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사건사고

정화의 대원정

정화의 대원정

정화의 원정을 중국어로는 '하서양(下西洋)'이라고 합니다. 서쪽을 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05년 ~ 1433년 사이 7번의 원정을 말하며 남중국해,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의 해안까지 다녀오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영락제 재위시 6번, 선덕제 재위시 1번 진행되었습니다.

정화가 이끈 원정대의 항해 거리는 185,000km입니다.

정화의 원정의 목적에 대한 다양한 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남아시아 등지의 조공무역국을 늘르기 위함

티무르 제국에게 명나라의 국력 과시

티무르 제국을 압박한 동맥국을 찾기 위함

정난의 변 이후 생사불명인 건문제 찾기 위함

수십년간 할일없던 수군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함

역사책 명사에는 원정단의 기함이 '보선(寶船)'이라고 불리며, 길이 44척(137m) 폭 18척(56m), 돛대 6개라고 기록하였되어 있습니다. (과장이라는 견해가 많으며, 중국이 복원한 보선의 길이는 약 63m정도입니다.)

제1차 원정단은 약 2만 7천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수군, 승조원, 역관, 의원, 천문가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함대는 총 60여척(또는 240~300여척)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화는 장안에서 당시 서역의 공용어였던 페르시아어 능통자를 찾아 고용하고, 난징에 외국어 교육기관을 설립해 통역원들의 훈련시켰습니다.

정화(鄭和 : 1371~1434)의 일생

 

정화(鄭和)는 명나라 영락제 때의 환관으로 군인이자 정화의 대원정으로 유명한 탐험가 입니다.

정화는 한족이 아닌 색목인으로 마(馬)는 무슬림에게 흔한 이름인 '무함마드'의 음차입니다.

원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며 윈난에 파견한 다루가치 사이이드 아잘 샴숫딘 우마르의 후손이자 원나라의 지방관리였던 마합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합지(哈只)라는 이름은 메카 성지순례를 마친 사람에게 붙는 칭호인 '하지'의 음차입니다.

쿤밍에는 아버지가 어린 정화에게 넓디넓은 세계를 보여주는 동상이 있습니다.

1368년 원나라는 한족이 주체가 된 명나라의 공세에 수도 베이징을 내주고 막북으로 쫓겨났지만 윈난성은 아직 쿠빌라이의 손자인 양왕(몽골명 바자로오르미)이 영지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1381년 명나라의 주원장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양왕을 정벌하였고, 이때 정화의 아버지인 마합지는 전사하였고, 정화는 거세되어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燕王) 주체(朱棣)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정화는 기골이 장대했으며(키가 9척, 허리둘레가 5척이었다고 합니다.), 연왕에 대해 충성심을 보였기 때문에 연왕은 그를 장수로 삼았으며,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연왕은 당시 명나라의 북방 방어를 맡고 있었으며, 세력권이 만주까지 확장되어 명나라 최대의 군벌이 됩니다

연왕은 정난의 변을 일으켜 4년 간의 내전 끝에 명나라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고, 영락제로 즉위하였으며, 정화는 공신이 됩니다.

영락제는 그에게 정(鄭)씨라는 성과 불교식 이름인 삼보(三寶 혹은 三保)라는 이름도 하사 하였습니다.

정화의 대원정 - 1차원정(1405.6.15~1407.9.2)

난징에서 출발하여 장강을 따라 동중국해로 나가 남서쪽으로 연안을 따라 항해하였으며, 참파, 수마트라를 거쳐 인도네시아 팔렘방에 닿았습니다.

이곳은 화교 중국인 해적 진조의가 현지인 왕을 몰아내고 지배하던 곳으로, 여기를 중간기지로 삼았고, 이 후 서진하여 말라카 해협을 지날때, 진조의의 해적단과 교전해 진조의를 생포하였습니다. 이때 서진을 중단하고 난징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도양의 다른 나라들이 명나라 원정함대에 대한 신뢰를 보내게 되고, 이후 정화는 여러 나라들간의 크고 작은 분쟁에 중재를 맡게 됩니다.

정화의 대원정 - 2차원정(1407.9.13~1409.여름)

 

1차 원정에서 돌아온 이후 10일만에 다시 출발하였습니다. 팔렘방에서 더 서쪽인 태국, 자바, 실론을 거쳐 인도 서해안인 캘리컷에 도달하였습니다. 실론(스리랑카)에서 한문, 타밀어(현지어), 페르시아어(서역공용어)의 3개국어로 된 비석을 남겼는데 1911년 발견되어 정화의 원정이 여기에 닿았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정화의 대원정 - 3차원정(1409.10~1411.7)

난징을 출발해 실론의 감폴라 왕국을 정벌하였습니다. 정화는 알라케스와라 왕을 사로잡아 영락제에게 바쳤고, 영락제는 왕을 사면하여 평민으로 만들고, 파라크라마바후 6세에게 왕위를 넘겼습니다.

캘리컷에서 더 서진하여 페르시아만을 거쳐 홍해상의 아덴에 도착한 후 귀환하였고, 귀환 중에는 조공국 수마트라왕의 요청을 받아 반란 세력을 토벌해 주었습니다.

정화의 대원정 - 4차원정(1413.11~1415.8)

4차 원정에슨 케냐까지 도달했고, 케냐의 말린디 특사가 기린을 조공하였습니다.

4차항해 이후로 중국인의 무역활동은 그동안의 인도보다도 훨씬 서쪽인 호르무즈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정화의 대원정 - 5차원정(1417.6~1419.8)

5차원정은 소말리아의 모가디슈까지 도달했으며 중간에 갈라진 분함대는 1420년 여름에 복귀하였습니다. 얼룩소, 꼬뿔소 같은 아프리카의 귀한 동물들을 실어 왔습니다.

정화의 대원정 - 6차원정(1421.1~1422.8)

6차원정은 1~5차 원정으로 데려왔던 조공사절을 돌려보내기 위한 원정이었습니다.

정화의 대원정 - 7차원정(1431.1~1433.7)

1427년 영락제가 붕어한 이후 홍희제가 즉위했으나 천도 및 재정상의 이유로 원정은 무기한 중단되었고, 홍희제가 일찍 사망하고 즉위한 선덕제가 항해 사업을 재개하기로 결정하면서 7차 원정을 나섰습니다.

정화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임무를 사양하였으나 대신한 다른 인물이 없어 7차 항해까지 책임지게 됩니다.

이때 정화는 메카에 도달해 참배한 것으로 보입니다.

1433년 4월 정화는 오랫동안 고생한 탓인지 항해 도중 사망하게 됩니다.

시신은 원정대의 관례에 따라 예를 갖추어 인도양에 수장되었으나, 본국에 가묘가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정화의 부관이던 환관 왕경홍이 지휘하여 귀국하였고, 이후 다시 항해는 재기되지 않았습니다.

정화의 대원정의 의미

정화의 대원정은 수천년의 중국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중국의 사실상 첫 해양진출이자 마지막 원정입니다.

다만, 정화의 대원정은 이미 알려진 루트를 통해서 항해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서양인들과 같이 해외진출이나 식민지 건설에 열의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