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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마야문명(기원전 2000년경 ~ 1697년)

마야문명

마야문명은 지금의 메소아메리카의 멕시코 동남부의 5개 주(치아파스 주, 타바스코 주, 캄페체 주, 유카탄 주, 킨타나 로오 주),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북부, 벨리즈, 온두라스 서부, 유카탄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던 문명입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후 17세기까지 약 3,800년간 번영을 누렸던 문명 및 문화권으로,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발달한 언어 체계와 고도의 문화를 향유 했으며, 높은 수준의 예술, 건축, 수학, 달력, 천문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야라는 단어는 당시 유사한 지역 전체에 살고 있던 민족들을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1690년대에 마지막 마야 도시였던 노흐페텐(또는 타야살)이 스페인 군대에게 함락당하면서 마야 문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마야인과 마야어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야 문명은 유카탄 반도 일대의 정글이 주요 무대였으며, 종종 비교되는 잉카나 아즈텍은 정글보다는 건조한 사막, 고원지대가 주요 활동 범위였습니다.

마야문명의 연대기

마야 문명은 크게 선고전기, 고전기, 후고전기로 나뉩니다.

시대
연대 구분
연도
고대
BC 8000–2000
선고전기
선고전기 초기
BC 2000–1000
선고전기 중기
선고전기 중기 초반기
BC 1000–600
선고전기 중기 후반기
BC 600–350
선고전기 후기
선고전기 후기 초반기
BC 350–1
선고전기 후기 후반기
BC 1–AD 159
선고전기 말기
AD 159–250
고전기
고전기 초기
AD 250–550
고전기 후기
AD 550–830
고전기 말기
AD 830–950
후고전기
후고전기 초기
AD 950–1200
후고전기 후기
AD 1200–1539
스페인 접촉기
AD 1511–1697

마야문명의 선고전기(BC 2000 ~ AD 250)

선고전기는 기원전 2000부터 기원후 250년까지로 저지대의 대도시 엘 미라도르(El Mirador)를 중심으로 책력이 만들어지고 마야 문화의 기초가 잡혔습니다.

마야인들은 첫 문명을 선고전기부터 창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야인들이 쿠엘로(핸재의 벨리즈)에 정착한 시기는 탄소연대측정법으로 기원 2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태평양 해안에는 약 기원전 1800년경 도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야인들이 정착한 곳에서는 매년 5월에서 11월까지 비가 퍼부으면 개울과 강이 넘쳐 강변의 낮은 습지대와 호수에 물이 고였으나, 2월이 되면 물이 그쳤고 다음 우기까지 물이 점점 귀해졌습니다. 때문에 마야인들은 호수나 습지같은 수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작은 마을들을 세웠습니다.

이 당시 마야인들은 이미 옥수수, 콩, 칠리 고추들을 재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옥수는 이후 마야인들의 주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옥수수는 재배하기 까다로운 작물로 농경과 날씨가 중요해졌고, 이에 따라 평등했던 마야 사회에 변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농사에 가장 능했던 자들은 새로운 권력층으로 떠올랐고, 새 엘리트 계급은 날씨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평민들을 다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은 비와 풍요를 불러온다는 구실로 거창한 제례를 위한 피라미드들과 사원들을 쌓을 것을 요구했으며, 이에 쌓아진 사원에서 제물을 바친 뒤 사제들이 명령하는 시기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 풍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야인들은 이 지도자 층에게 실제로 무언가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이들 지배계급에게 복종하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정착해 생활하며 도자기를 만들고 점토로 상들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선고전기 중기에는 마을들이 도시들로 확장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페텐반도의 나크베라는 이름의 도시는 마야 저지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기원전 750년경에 지어진 신전들의 유적이 발굴되었습니다.

유카탄반도의 북부 저지대에서도 점차 사람들이 정착지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고, 기원전 400년경에는 군주와 왕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페텐 반도에서는 이미 3세기경부터 기록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선고전기 후기에는 엘미라도르(El Mirador)라는 이름의 마야 도시가 거의 16제곱 평방킬로미터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거대한 3중 피라미드와 천문대를 갖추고 있었으며 68m에 달하는 마야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건물인 단타 복합단지를 짓기도 했습니다.

 

당시 티칼은 엘 미라도르만큼은 아니지만 이미 도시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던 단계였습니다.

고지대에서는 카미날휴라는 이름의 도시국가가 후기 선고전기의 중심지로 번성하였습니다.

태평양 연안에서는 타칼리크 아바흐와 초콜라가 유력한 도시들로 발전하였습니다.

콤첸은 북부 유카탄반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로 번영하였습니다.

후기 선고전기 문화는 기원전 1세기경에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이때 수많은 도시들과 사원들이 정글속에 버려졌으나, 그 이유는 명확치 않습니다.

선고전기 도시들이 버려진 이유에 대한 다른 의견은 피라미드를 포함한 모든 건물에 두툼한 회반죽을 발랐는데, 회반죽을 만들기 위해 숯을 지핀 가마에서 대규모의 석회암 덩어리를 고온으로 가열하였습니다. 숯을 만들기 위해 대량의 나무가 필요했고, 마야인들이 도시 인근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리고, 이에 나무가 사라지고 비가 내리면서 농사에 필수적인 부엽층이 모두 쓸려 내려가 식량 공급이 멈추게 되고 도시들이 멸망했다는 의견입니다.

마야문명의 고전기(AD 250 ~ AD 900)

고전기에는 마야인들이 달력을 사용하여 거대한 석비들과 사원을 세웠습니다. 이 시기에 급격한 도시화와 큰 건물들이 세워졌으며, 사원들의 수와 규모도 압도적으로 증가했으며 남부 저지대 지방을 중심으로 예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고전기에는 다양한 도시 국가들이 연합과 대치를 거치면서 교역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거대한 도시들은 약 5만명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거주하였으며, 대다수가 주변 도시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전기 초기에는 대부분의 마야 도시들이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378년에는 테오티우아칸의 지도자들이 티칼과 타 도시들의 지배자들을 갈아치우기까지 하며 본격적으로 간섭하였으며, 테오티우아칸의 왕족들을 대신 그 자리에 세우며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시야즈 칵은 378년 초에 티칼에 도착하여 왕을 죽이고 티칼의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1년 후에 새로운 왕을 세우고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였습니다. 나중에 티칼은 강력한 도시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티칼의 최대 경쟁자는 페텐 분지에 있던 도시 칼라크물이었습니다.

티칼과 칼라크물 둘 다 강력한 동맹들을 맺고 서로를 견제했으며, 자신보다 힘이 약한도시들을 구슬리거나 협박하여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습니다.

고전기 내내 티칼과 칼리크물은 끊임없이 경쟁하였으며, 쇠퇴와 번영을 반복하였습니다.

629년 티칼의 왕자가 페테스바툰 지역을 탐험하고 도스 필라스(Dos Pilas)라는 도시를 세웠고 20년 동안 끊임없이 도시를 번영시켰습니다.

이후 칼라크물의 왕이 도스 필라스를 공격하여 왕자를 사로 잡아 도스 플라스의 왕으로 세워 자신을 섬기게 하였고, 왕자는 칼라크물의 충신한 신하로 남았습니다.

동남부의 코판은 426년에 '키니크 약스 쿠크 모'라는 사람이 세웠으며, 코판의 왕실은 테오티우아칸과 친분이 깊었습니다.

코판은 우아사클라준 우바 카이이 왕의 치세에서 가장 번영하였으나, 카이이 왕이 그의 신하였던 퀴리구아의 왕 칵 틸리우 찬 요팟에 의해 사로잡히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티칼과 칼라크물 간의 팽팽한 대치 상태가 이어지던 중인 562년, 칼라크물이 인근의 도시국가인 카라콜의 힘을 빌려 티칼의 와크 찬 카윌 왕을 꺾는데 성공했고, 티칼의 암흑기가 닥쳤습니다. 칼라크물은 마야 세계의 유일한 패권국으로 화려한 번영을 누렸습니다.

타칼의 암흑기는 6~7세기까지 계속되었고, 티칼 유적에는 이 시기에 지어진 대규모의 건축물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고전기의 초기와 후기를 구분하고, 특별히 티칼 히아투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후 682년 자소우 찬 카윌 1세 대왕이 즉위하고 칼라크물을 공격해 함락하는데 성공하면서 무려 120년 간의 암흑기를 끝내고 티칼을 부활시켰습니다.

우슈마신타 지방에서는 우슈말과 팔렌케가 가장 번화한 도시였으며, 북부지방에서는 코바가 융성하였습니다.

9세기경부터 마야 문명의 중부 지대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여, 도시들이 버려졌고, 왕조들이 끊겼으며 북부로 향하는 유민들이 늘어났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지속적인 내전, 인구 과잉으로 인한 환경파괴, 가뭄 등의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전기 말기에는 북부 유카탄반도의 치첸이트사와 우슈말이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북부 지대의 도시들은 남부 지대의 도시들이 대부분 무너진 이후에도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거주하면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고전기 마야 문화는 지도자의 영적 권위에 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었고, 9세기와 10세기 지도자들과 사제들의 권위가 떨어졌습니다.

북부 유카탄반도에서는 군주정이 엘리트 중심 귀족정으로 대체되었고, 남부 유카탄반도와 페텐 분지의 왕국들은 아예 멸망하였습니다.

마야 문명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적 변화는 한꺼번에 급격히 찾아왔고, 문명은 급속히 와해되었으며, 도시 인구는 추락하였습니다.

몇 세대 만에 대부분의 마야 중부 도시들이 버려졌으며, 살아남은 도시들조차 건물들을 개축하고 날짜를 새기는 일을 중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마야인들의 마지막으로 날짜를 새긴 날짜는 909년 이었습니다.

마야문명의 후고전기(AD 950 ~ AD 1539)

한때 번생했던 남부 유카탄반도는 버려졌고, 문명의 중심지는 북부 저지대와 고지대로 올라갔습니다.

후고전기에는 치첸 이트사가 마야 문명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13세기 경에 인근의 대도시인 마야판에게 정복당해 약탈당한 뒤 사람들에게 버려졌습니다.

 

마야판은 치첸 이트사의 속국이었으나 1221년 즈음에 치첸 이트사의 왕과 귀족들의 학정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켜 독립해 세운 도시국가로, 온두라스와 벨리즈 지방의 북부 유카탄 반도의 대부분 지역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마야 문명의 중심지로 급부상 하였습니다.

마야판은 1448년 즈음에 가뭄과 내전, 환경변화, 전염병 등과 같은 복잡한 이유로 버려졌습니다.

이후 중소 규모의 도시들만이 남아있다가 모두 쇠퇴하였습니다.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도착한 1500년대에 이미 마야 문명은 거의 멸망한 상태였고, 몰락한 마야 문명의 잔재들은 손쉽게 제압하여 정복해 나갔습니다.

스페인 접촉기(AD 1511 ~ AD 1697)

1511년 스페인 함선이 카리브해에 좌초됐고, 몇 십여 명의 생존자들이 유카탄반도의 해안가에 표류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근 마야 도시 국가에 포획되었고, 대부분이 인신공양 제물로 바쳐졌으나, 2명은 간신히 탈출하였습니다.

1517년에서 1519년 동안 3개의 스페인 탐험대가 유카탄 해안을 탐사했으며 마야 원주민들과 국지전을 벌였습니다.

1521년에 아스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무너진 이후, 에르난도 코르테스는 페드로 데 알바라도를 과테말라로 180명의 기병, 300명의 보병, 대포 4문, 중부 멕시코에서 포섭한 수천명에 달하는 동맹군을 이끌어 보냈습니다.

1523년 마야에 도착한 알바라도의 군대는 기체 왕국을 무너트렸습니다.

인근 국가인 카크치켈 왕국이 스페인에 대한 과도한 조공 요청을 거부하였고, 스페인의 공격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1525년 마야 대도시 자클레우가 무너졌습니다.

1527년 프란시스코 데 몬테조와 그의 아들은 유카탄반도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대를 꾸리고, 1546년 유카탄반도 전체를 손에 넣었습니다.

당시 남아있던 유읽한 마야 독립 왕국들은 페텐 분지의 소규모 도시들 뿐이었습니다.

1697년 마르틴 데 우르수아가 최후의 마야 도시국가 노즈페텐을 함락시키면서 마야의 역사도 끝을 맺게 됩니다.

마야 문명의 유지와 연구

스페인 식민정부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치지 못했던 고립된 마을에서는 문명이 남아있었습니다.

마야 전통사회와 가족사회는 그 전통을 이어갔으며, 메소아메리카식 식습관도 유지하였고, 도자기, 바구니짜기, 직조 등 전통 공계도 여전히 이어졌습니다.

전통시장도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마야의 전통 신앙과 언어는 상당 기간 존속했습니다.

260일을 1년으로 하는 마야 전통 의식 달력은 과테말라 북부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수백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이 마야어를 자신의 모어로 사용하여 조상들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마야의 기록의 대부분은 스페인 선교사들이 불태웠고, 지금 남아있는 마야의 책은 다 합쳐봐야 겨우 4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현대 마야어는 고대 마야어와는 달리 로마자를 이용해서 표기합니다.

처음으로 마야 문명을 이해하려 시도한 유럽인은 '디에고 데 란다'였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선교사였던 란다는 '기독교를 포교하기 위해서는 일단 마야인들을 이해햐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마야어와 마야인들의 문화, 종교에 대해 깊이 연구했습니다.

란다는 기본적으로 마야 문명이 야만적이고 퇴치해야 할 대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기에 무려 5,000여점의 마야 유물과 몇 십여권에 달하는 책들을 불태워버렸고, 수많은 마야 귀족들과 마야인들을 과도할 정도로 투옥하고 심문하였습니다.

란다가 마야 문명권에서 활동할 당시 인신공양이 보편적 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마야 문화를 없애는데 집착했고, 그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심할 정도로 학대하고 밀어붙였습니다.

1800년대 중후반 프랑스의 골동품 수집가이자 지도제작자, 예술가, 탐험가인 '장 프레데릭 발덱'은 욱스말, 팔렝케 등의 수많은 유적들을 그려 책을 출판하였는데, 정글 속 아름다운 폐허의 모습은 당시 낭민주의 바람이 불던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발덱의 그림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와 로마 풍이 섞여 있었습니다.

1839년 '존 로이드 스티븐스'와 '프레데릭 캐서우드'는 1839년 남미의 유적들을 연구한다는 목적으로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유카탄 일대로 건너왔고, 1840년대 초반에 걸쳐 수많은 마야 유적들을 탐험하고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온두라스의 코판 유적에서 거대한 피라미드와 퀴리구아, 팔렝케, 욱스말 등을 방문해 그림을 그렸고, 이를 2권의 책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이들은 발덱과 달리 마야문명이 독자적으로 발달된 문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9세기 중반 들어 사진기라는 발명품이 등장하면서 마야학의 판도가 바뀌게 됩니다. '데지레 샤르나이'는 밀타, 팔렝케, 이사말, 욱스말, 치첸 이트사 등 유적들을 사진에 담아냈고,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경우에는 신문지를 활용해 유적들을 통째로 주형을 뜨기도 했습니다.

1946년 5월 사진작가 질르 힐리는 보남팍의 벽화를 발견하였는데, 보남팍 벽화는 마야 문명의 잔혹성을 가감없이 드러냈습니다. 벽화가 발견되기 이전 마야 문명은 별을 관측하는 신관들이 지배하는 평화로운 문명이라고 알려졌으나, 보남팍 벽화에서는 목이 잘리고 손톱이 뽑힌 포로들의 모습, 대규모 전쟁을 치르는 마야인들의 모습이 등장하여 기존의 학설이 완전히 부정되었습니다.

1949년 루스의 주재하에 파칼왕의 무덤을 발견하였습니다. 루스와 멕시코 고고학자들은 팔렝케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비문의 신전 바닥 안쪽에 있던 2개의 홈을 발견하고, 무려 3년간의 작업끝에 거대한 석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석실 안에는 거대한 석조 무덤이 자리해 있었으며, 10명의 인물상이 그려진 석판을 6명의 인물상이 받치고 있었습니다.

기중기로 석관의 뚜껑을 들어내자 안에 병 모양의 틀이 있었고, 이 틀의 뚜껑을 치우자 파칼 왕의 유해와 비취로 깎은 데스마스크를 발견하였습니다. 유해는 온통 비취 부장품들로 뒤덮여 있었는데 왕관, 펜던트, 목걸이, 가슴가리개, 팔찌, 반지등 모든 것이 비취로 만들어 졌습니다. 이 발견으로 마야의 피라미드 역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왕의 무덤으로 쓰였다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수십개의 도시 연합 중에 통치자의 이름이 남아있는 국가는 코판, 칼라크물, 믹스코 비에호, 모툴 데 산 호세, 팔렝케, 키리과, 세이발, 티칼 등입니다.

2018년 2월 과테말라 정글속에서 LIDAR 기술을 이용해 무려 60,000개 이상의 건축물이 있는 상주 인구 200,000명 규모의 거대 유적 도시가 발견되어 마야 문명의 기본적인 규모나 역사에 변화를 줄 것으로 예고됩니다.

마야 문명의 정치

 

아스텍 제국이나 잉카 제국과 달리, 마야 문명은 단 한번도 1개의 거대한 왕국이나 제국으로 통합된 적이 없으며, 각각의 도시국가들은 다양한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고전기 후기에는 거의 대부분 신정정치 구조로 통합되었습니다. 종교가 지도자를 뒷받침해주며, 복잡한 예식, 상징, 교단들이 정치와 뗄 수 없을 정도로 얽혀있는 정치 구조 였습니다.

고전기 후기에는 강력한 한 도시를 중심으로 느슨한 연맹 체제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지배 도시들은 하위 도시들에게 공물을 상납받는 방법으로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마야 문명의 사회

선고전기 이래 마야 사회는 귀족과 평민 두 계층으로 극명하게 나뉘었습니다.

왕실과 귀족 : 마야 고전기의 중심이었으며, 최고지도자 층이자 인간과 신들을 중재하는 신관들이었습니다.

마야 문명의 극초기부터 왕들은 옥수수의 신의 현신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옥수수가 당시 민중들의 주식이자 가장 흔한 생명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야의 왕실은 부계로 이어졌고, 왕위는 장남이 이었으며, 장남이 아닌 왕자들은 '촉'이라는 단어로 불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왕자에서 귀족을 칭하는 단어로 의미가 확대되었습니다.

왕위를 물려받을 장남은 흔히 '바아 촉'이라고 불렸습니다.

젊은 왕자는 성년식을 통해 성인으로 인정받았는데, 가장 중요한 성년식은 5-6살에 치르는 피의 의식이었습니다.

새로운 왕의 즉위식은 고대 마야 문명에서 가장 성대한 예식이었으며, 이 때 재규어 가죽이 깔린 왕좌, 인신공양, 왕의 권위를 물려받는 의식같은 복잡한 정차들이 이루어졌으며, 이때 왕은 옥으로 장식디고 새의 깃털이 달린 화려한 왕관을 썼으며, 신의 신성을 상징하는 홀을 들고 예식에 임했습니다.

마야 문명의 최전성기였던 고전기에는 국왕을 아하우로 불렀으며, 아하우들 중에서도 급이 높은 아하우는 칭호 앞에 쿠훌이 붙었습니다. 마야의 왕들 중 일대에서 가장 강력하거나 위대한업적을세운 후훌 아하후는 카룸테라고 따로 구분하여 불렀습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대왕 황제 정도로 바꿀 수 있습니다. 카룸테는 오직 고전기 한정으로 고전기가 마야 문명의 최전성기임을 말해줍니다.

마야의 행정조직은 오직 왕실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며, 신분질서는 대단히 엄격했고, 고위 관직들은 귀족 혈통들이 독차지하였습니다.

사할은 아하우 아래의 칭호로, 귀족 직위의 공작 정도에 해당된다. 사할은 무조건적으로 주군인 아하우에게 복종해야 했으며, 전쟁 사령관이나 지역 군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사할은 마야어로 '두려운 자' 정도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마야 귀족 사회에는 아 티즈입과 아 출 훈 이라는 직위도 있었습니다. 아 티지입은 왕실 서기였으며, 왕족들만 임명될 수 있었습니다. 아 출 훈은 고대 기록들을 보관하고 공부하는 자들로 아하우와 거의 비슷한 직위였습니다.

신관들은 대단히 중요한 존재로서 거의 왕족, 귀족계급=신관계급이었습니다. 왕국에서 가장 높은 신관들은 아하우 칸 마이 혹은 아 킨 마이라고 불렸으며, 역시 세습 제도였고, 주로 부계 계승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아하우 칸 마이는 제사, 왕에 대한 조언, 책을 쓰고 달력을 기록.전수하며 전통을 후대에 전승하는 것이었습니다. 신관이 조언자와 학자의 역할을 겸했던 것입니다.

마을의 지역 사제들은 아 킨(신성한 자) 이라고 했습니다. 달력의 날자를 잘 보고 마을 축제를 주관하거나 지역 질서를 유지하는 게 주 업무였습니다. 아 킨은 착이라고 불리는 4명의 나이든 원로들이 보좌했습니다.

인신공양을 직접 행하는 신관은 나콤이라고 해서 따로 있었는데 이들의 지위는 높지 못했습니다.

예언을 하는 신관들은 칠란이라 불렸는데, 이들은 특별하다고 여기져서 지위가 매우 높았습니다.

평민 : 거의 90% 달하는 인구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평민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습니다.

평민들의 주택과 가옥들은 대부분 썩기 쉬운 나무와 짚 등으로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관련된 유물조차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평민들은 가난한 농부에서 부유한 상인들, 장인들, 몰락한 옛 귀족들까지 범위에 들어갔으며, 생산활동을 장려받으며, 사치품까지 생산하였습니다. 또한 귀족에게 세금을 바쳤습니다.

마야문명의 어린이들은 15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보편적으로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승계하였습니다.

마야 문명에서는 사팔뜨기일수록 미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사팔뜨기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했습니다.

이마가 평평할 수록 신성한 대접을 받아서 두개골이 유연한 영유아 시기에 이마 위에 무거운 물체를 올려놓아 머리를 기형적일 정도로 평평하게 만들어놓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편두 풍습은 마야 문명뿐 아니라 전세계에 있었습니다.

마야인들은 한 집에 부모와 자식 2세대만 함께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 가옥은 원룸형식으로 내부에 방이 하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입에 옥수수를 물리고 그 안에 작은 옥 구슬을 넣었습니다. 옥수수는 사후세계의 죽은자를 위한 음식이었고, 옥 구슬은 그 여정에 쓸 화폐였습니다.

마야 문명의 전쟁

전쟁은 마야 문명에서매우 흔했고, 교역로 확보, 전쟁 포로 확보, 상대 도시국가 파괴를 명목으로 행해졌습니다.

마야의 고전기 예술품들에서는 전쟁을 묘사한 것들이 매우 많으며, 전쟁과 승리, 왕의 영광 등을 묘사한 상형문자 비석들도 넘쳐납니다.

마야의 왕과 귀족들은 전쟁이 터지면 최전선으로 나가 싸워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기면 최고의 대우를 받아 전리품도 가장 좋은 걸 가져갔지만, 패배한다면 타국에 충성을 맹세해야 했고, 최악의 경우 타국에 끌려가 고문당하거나 제물로 바쳐지기도 합니다.

마야 도시들의 평균 간격은 약 55km로 약 2~8일 행군해야 되는 거리로, 험난한 정글을 뚤고 소나 말 같은 대형 가축도 없는 메소아메리카 였던 만큼, 대다수의 전투는 양측이 약 500~1000여 명 정도의 규모 였으며, 1000여명이 넘어가면 국운을 건 전면전으로 여겨졌습니다.

전투 방법은 전사들이 멀리서 투창 '아틀라틀'을 던져 적진을 교란시킨 다음, 전속력으로 달려가 근거리에서 칼과 창 등으로 교전하였습니다. 화약의 존재를 몰랐기에 총이나 대포 같은 화약 병기들은 아예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고전기 초기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 지방에서 투창 '아틀라틀'이 마야 문명권에 유입됩니다. 아틀라틀은 대략 1.5m 길이의 짧막한 투창인데 끝에 흑요석이나 처트로 날카롭게 만든 창날이 달여있어 던지기에 유용했습니다.

스틱이나 돌팔매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활과 화살과 같은 장기리 무기들도 존재했으나 선호도는 높지 않았고, 후고전기 들어서야 전장의 주요 무기로 쓰입니다.

근접전을 벌일 때에는 나무에 흑요석 조각들을 박아넣은 양손검을 썼습니다.

면을 소금물에 담궈 단단하게 만든 형태의 갑옷을 입기도 했고, 전사들은 깃털과 동물 가죽으로 덮어씌운 독특한 형태의 방패를 들고 다녔습니다.

8~9세기 지나친 내전과 전쟁이 결국 페텐 저지대 서부의 왕국들을 모두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전쟁에서 죽인 사람의 머리를 허리에 차기도 하고, 사로잡힌 포로를 고문, 모욕, 처형,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이 흔하였습니다.

마야 문명의 경제

마야 문명권에 속한 수많은 도시들이 서로 교류하거나 멕시코 도시들과 교육을 진행하였습니다. 교류가 편리한 교역로 한가운데 있는 도시들은 중간에 통행세를 받으며 부를 쌓았습니다.

치첸 이트사는 콜롬비아와 파나마에서 황금을 수입했고, 뉴멕시코에서 터키석을 수입하는 대신 노예나 작물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었습니다.

마야 문명 극초기까지만 해도 마야인들은 자급자족이 가능했기 때문에 무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선고전기 들어 거대한 도시들이 등장하고, 엘 미라도르나 티칼처럼 인구가 몇 만이 넘어가는 국가가 세워지면서 점차 무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마야인들의 무역에서 가장 큰 축을 담당하는 물품은 소금이었습니다. 생존에 필수였고, 식량 저장에도 유용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소금은 유카탄 반도 북부의 거대한 염전에서 바닷물을 말려 천일염을 제조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고전기 초기 45,000여 명의 인구를 보유한 도시였던 티칼에서는 연 131.4톤에 달하는 소금을 소비했습니다.

도자기와 가구 등이 유통되는 일도 잦았습니다. 부자나 귀족들은 도시의 예술가나 장인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해주는 대신 그 대가로 가구나 장신구, 도자기들을 받았습니다.

바깥 도시에 실력 좋은 장인이 있다면 그에게도 돈을 주고 의뢰를 넣었는데, 이 과정에서 무역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가장 많이 거래됐던 물품은 접시나 화병, 원통형 술병이었습니다. 이런 도자기들은 사치품에 속해서, 금색이나 붉은색 같이 강렬한 색상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마야의 최고 사치품은 주로 옥, 금, 흑요석, 카카오가 있었습니다. 옥은 정말 희귀해서 과테말라 고지대로부터 비싼값을 주고 사왔습니다. 왕관이나 신상처럼 가장 중요한 기물은 옥으로 만들어졌고 금보다 높게 대접받았습니다.

흑요석은 칼, 도끼, 예식용 기물, 조각상, 구슬, 장신구 등 다양한 물건들을 만드는 데 쓰이는 매우 귀중한 광물이었습니다.

귀족들은 테오티우아칸에서 수입해온 녹색 광택이 나온 희귀한 흑요석을 따로 쓰면서 지위를 과시하였습니다.

카카오는 '신의 선물'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귀한 작물이었고, 화페처럼 쓰이기도 했습니다. 종교제례에나 간간히 먹을 수 있는 최고급 사치재였습니다. 주로 과테말라 저지대에서 유통되었습니다.

마야의 무역로는 대단히 위험했습니다. 도적떼와 맹수들이 출몰하였기 때문에 상인들은 몸을 검게 칠하고 중무장을 한 채로 다녔습니다. 짐을 나를 동물이 없었기에 모든 짐은 짐꾼이 직접 지었고 육로는 걸어가고, 강이나 바다가 나오면 카누에 짐을 싣고 가기도 했습니다.

도시에는 고정된 시장판이 존재해서 돌로 된 아케이드에 노점이나 가판을 차려 제품을 사고팔 수 있었습니다.

마야 문명의 예술

마야의 예술은 기본적으로 왕실 문화에 가깝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예술품들이 대부분 엘리트 위주의 물건들이었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예술품들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은 고전기 후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야인들은 푸른색과 초록색을 선호하였으며, 초록색과 푸른색을 같은 단어로 불렀습니다. 푸른색 옥과 녹색 보석들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으며, 이를 태양신 키니트 아자우에게 연관시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옥을 사용하여 구슬들, 4.42kg에 달하는 조각상들, 타일들을 깍아냈습니다.

팔렌케의 왕이었던 '키니트 자납 파칼'의 묘에서는 왕의 시신이 옥으로 만들어진 데스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 발굴되기도 하였습니다.

치첸 이트사의 피라미드 방 안에서 발견된 재규어 왕좌 역시 붉은 사암으로 만들고 거기에 옥으로 만든 눈을 박아 만들었습니다.

현재까지 남은 마야 예술품들 중 가장 유명한 건 당연히 수많은 석조 부조와 돌조각들입니다. 이 석조 유물은 크게 '석비', '상인방', '판넬', '제단', '의례용 계단','왕좌' 등이 있습니다.

마야의 돌 조각상들은 이미 완벽한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초기 나무 조각들은 마야의 열대 우림 기후에서 워낙 썩기가 쉽기에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나무 조각들에는 상형문자 판넬조각, 입체조각 등이 있습니다.

마야의 석비는 도시 유적들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대부분은 둥글고 낮은 제단 같은 돌과 한 쌍을 이루어 세워져 있습니다. 코판, 티칼, 팔렝케, 칼라크물 등 웬만한 대도시라면 무조건 수십여 개는 세워져 있을 정도로 그 수가 많습니다.

펠렌케와 같은 지방에서는 석회암으로 만든 벽 장식 조각들이 발굴되었으며, 약스칠란, 도스 필라스, 코판과 같은 지역들에서는 화려한 돌 조각들로 장식된 계단들이 발견되기도 하였고, 코판에서 발견된 계단에는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상형문자 텍스트가 붙어 있습니다. 모두 2,200여 개가 넘는 상형문자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마야의 가장 거대한 돌 조각상은 건물 외면에 붙어있는 스투코 피사드입니다. 이 피사드 조각의 기본 판은 평평한 석회암 표면 위에 놓였으며, 조그만 돌들을 사용하여 정교한 조각들을 붙여넣었습니다. 이후 스투코를 사용하여 마감처리하였는데, 인간 조각상의 경우 몸체를 먼저 만들로 그 위에 의상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색을 칠해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선고전기 후기부터는 거대한 조각상 머리들을 깎아 신전들을 장식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행은 고전기 후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산 바르톨로에서는 기원전 300년과 200년 사이에 제작된 화려한 색의 벽화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마야 건축물들의 벽들은 부드러운 벽토로 덮여있는데, 마야인들은 이 매끄러운 벽토 위에 염료를 섞어 벽화를 그렸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벽화는 파괴되었거나 열대의 습하고 더운 환경으로 인해 훼손되어 찾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카라콜, 티칼 등에서는 크림색, 붉은색으로 칠해진 벽화들 몇 점이 발굴되었으며,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벽화는 보남팍에서 발견된 보남팍 벽화입니다.

거대한 흑요석 조각은 그 길이가 30cm가 넘고, 거의 대부분은 인간과 동물, 마야 종교와 관련된 기하학적인 모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깍아놓은 수석은 초승달, 전갈, 뱀과 같이 다양한 모습들을 하고 있으며, 현재가지 발견된 가장 괴상하고 복잡한 모양의 수석은 거대한 인간 머리들의 모여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마야인들의 직물은 아스텍 제국이나 잉카 제국의 유물들에 비해 극히 적습니다. 이 때문에 유물의 가치는 매우 높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도자기나 벽화에 그려져 있는 모습으로 옛 직물이나 의상을 모습을 추측하는데, 마야의 왕족들이 솜으로 된 화려한 옷들을 입고 있으며, 재규어 가죽이나 사슴 가죽을 걸치고 있다고 추측합니다.

도자기는 마야 예술에서 가장 흔한 유물입니다. 대부분이 둥글레 말은 진흙 링들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가는 방식으로 도자기를 만들었습니다. 마야 도자기는 유약이 칠해져 있지 않으나, 때로 불에 구워 매그럽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도자기 위에는 광물과 염료들을 섞어 만든 물감으로 장식을 넣었습니다.

옛 마야의 도자기 굽는 기술은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습니다.

자이나 섬의 마야 무덤에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도자기 인형이 출토되는데, 이 인형의 높이는 10~25cm로 모두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졌습니다.

마야인들은 도자기로 관도 만들었고, 그 외에도 접시나 용도가 밝혀지지 않은 원통형의 물체도 만들었습니다.

도자기들에는 대부분이 핑크색이나 붉은색으로 칠해진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으며, 마치 살아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묘사가 특징입니다. 주로 왕족들의 생활, 외교적 임무,축제, 전쟁, 인신 공양 등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뼈도 흔한 조각품 재료였습니다. 인간의 뼈는 전쟁 포로의 것이거나, 조상의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마야인들은 스폰딜루스 조개를 신성시했는데, 조개의 백색 겉면과 가시를 제거한 다음 오렌지빛 본체를 드러내개 하여 사용하였습니다.

10세기에 이르러 중미에서 금속 제련 기술이 전래되었고, 이 때부터 마야인들은 황금이나 은, 구리들을 사용하여 구슬, 원반, 종 같은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마야 문명의 건축

 

마야인들의 건축술은 상당히 뛰어났습니다. 수많은 도시 유적을 남겼으며, 벽과 계단들에 상형문자를 새기고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도시 : 마야의 도시들은 계획도시가 아니고 틈이 날때마다 팽창을 반복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중심부에서 뻗어나가는 형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몇몇 건물들은 중요한 건물위에 새로운 건물을 덧씌우는 방법으로 도심을 재건축하기도 하였습니다.

마야의 도시들은 중심에는 공적이나 상징적인 궁전들이나 신전이 자리했으며, 그 주위를 거대한 주거 지역이 둘렀습니다. 도심 일부는 신성한 지역으로 벽으로 주거지역과 구분하였으며 이 지역에는 피라미드들이나 엘리트층에게 바쳐진 왕궁들이 있었습니다.

도시 한가운데는 광장과 시장, 성스러운 공놀이 경기장, 학교 등이 있었습니다.

도시 최고 중심지에는 지배계층이 살고 있었습니다. 최고 입지를 독차지하였습니다.

건축재료 : 대부분 나무와 돌을 사용하여 집과 신전을 지었고, 석회암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야 지역의 석회암들은 채석 당시에는 상당히 부드러워 조각이 용이하고 건축하기도 쉽지만, 공기에 노출되고 비를 맞으면 점차 단단해지는 특성이 이었습니다.

우슈마신타 지역의 석회암 질을 최고로 쳤고, 북부 유카탄반도는 그 질이 유달리 나빴습니다. 코판에서는 석회암을 썼고, 퀴리구아는 사암을 사용했습니다. 돌이 없는 곳에서는 벽돌을 구워 사용하였습니다.

마야인들은 바퀴의 존재를 몰랐기에 재료를 옮길 때 통나무를 굴려 이동하거나 카누, 밧줄 등을 이용해서 옮겼습니다.

나무는 주로 축대나 대들보로 쓰였습니다.

건축양식 : 대부분의 마야 도시들은 크게 피라미드 신전, 궁전, 공놀이 경기장, 석조 보도, 광장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어떤 도시들은 수로시스템과 성벽들도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건물들의 외관은 붉은색, 노란색, 자주색 등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그들 중에서도 중요한 건물들은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왕궁 : 왕궁들은 보통 마야 도시의 한가운데, 공공 광장의 옆쪽에 위치합니다. 건물 안에는 방들이 상당히 많으며, 탄탄한 석조 기반 위에 지어져 있습니다.

마야 문명에서 '아크로폴리스'란 다양한 높이의 기반들 위에 지어져 있는 건물군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건물들은 대부분 지배계급의 거주지로 쓰였습니다.

신전을 수직으로 높게 쌓아올리는 것과 반대로 왕궁은 수평적으로 낮고 넓게 확장했으며,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였습니다.

왕궁의 방들에는 돌로 된 의자들이 있었으며, 커튼을 달았던 구멍들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팔렌케에 있던 거대한 궁전들은 물 공급 장치도 있었고, 증기 목욕탕도 있었습니다.

고전기 초기 이래 지배자들이 죽으면 그들이 살던 왕궁 아래에 묻기도 했습니다.

피라미드 신전 : 마야어로 '쿠나'라고 불렀으며, 신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단을 쌓아올린 제단 위에 건설되었고, 대부분 피라미드 형태입니다.

선고전기 후기에 가서야 신전이 돌로 건축되었으며, 맨 위에 지붕 장식물이 생겨났습니다. 신전 내부에는 2~3개의 방들이 있으며, 중요한 신들에게 각각 바쳐졌습니다.

독특한 것은 피라미드를 새로 증축할 때에는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존의 피라미디 위에 새로운 피라미드를 덧씌워서 지었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마야의 피라미드 대부분은 벽면 아래에 옛날에 지어진 더 크기가 작은 피라미드들이 겹겹이 들어있는 구조입니다.

전성기 시절 마야의 피라미드에는 신성한 색인 붉은색 염료가 칠해져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으며, 꼭대기의 빗돌 장식물에도 푸른색, 초록색, 붉은색, 금색 등 다양한 색들이 입혀져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이 정밀한 기술력이나 계산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피라미드 내부에는 왕들이나 귀족의 무덤이 많았으며, 대표적인 것이 팔렝케 유적의 파칼 왕의 무덤입니다. 무려 68년을 장수하면서 팔렝케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었습니다. 파칼 왕의 무덤은 마야 고고학 역사상 최대의 발견으로 인정받습니다. 보존이 매우 잘 되어 있었으며 도굴도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E-그룹과 천문대 : 마야인들은 천문관측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으며, E-그룹은 마야 지방에서 자주 발견되는 E자 모양의 신전들을 일컫는 말로, 우삭툰의 신전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습니다.

3개의 작은 건물들이 본 건물에 연달아 붙어있는 형식이며, 각각 일식과 월식을 나타냅니다.

광장의 서쪽지역에 지어졌고, 사방을 방위에 정확히 맞춘 계단식 피라미드 모양의 건물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면, 태양이 도시의 경관 너머로 뜨고 지는 모습을 확연하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장 오래된 신전들은 선고전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3중피라미드 : 선고전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단일한 거대한 석조 기반 위에 1개의 주 신전 양옆으로 2개의 작은 부속 신전이 세워져 있는 형태의 피라미드입니다.

가장 오래된 3중 피라미드는 엘 미라도르에서 발견된 것으로, 티칼의 가장 거대한 피라미도보다 6배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3중 피라미드는 선고전기 페텐 분지의 주된 건축 양식으로, 거의 88개가 넘는 유적지에서 3중 피라미드의 유적이 발굴되었습니다.

옛 도시 나크베에는 12개가 넘는 피라미드들이 있으며, 도시에서 가장 거대한 4개의 건축물들이 모두 3중 피라미드 양식을 하고 있습니다.

공놀이 경기장 : 마야 지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건축물입니다. 고전기 이래 마야 도시들에서 거의 대부분 발견되며, 가장 오래된 것은 북부 유카탄반도에서 발견된 것으로 선고전기인 기원전 1000년에 지어졌습니다.

공놀이 경기장은 중앙에 경기장이 있고 그 양 옆으로 벽이 있는 I자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이 벽은 공놀이 경기장의 범위를 정하고 관중들이 앉아 경기를 관람하기도 하였습니다.

치첸이트사에서 발견된 대 공놀이 경기장이 마야 문명 유적들 가운데 가장 그 규모가 크며, 길이는 83m이고 너비는 약 30m입니다. 양 옆의 벽은 약 8.2m입니다.

마야인들의 건출물의 내부는 그 거대한 크기와 달리 매우 협소한 편인데, 건축술이 발달하지 못해 아치의 개념을 몰랐던 탓이 컸습니다. '코벨 아치'라는 방법을 사용해 천장을 지탱하였습니다. 코벨 아치는 벽에서부터 비스듬하게 돌들을 쌓아 천장에서 만나 맞대어 서로 지지하게 만드는 형식의 지지 방식으로, 아치보다 더 불안정하고 만들 수 있는 내부 공간도 훨씬 적었습니다.

마야 문명의 의복

마야 문명이 위치한 유카탄 반도 지방은 굉장히 찌는 듯이 덥고 습한 열대우림 지역입니다. 때문에 제대로 옷을 입고 다니지 않았으며, 평민 남성의 경우 아랫도리만 가리는 천을 둘렀고, 고위층들은 그 위에 화려한 깃털 망토나 돌로된 발찌와 팔찌처럼 장신구들을 두르는것이 정석이었습니다.

마야의 국왕들은 매우 요란하게 입고 다녔습니다. 신성한 동물인 재규어의 가죽으로 된 망토를 두르고 다녔고, 보석과 옥, 알록달록한 깃털로 만들어진 왕관을 썼으며, 사슴과 영양 모양의 장식들이 붙어있는 팔찌나 발찌 등을 찼습니다. 또한 이마에는 옥이나 조개로 장식된 하얀 띠를 둘렀는데, 이는 악신들을 물리치고 선의 승리를 이끈 신화 속의 쌍둥이 형제들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각종 색색의 보석들을 온몸에 두르고, 왕권을 상징하는 홀이나 거대한 도끼를 들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왕을 포함한 귀족들은 온 몸에 붉은색, 백색, 검은색 염료로 문양을 그리고 다니기도 했는데, 이 문양은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는 목적이었습니다.

고전기 마야 사회에서는 머리장식에 신경을 매우 많이 쏟아서 화려한 관이나 동물 박제를 머리에 얹고 다니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콧대위에 라텍스나 수지로 만들어진 보형물을 덧씌우기도 했으며, 귀에는 거대한 귀걸이를 했습니다.

신발은 갈대나 풀, 가죽 따위를 엮어 만들었습니다. 습기가 많은 마야 문명권 특성상 슬리퍼 형태의 신발들을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마야 문명의 언어

기원전 2000년 즈음에는 모든 마야인들이 동일한 마야조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서부 혹은 과테말라 고지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됩니다.

선고전기에 마야 부족들에 따라 점차 갈라졌으며, 이후 와스텍어파, 유카텍어파, 촐.첼탈어파, 칸호발.추흐어파, 키체.맘엄파 등이 새롭게 생겨났습니다. 현대에 약 30개의 언어들로 갈라졌습니다.

고전기 마야의 비문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부분의 언어는 고전 마야어라고 부릅니다. 마야 문명의 엘리트들만 사용했던 일종의 특별한 언어로 추측되며, 유럽의 라틴어와 유사한 언어로 추측됩니다.

마야족의 조상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작은 부족으로 이들이 남진해서 기원전 3000년대 중반에 서부 과테말라 고지에 정착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후 1000년 사이에 이 부족이 두 어족으로 갈라져 하나는 북서로 진출하여 멕시코만 연안의 와스텍어파를 형성하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 나아가 페텐저지에서 유카탄지방에 이르러 유카텍어파가 되었습니다.

마야 문명의 수학

타 메소아메리카 문명과 같이 마야 문명은 20진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기원전 1000년에 점과 선을 사용하여 숫자를 표시하는 체계를 확립되었고, 선고전기 후기에 0을 나타내는 기호를 새롭게 추가하였습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처음으로 0이라는 기호를 숫자체계에 포함시킨 사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마야인들이 비석에 새긴 0을 의미하는 기호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357년에 만들어 졌습니다. 초기의 0은 마야의 달력에서 위치 기수법을 통해 날짜를 나타낼 때 주로 쓰였으며, 이 것이 나중에 계산으로 확장되어 진정한 0의 개념이 만들어졌습니다.

점1개는 1을 의미하고, 선1개는 5를 의미합니다. 선고전기 이래로 0은 조개껍데기 모양을 사용하여 표시하였습니다.

마야 문명의 달력

마야인들의 달련은 선고전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마야인들은 달력을 철학적인 개념에서 접근했으며, 달과 태양의 공전, 자전 주기를 기록하고 일식과 월식 등을 관찰, 행성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측정해내어 달력에 집어넣었습니다.

마야의 달력은 매우 정확하였고, 마야의 의식과 밀접한연관이 있었습니다. 마야의 신관들은 달력 공부를 최우선 업무로 여겼습니다.

마야의 달력은 3개의 다른 체계로 이루어 졌습니다.

첫째는 제례용, 의식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촐킨'으로, 260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60일로 이루어진 트졸킨은 마야 예식, 예언서의 기본을 이룹니다.

각각 20개씩 나뉘었고, 이 13개의 묶음들은 모두 특정한 이름이 붙어져 특별한 신들이나 제사에 봉헌되었습니다.

두번째는 '하아브'로 불렀으며, 365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아브는 20일의 위날 18묶음, 그리고 거기에 5일을 더 추가하여 만들어 졌습니다.

마지막은 52년 주기로 이루어지는 달력으로, 트졸킨과 하아브가 합쳐져 만들어졌습니다.

트론킨과 하아바를 잘 조합하면 52년마다 정확히 같은 명칭의 날이 나오게 되는데 이를 한주기로 삼아 시간을 측정하였습니다.

마야 달력의 기본 단위는 하루입니다. 이를 '킨'이라고 불렀고, 20개의 킨이 모여 '위날'이라는 새로운 단위를 이루었습니다. 다음으로 18개의 위날이 모여 360일을 만들었고, 이 360일을 합쳐 '툰'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래 표는 마야 달력의 단위들을 표시한 것입니다.

주기
계산
일수
연수(대략적인 측정값)
1 일
1일
위날
1 x 20
20일
18 x 20
360일
1년
카툰
20 x 18 x 20
7,200일
20년
박툰
20 x 18 x 20 x 20
144,000일
394년
픽툰
20 x 18 x 20 x 20 x 20
2,880,000일
7,885년
칼랍툰
20 x 18 x 20 x 20 x 20 x 20
57,600,000일
157,700년
킨칠툰
20 x 18 x 20 x 20 x 20 x 20 x 20
1,152,000,000일
3,154,004년
알라우툰
20 x 18 x 20 x 20 x 20 x 20 x 20 x 20
23,040,000,000일
63,080,082년

마야인들은 그들의 달력이 이전 '박툰'의 끝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한다고 믿었는데, 이 시기는 약 기원전 3114년이다. 마야인들은 이 시기를 세상이 현재의 모습으로 창조된 날짜라고 믿었습니다.

마야 문명의 천문학

마야인들은 천문이 신의 뜻을 해독할 수 있는 열쇠라고 믿고 이를 열심히 탐구하였습니다. 그들은 꾸준하게 태양, 달, 금성, 별들의 위치를 기록했으며, 이 정보들은 대부분 점성술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야인들은 과학적인 이유로 우주를 연구하지는 않았고, 농사 주기를 알아내기 위해 하늘을 관측하지도 않았습니다.

천문학은 대부분이 사제들을 위하여 과거의 시대에 대해 자세히 알아내기 위한 용도로 쓰였으며, 이를 토대로 미래를 예측할 예언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용되었습니다.

사제들은 일식과 월식 등을 돌에 새겨 남겼으며 특정 별들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마야 기록에 따르면 사제들은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고 맨눈으로 별들을 관측하고 막대기를 이용하여 정확성을 기했습니다. 후고전기 마야인들은 이미 대부분의 천문 현상들을 관측하였고, 동시대의 유럽의 것들보다도 더 정확하게 관측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마야인들은 금성과 지구의 회합주기를 단 2시간의 오차범위 내인 584일로 정확히 계산하였습니다. 금성이 샛별로 떠오를 때를 부활의 상징으로, 금성이 신출했을 때는 파괴와 재앙의 신호로, 금성이 자신들에게 이로운 위치에서 전쟁을 하였으며, 전쟁 포로들을 바치는 방식으로 행운을 기원했습니다.

마야인들은 목성, 수성, 화성 등 눈으로 보이는 태양계의 위성들을 대부분 관찰하였습니다.

일식과 월식은 세계의 멸망을 불러오는 극히 위험한 징조로 보았습니다. 드레스덴 코덱스에 의하면 일식은 태양을 삼키는 뱀의 형태로 인식되었고, 상형문자로는 먹혀가고 있는 태양이나 달의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마야 문명의 종교

마야인들은 초현실세계의 존재를 상징적인 예식들과 제물들을 통해 만족시켜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야 예식의 핵심에는 죽은 조상들에 대한 경배가 있었는데, 후손들을 초현실적인 힘으로 돌보아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초기의 형태가 샤면이었고, 마야의 의식에는 대부분의 경우 사제들이 환각을 사용하여 신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수련을 많이 섭취하였습니다.

권력층들은 종교적인 제사를 자신들의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도구로 확립하였으며, 선고전기 후기에는 왕권신수설과 비슷한 단계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왕은 '쿠훌 아저우'라고 불리며 종교적인 힘과 세속적인 힘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야인들의 우주관은 13개의 층이 있는 천상계와 9개의 층이 있는 지하계, 그 사이에 지상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각각의 층들은 정확한 방위들로 나뉘었습니다.

마야는 사방색을 가지고 있었는데 북쪽은 흰색, 남쪽은 황색, 서쪽은 검은색, 동쪽은 붉은색이었다. 대부분의 주요 신들은 이 방위들과 색깔들과 연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마야인들은 죽은 가족들의 시신을 그에 걸맞는 부장품들과 함께 집 바닥 아래에 묻었습니다. 이렇게 해야 가족들을 잘 보살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야 사회는 부계중심 사회로 오래된 남자 조상들이었고, 마야 사회가 발전하고 엘리트층의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선조들의 무덤은 거대한 피라미드들로 발전하였습니다.

고전기 초기에 쓰인 상형문자 비석에는 극도로 복잡한 종교 의식들에 대하여 쓰여있고, 이에는 천문관측, 달력연구, 역사와 신화 공부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제들이 주관한 행사에는 축제, 잔인한 사형식, 제물 바치기, 음악, 춤 등이 있었으며, 가끔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고전기 시대에는 도시의 왕이 최고 사제직을 겸했고, 신들과 인간들을 직접적으로 잇는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후고전기에는 신상과 그림들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해젔고, 인간 제물 의식이 더 흔하게 행해졌습니다.

마야 문명의 인신공양과 식인풍습

인간의 피는 마야의 신들에게 매우 중요한 제물로 여겨졌습니다. 살아있는 인간을 죽여 그 피를 신에게 바치는 것은 마야의 가장 중요한 종교 행사들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보통 전쟁에서 잡혀온 타국의 높은 직위의 귀족이나 왕족 포로들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사원을 신에게 봉헌하는 행사나 새 왕의 즉위식과 같은 중요한 의식들에는 보통 인신공양이 행해졌습니다. 상대 적국의 왕을 죽여 바치는 것이 가장 그 격이 높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포로로 잡힌 왕에게 신과 같은 복장을 입힌 뒤 목을 쳐 죽였다고 하며, 당시 옥수수의 신이 죽음의 신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믿었던 당시의 마야 신화를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기원후 738년 퀴리구아의 왕 '칵 틸리우 찬 요팟'이 코판의 왕 '우바 카이이'를 사로잡아, 그를 단숨에 죽이지 않고 한참동안 모욕하고 놀린뒤 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신공양 의식은 고전기 마야 예술에서 매우 흔하게 찾아볼 수 있으며 보통 포로들이 구타 당하거나 화상을 입히는 등 고문을 당하는 것들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마야의 한 신화에서는 한 쌍둥이 영웅들이 지하세계의 신들을 상대로 공놀이 경기를 하여 승리를 쟁취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 과정에서 쌍둥이들 중 하나가 목이 잘리는 내용이 있으며, 마야인들은 이같은 신화를 충실히 반영하여 공놀이 경기에서 진 상대편 선수들을 목을 잘라 신들에게 바쳤습니다.

후고전기 시대 동안 가장 흔한 방식의 인신공양 방법은 가슴을 갈라 심장을 적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멕시코 계곡의 아스텍 제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로 피라미드의 꼭대기나 신전의 마당에서 행해졌습니다.

어떠한 의식들은 제물로 바쳐진 시체의 껍질을 벗겨 사제가 그 가죽을 뒤집어 쓰고 춤을 추어 신들을 경배했다고 합니다.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적어도 고전기 이래부터 이 인신공양 의식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벨리즈의 어느 인신공양 동굴에선 9,566개에 달하는 어린이의 뼈가 발굴되었는데, 분석 결과 최소 114명의 어린이 노예들이 83조각으로 토막난 채 인신공양을 당했다고 합니다.

치첸 아트사에선 127명의 어린이 뼈가 나왔고, 세노테 사그라다에서는 200명의 어린와 처녀의 뼈가 나왔습니다.

아즈텍에선 6~7세에 해당하는 어린이들의 손톱을 뽑아 틀락록에게 바치는 끔찍한 풍습이 있었는데, BBC의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마야에선 한 살도 안 된 어린이를 참수해 인신공양하거나 6살 꼬마의 얼굴가죽을 도려내는 등 온갖 잔혹한 아동학대가 펼쳐졌다고 합니다.

마야 문명의 신

마야 신화에는 매우 많은 수의 신들, 초인적인 존재들, 신성들이 등장합니다.

이참나는 마야의 창조신으로, 우주 그 자체이기도 했으며 태양신이기도 했습니다. 낮의 태양신인 '키니크 아하우'는 그의 분신이었습니다.

마야의 왕들은 스스로를 키니크 아하우와 동일시했습니다.

이참나는 '밤의 재규어'라는 이름의 밤의 태양신으로서의 분신을 갖고 있기도 했는데, 이는 태양이 밤동한 어두운 지하세계를 지나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네명의 바캅(마야의 신의 이름)들이 인간계의 모서리를 떠받쳤으며, 또다른 네 명의 바캅들이 천상계를 떠받쳤습니다.

'착'이라는 이름의 신들은 천둥을 관장했는데, 비, 천둥, 번개와 같은 기상현상들을 다루었습니다.

9명의 지하세계의 신들은 지하사계를 9등분으로 나누어 가각 1개씩 다스렸습니다.

또다른 중요한 신들은 옥수수의 신, 영웅 쌍둥이 등이 있습니다.

포풀 부흐는 식민지 시대 초기에 쓰여진 키체어.스페인어 필사본으로, 마야의 귀족이 쓴 상형문자문을 번역하여 작성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계의 창조 과정, 두 영웅 쌍둥이들의 모험, 후고전기 키체 왕국의 연대기 등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포풀 부흐는 현재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마야 시대의 기록물들 중 하나로, 귀중한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른 메소아메리카 문명들과 비슷하게 마야도 깃털달린 뱀신을 숭배하였습니다. 후고전기에 이르자 과테말라 고지와 유카탄반도 전체에서 숭배 의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유카탄반도에서는 종종 뱀신 쿠쿨칸이 숭배되었으며, 쿠쿨칸 숭배는 중앙아메리카의 케찰토아틀 숭배에서 본딴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마야 문명의 농사

마야인들은 열대우림 기후에서 다양한 농사법들을 개발하여 곡물을 수확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마야인들은 테라스식 농경, 상승지, 집중적인 관리, 정원 등의 복합적인 시스템을 사용하여 고전기 시기의 막대한 인구를 먹여살렸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옛 방법들은 아직까지도 관찰가능한데, 예를 들어 흙을 쌓아올려 토지의 높이를 상승시켰던 인공운하는 아직도 위성사진으로 판별이 가능합니다.

호수에 침전된 퇴적물들을 발굴 조사해본 결과, 마야인들은 주로 옥수수, 카사바, 해바라기 씨앙, 솜, 그 외의 다른 작물들을 키워 먹었습니다.

열대우림들의 불탄 자국들을 토대로 추측해 볼 때, 이 작물들은 적어도 기원전 2500년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야인들의 주식은 옥수수, 콩, 호박류였습니다. 그 외에도 숲이나 정원에서 기른 다양한 종류의 채소나 과일도 곁들여 먹었습니다.

한 마야의 도시는 그 주변 지대를 모두 뒤덮은 거대한 화산재 분출로 인해 현대까지 마야인들의 가옥이 고스란히 보전되어 있는데, 가옥 안의 음식 보관소에서는 칠리 고추와 토마토도 발결되었습니다.

가옥 안에서는 솜 씨앗을 갈고 있었는데, 기름을 짜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기본 주식 작물들 외에도 카카오, 바닐라, 솜과 같은 기호식품들로 재배했고, 이들은 상당히 귀해 오직 엘리트층들만 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카카오는 워낙 귀중하여 오직 왕들이나 사제들만 초콜릿 음료의 형태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솜은 귀중한 작물로 만들어져 무역에 주료 쓰였습니다.

마야인들은 가축도 키웠는데 기원전 3000년 즈음에는 개를 사육했으며, 후고전기 후기에는 오리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마야 지방에서 서식하는 조류인 구슬칠면조는 가축화에 적합하지 않았기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숲에서 잡아와 가둔 후 먹이를 주고 강제로 살을 찌우는 방법으로 키웠습니다.

마야 문명의 식생활

옥수수가 주식이며, 콩과 호박 역시 매우 중요했습니다.

옥수수는 마야 문명의 습한 기후에 잘 자랐을 뿐 아니라 보관하기 편하고 요리하기도 용이 했습니다. 마야인들은 신들이 옥수수 가루로 반죽을 빚어 인간을 창조했다고 여겼습니다.

옥수수 신은 마야 문명권에서 가장 중요하게 숭배되었던 신들 중 하나였으며, 마야 사회는 기본적으로 옥수수의 성장과 수확을 바탕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외에 토마토, 칠리 페퍼, 아보카도, 구아바, 사워솝, 파파야, 파인애플, 고구마, 카사바도 즐겨 먹었습니다.

마야 문명에서 유래한 가장 유명한 음식은 초콜릿으로 고대 마야인들이 카카오를 재배한 최초의 사람들입니다. 부유층들은 코코아 콩을 갈아 칠리 페퍼, 옥수수 가루, 꿀 등을 섞어 '쇼콜라틀'이라는 독특한 음료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마야인들은 고기를 먹기위해 주로 사냥하였고, 사슴, 서인도제도매너티, 아르마딜로, 맥, 페커리, 원숭이, 기니피그, 거북이, 이구아나 등 정글에서 잡을 수 있는 동물들은 모두 잡아 먹었습니다. 그중 흰꼬리 사슴을 가장 즐겼습니다.

해안가에 거주하는 마야인들은 바닷가재나 새우, 소라 같은 해산물들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마야인들은 '펫 콧'아라고 불리는 형태의 농경지와 작은 정원을 이용하여 작물을 생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