.12.12

불행하게도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군사독재의 철권통치를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박정희만 없어졌을 뿐 더 강경한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여 부마민주항쟁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의 진상규명

참여정부 진실화해위 출범

2005

이후 참여정부에서 2005년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출범하였습니다.

부산민주항쟁기년사업회

2006.11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2006년 11월에 부마항쟁에 대한 조사를 신청받았습니다.

진상규명

2009.12 ~ 2010.4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2009년 12월 부터 2010년 4월 까지 이루어졌으며, 부마항쟁 과정에서 있었던 인권침해와 폭력적인 공권력 행사, 사건 조작 등의 흔적을 발견하는 등 일부분 성공을 거두었으나, 한정된 시간과 조사위원의 부족 등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마항쟁위원회

2013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에 부마항쟁법이 제정되면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부마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위위원회가 개설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추가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법률안 개정 등을 통해 활동 지속

2016년, 2018년, 2021년 위원회 활동기간을 연장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부마항쟁 관련자 국가유공자 예우법은 존재하지 않음, 관련법 추진

현재진행형

2020년 7월 국민의힘 김희곤 의우넌이 '10.16부마민주항쟁유공자의 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였고, 더불어 민주당 전재수 의원 등 또한 비슷한 법안을 발의하였으나, 아직까지 관련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