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혁명당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은 크게 두 개의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1964년에 일어난 "인혁당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과 관계되어 일어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입니다.
후자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사법살인으로도 유명합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문을 한 것도 모자라 누명을 씌워 사법권으로 살인을 저지르며 유가족들까지 연좌제로 괴롭힌 사건입니다.

인민혁명당 사건 1964년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등은 좌익 계열 정당인 인민혁명당(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사건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 중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김형욱이 발표한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간첩 김영춘은 1962년 1월 북한으로부터 특수 사명을 띠고 남하하여 인혁당 조직을 주도했습니다.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 우동읍과 동 간사장 김배영, 김영광,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 김금수, 동 경북도 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 허표, 전 진보당원 김한득, 빨치산 출신 박현채 등이 참가하여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갖고 외국군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여 발족했습니다.

이후 조직을 확대해 오다가 1964년 4월 북한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중앙상임위원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한일협정 반대 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하며 동시에 학생 데모를 4월 혁명 같이 발전케 하여 현 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으로 8년 간 옥고를 치른 정만진 씨 등은 '인혁당은 실체가 없으며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까지 변조할 만큼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라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이 인혁당 사건은 그 해 8월 18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정의 발표와 달리 송치받은 검찰은 18일간의 철야 수사에도 기소할 만한 증거와 혐의점을 찾지 못했으며 사건 관련자들이 중정의 조사 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음을 밝혀냈습니다.
결국 사건 담당 검사 중 최대현 검사를 제외한 부장검사 이용훈, 김병금, 장원찬 검사는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라는 이유로 기소 거부와 함께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검찰과 중정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김형욱은 숙직 담당 검사에게 압력을 넣어 서명토록 해 간신히 기소했습니다.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었고 관련자들의 전기고문, 물고문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자 검찰은 서울 고검 한옥신 검사에게 재수사를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 당초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된 26명 중 학생 등 14명에 대한 공소를 취하했고 도예종 등 나머지 12명의 피고에 대해서도 국보법 위반에서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등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했으며 법원은 이들에게 최고 3년에서 1년까지 가벼운 형량을 선고했습니다.

한편 사건 관련자 김배영은 이전 1962년 10월에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 경시청에서 그를 수배하자 1964년 11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통하여 월북했습니다.
그는 1967년 10월 대한민국에 북한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1971년에 대한민국에서 체포되어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또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주범인 金培永(김배영)은 체포된 후 일단 무혐의로 풀려난 틈을 타서 또 다른 공범인 체포되지 않은 禹東邑(우동읍)과 이북으로 도주하였고 지령을 받고 다시 남하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공작금과 난수표,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민혁명당(1964년) 사건에 연루된 도예종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년)으로 사형이 집행되었고 우동읍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우홍선과 동일인물입니다.

김배영 같은 경우는 1950~60년대에는 종종 있었습니다.
동백림 사건에서 볼 수 있듯 당시는 분단이 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던 만큼 이북도 이전까지만 해도 같은 민족 같은 나라였던지라 월북 행위에 큰 문제의식이 없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해방 이전부터 사회주의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인물이라면 북한을 그냥 그런 사회주의 국가로 생각하고 적대시하지 않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년
1972년 10월 17일에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유신 정국이 가속되었습니다.
1974년 4월 3일 학생들의 대규모 반유신 저항 운동을 분쇄하고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4월 25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학생 데모의 배후에는 공산당의 조종이 있었다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했습니다.
발표 요지에 따르면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 단체인 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1974년 4월 3일을 기해 현 정부를 전복하려 획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974년 4월 3일, 유신정권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 사건 명단, 출처 : 나무위키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더불어 이전 인민혁명당 연루자들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의 검찰부에 의해 국보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기소됩니다.

6월 15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 확정까지 10개월이 걸렸습니다.
3심을 거치는 동안 피고인들의 형량은 변함이 없었고 특히 후술할 8인의 사형수들의 형량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형이었습니다.인민혁명당 판결(74도3323)

사형 확정으로 끝난 이 재판에 참여한 대법관(당시 대법원 판사)은 민복기(재판장),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주심), 한환진, 임항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다.

이들 중 유일하게 이일규 대법관이 반대하여 반대의견을 냈습니다.
이일규 대법관은 항소심에서 피고인 신문을 생략하고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진행한 것은 제대로 변론 절차를 거쳤다고 볼 수 없다며 재판 절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원심을 파기하고 다시 재판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습니다.

1. 비상군법회의의 설치에 관한 대통령긴급조치제2호는 2 「11」에서 그 조치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한 군법회의법을 준용하고 있으므로 아래에서 단순히 법이라함은 군법회의법을 가리키면서 나의 의견을 기술하겠다. 군법회의의 항소심은 원칙적으로는 사후심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법 제415조, 제416조에서 변론의 방식이나 피고인의 출석에 관하여 제1심과 다른 규정을 들고 있으나 그렇다고 전혀 복심 내지 속심 즉 사실심으로서의 기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법 제425조에 따르면 고등군법회의(따라서 비상고등군법회의)는 원심판결을 파기하는 경우에 그 소송기록과 원심군법회의 또는 고등군법회의에서 조사한 증거에 의하여 판결하기 충분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피고사건에 대하여 직접 판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는 원심판결에 사실의 확정에 영향이 없는 법령적용에 잘못이 있는 경우와, 원심판결에 사실오인 또는 양형부당이 있는 경우를 포함하여 제1심에의 환송 또는 이송하는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소송경제상 자판을 하도록 인정된 제도로서 후자의 경우 즉 사실인정을 다시 하거나 새로운 형의 양정을 할 때는 사실심으로 심판하여야 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군법회의에서 판결은 특별한 규정이 없는한 구두변론에 의하여야함은 법 제71조에 명백히 규정되고 있는 바로서 항소심에 있어서도 법 제420조와 같은 특별규정이 없는한 판결은 반드시 변론을 거쳐서 하여야하며 여기서 말하는 변론을 거친다함은 군법회의의 면전에서 당사자가 공격방어한 소송자료에 터잡아서하는 심리과정을 거쳐서 하는 직접심리주의(법 제349조)를 말하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소심이라 할지라도 다시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양형을 할때에는 위에서 말한 의미에서의 변론을 거치지 아니하고서는 본안판결을 할 수 없다 할 것이며 이는 소송경제때문에 직접심리주의가 변질될 수 없고 또 헌법 제24조에서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 있는 점에도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의 항소심인 원심판결은 검찰관의 공소사실의 진술도 없이 또 제1심에서의 신문과 중복된다하여 피고인의 신문을 생략한다하여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시행하여 결심하였는바 이는 공소사실에 대한 변론을 거쳤다고 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E, 같은 F, 같은 G, 같은 H, 같은 L, 같은 M, 같은 N, 같은 O, 같은 Q, 같은 R, 같은 임규명, 같은 C, 같은 D, 같은 T, 같은 U, 같은 AB, 같은 W에 관한 제1심의 양형이 부당하다하여 제1심판결을 파기하여 사실인정을 다시하고 양형을 달리하는 판결을 하였으니 이는 변론 즉 사실심리를 아니하고 재판을 한 재판절차에 위법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고, 이 위법은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할 것이므로 이 부분 원심판결은 파기를 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당원 1963.10.10. 선고 63도256 판결이 군법회의의 항소심에서 사실인정과 양형에 관한 자판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직접심리를 아니하여도 위법이 아니라는 뜻이라면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일규 대법원장은 훗날 2007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인민혁명당 사건이) 내가 있던 3부로 배당됐다. 3부 구성원은 주심이 이병호 판사였고 주재황·김영세 판사, 그리고 나였다. 나 혼자 소수의견을 내서 전원합의체로 갔다. 통상 막내 판사가 먼저 의견을 말하는데 내가 의견을 말하자 일순 침묵이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민복기 대법원장 주재로 다수결을 통해 2심 판결이 확정됐다. 피고인들의 ‘고문으로 그렇게 진술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상고 이유에 대해 ‘그렇게 볼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상고기각했다.”고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다.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다”고 거듭 말했습니다.
다만 유족들에 대한 사과 여부를 묻자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사법부의 책임이나 뒤늦은 사과에 대해서는 과거는 과거로 놔두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미 지난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이번 재심판결 역시 이번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제도가 바뀌고 나서 판결이 달라졌다고 사과한다면, 제도 바뀔 때마다 예전 판결을 가지고 일일이 사과해야 하는가.” 라고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년 - 재판 과정
고문과 불법적 제한
인민혁명당 연루자들은 가족 면회도 거부당하고 변호인과의 면회도 불법적으로 제한당한 채 중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당시 피고인석에 자리했던 피해자들 중 8인의 사형수 중 한 명이었던 하재완은 혹독한 전기고문에 장이 항문으로 튀어나올 정도였습니다.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
이 사실을 폭로한 조지 오글(George.E.Ogle, 1929~2020)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James.P.Sinnott, 1929~2014) 신부는 강제 추방당했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동아일보 등에 인민혁명당 재판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는 광고를 싣느라 무일푼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민혁명당 사건 재판정에서 재판을 히틀러 재판에 비유하면서 "이것은 정의를 모독하는 당치 않은 수작이다! 공산주의 재판보다 더 나쁘다!"고 외쳤습니다.
법정에서 조용히 해 달라는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싸여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법정이라고? 여긴 그저 오물들이 쌓여 있는 곳이라고!" (천주교인권위원회 2001)

불공정한 재판
국제앰네스티의 1975년 한국 참관단 보고서에 따르면 재판 과정도 굉장히 불공정했습니다.

공소장과 진술서는 증거능력이 정식으로 입증되지 않았음에도 증거로 채택되었던 것은 물론, 고문을 통한 자백 외에는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았으며 피고측 변호인들은 공판 2~3일 전까지 진술서를 전혀 볼 수 없었던 데다 변호인측 증인은 한 사람도 채택되지 않았고 검찰 측의 증인에 대한 반대 신문을 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고문 혐의를 제기해도 판사나 검찰이 강압적으로 제지하였습니다.

피고인들의 진술과 피고측 변호인이 요구한 증거가 재판에 전혀 반영되지 않도록 했고 가족 중 한 명만 재판에 참석할 것을 허용했으며 이렇게 통제된 재판을 외신기자들이 방청하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관계당국은 공식적인 재판기록의 공개를 거절했습니다.
심지어 공판조서도 피고들이 (공소사실에 대해)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한 것이 모두 '예'라고 변조되는 등 터무니없이 변조되었습니다.
물론 피고인들에게는 재판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사형 선고가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1심, 2심, 최종심 모두 피고인들이나 변호인들에게 변론이나 상황을 설명할 충분한 시간도 없이 '각본에 짜여진 극을 하듯' 진행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최종심에서는 피고인들도 없이 재판관들만 출정하더니 재판관들이 군법회의 공판조서만 보고 단 10분 만에 항소 기각 판정을 하며 사형을 확정지었습니다.

최종심도 두 차례나 담당 재판부가 바뀐 끝에 이례적으로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13명의 대법원 판사들로 구성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외압 논란이 있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년 - 사법살인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에 대법원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피고인 36명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원심대로 형이 확정됐습니다.
그런데 선고 바로 다음날인 4월 9일 새벽 4시 30분부터 아침 8시까지 서울구치소에서 이들 8명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사형 집행이 시작된 것은 형량이 확정된 지 겨우 정확히 18시간 30분 만이었습니다.

이날 구속 이래 1년 가까이 피해자들을 보지 못했던 가족들은 '형이 확정되었으니 면회가 가능하겠지'라고 위로차 아침 일찍 피해자들이 수감되었던 서울구치소에 면회하러 왔던 유족들은 이미 형이 집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졸도했다고 합니다.
사실 다음날 바로 형이 집행되지 않고 좀 있다가 집행해도 면회는 유신 정부가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이기 때문에 못볼 확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당시 희생당한 사형수 8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프로필의 직업은 체포 당시 기준이며 시신은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현대공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서도원(徐道源, 1923년 3월 28일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 당시 나이 52세, 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都禮鍾, 1924년 12월 25일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 출생, 당시 나이 50세, 삼화토건 회장)
송상진(宋相振, 1928년 10월 30일 경상북도 달성군(현 대구광역시 동구) 출생, 당시 나이 46세, 양봉업)
우홍선(禹洪善, 1930년 3월 6일 경상남도 울주군(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출생, 당시 나이 45세,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하재완(河在完, 1932년 1월 10일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 당시 나이 43세, 건축업)
김용원(金鏞元, 1935년 11월 10일 경상남도 함안군 출생, 당시 나이 39세,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
이수병(李銖秉, 1937년 1월 15일 경상남도 의령군 출생, 당시 나이 38세, 삼락일어학원 강사)
여정남(呂正男, 1944년 5월 7일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 출생, 당시 나이 30세,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참고로 이들 중 하재완과 우홍선은 6.25 전쟁 참전용사였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한 8명의 희생자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 출처 : 나무위키
이날 '1975년 4월 9일'은 우리 사법 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날로 꼽힙니다.
당시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가 8명의 생명을 앗아간 그날 형 집행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명명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지탄을 받았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년 - 시신탈취와 불법 화장
유신 정권은 사형당한 8인의 시신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려 하지 않았으며 특히 송상진, 여정남 2명의 시신은 유족의 동의 없이 멋대로 시신을 탈취하여 화장해 버렸습니다.
피해자들이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워했던 데다 유족들이 한데 모여 억울한 죽음을 호소할까 봐 그랬다고 합니다.
이 중 우홍선, 이수병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인수됐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집이 서울이 아니어서 바로 인수되지 못했습니다.
이때 경찰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남은 시신들을 빼앗기고 남은 송상진의 시신만이라도 가족들에게 보내기 위해 천주교 사제들이 응암동 성당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경찰들은 크레인까지 동원해 시신을 강탈해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해 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맞서 저항했던 이들 중 문정현 신부는 추락하여 장애를 얻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고문과 전격 처형, 화장 등의 잔혹성과 의혹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년 - 이해할수 없는 사형 집행
사건의 발단에서 진행, 결과에 이르기까지 석연치 않은 일 투성이었습니다.
정치적 득보다는 해가 많은 사건으로 도대체가 왜 이런 악수를 두었는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이후 반정부 세력에서 강경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들은 '아무리 독재자라 해도 없는 죄를 만들어 죽이지는 못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사형 선고를 받아도 영광이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인혁당 관계자 8명이 사형당하는 걸 보고 독재자가 누명을 씌워 멀쩡한 사람을 정말로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국제적으로 완전히 찍힌 사실만 봐도 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설령 이들이 실제 간첩이었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성급한 형 집행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입니다.
생포한 스파이를 죽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행동입니다.
살려서 가지고 있는 정보를 있는 대로 짜내고 나중에는 인질로서 적국과 거래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정보전의 정석입니다.
당시 중정이 발표한 대로 그들이 고위 간첩이었다면 당장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나치다시피 한 형 집행이 자신이 조작한 사건임을 입증하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공안정국을 만들려고 했다고 봐도 달리 같은 해 일어난 장준하 의문사 사건과 함께 국내 여론의 반발만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논란이 일면 항상 언급되는 사건이며 사형제 존폐 논쟁에서도 인천 일가족 살인사건과 함께 반대의 예시로 자주 언급됩니다.
한국에서 사형 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확산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후폭풍도 컸습니다.
해외의 비난 여론은 긴 기간 외교적 짐으로 작용했습니다.
미국의 감리교 목사 조지 오글(George E. Ogle, 한국명 오명걸)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다가 중앙정보부의 심문을 받고 추방당했습니다.
그는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한 이후 주로 노동, 인권분야에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당연히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민주화 이후 2020년 제33주년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 '민주주의 발전 유공 포상' 국민포장을 수여받고 2020년 11월 15일 91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당시 미국으로 추방당했던 조지 오글 목사는 미국에 인민혁명당 사건을 폭로했으며 이는 미국 정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미국의 보수언론조차도 이 사건의 부당성을 강도 높게 비난했을 정도였습니다.
다음 해 미국의 지미 카터 정권이 도덕/인권 정치를 외치며 들어섰을 때 한미관계가 급격하게 냉각되게 만드는 간접적인 원인으로 열거될 정도입니다.
박정희도 이후 이 사건을 크게 후회하였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중정 요원들이 늘 유가족들을 사사건건 감시하고 연좌제로 묶었던 행태 등에 비추어 봤을 때 동정의 여지는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후회했다기보다는 해외의 비난 여론과 어려워진 외교 관계, 요동치는 민심 때문에 후회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년 - 대구 경상북도 지역 진보세력 궤멸
이 불미스러운 사법살인으로 인해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지역의 진보 세력과 적은 숫자로 남아 있던 좌파 세력들이 완전히 뿌리가 뽑혔다는 진단도 있습니다.
대구 10.1 사건을 비롯해서 대구/경북 지방은 해방 직후 좌파의 성지로 유명했고 진보 세력도 상당히 강했기에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후에도 1960년대까지 경북 지방은 굉장히 진보적인 사회운동가들이 많은 지역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1979년 남민전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보수화되어 버렸습니다.
얼마 후 밑의 부산, 마산 등지에서 민주 항쟁이 벌어질 때도 큰 소요는 없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기 이후 대구/경북 지역에서 일어난 공안사건의 숫자와 타 지역의 숫자를 비교해 보면 대구/경북에서는 진보적 사회운동의 뿌리가 아예 뽑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월 항쟁 당시에는 호헌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열리긴 했지만 격렬한 항쟁으로 번진 부산/마산 등지보다 훨씬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보수의 텃밭이 되어 극소수의 진보계열만 남은 상황입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년 - 사형 8인 이외 인원
전격 처형된 8명을 비롯해 이 사건으로 전창일, 김한덕, 나경일, 강창덕, 이태환, 이성재, 유진곤 씨가 무기징역을, 김종대, 정만진, 조만호, 이재형 씨가 징역 20년을, 이창복, 황현승, 임구호, 전재권 씨가 징역 15년을, 장석구 씨 등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들 중 장석구 씨가 1975년 10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유기수 석방, 8월 15일 무기수 20년으로 감형, 12월 24일 형집행정지로 20년형 유기수 석방 등의 조치를 통해 출소했다. 그러나 출옥 후 전재권, 유진곤 씨가 지병으로 병사했으며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박현채 전남대 교수가 95년 사망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년 - 유가족의 비참한 삶
유가족들의 삶은 정말 비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중정 요원들이 화장실까지 따라와 감시하는 등 그림자처럼 붙어다닌 건 물론이고 더욱 가혹하게도 가는 곳마다 '간첩의 집안'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다녔습니다.
사형당했던 희생자 하재완의 막내아들은 4살 때 동네 아이들이 자신의 목에 새끼줄을 매어서 끌고 다니며 당산나무에 묶어 놓고 '빨갱이 새끼는 총살해야 한다'며 놀리는 이른바 '총살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소풍날에는 반 아이들이 몰려와 '간첩의 자식'이라며 도시락에 개미를 넣고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인혁당 희생자 송상진의 가족의 경우 아내가 죄책감에 자식들과 함께 쥐약을 먹고 죽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 모습을 친정 어머니가 우연히 보고 말렸지만 친정 어머니는 당시 깊은 충격에 빠져 몇 년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송상진의 아들 송철환은 '정말 학교 가기 싫었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의 나날'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혁당 사건의 유가족들은 수십 년 동안 사회로부터 멸시와 수모를 겪은 채로 살아 왔습니다.

진상규명 후인 2000년대 이후에도 우파 단체나 그 성향 가진 네티즌 등 극우 세력들이 이들을 홍어, 종북좌파, 빨갱이 등 심각한 발언과 함께 조롱하고 있으며 아래서 얘기할 언론인 심원택의 예처럼 '인혁당 사건은 공안조작 사건이나 실정법을 어긴 건 명백하다'는 식의 잘못된 양비론을 지니는 경우도 일부 있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년 - 재심 청구
1998년에는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을 중심으로 '인민혁명당 사건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진상규명 운동을 시작했고 유족 등 관련자들의 증언과 사연이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점차 보도되면서 점차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이 사건이 재조명되었고 유족들은 12월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하였습니다.
사법부에서도 고문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2005년 다시 재판이 시작되어 2007년에 사형 선고가 내려진 8명에게 증거 불충분에 의한 무죄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30년이 지났다고 증거 불충분이 된 게 아닙니다.
법원의 증거는 서류로 남습니다.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가 내려진 것은 당시 택도 없는 증거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소리가 아니라 고문으로 인한 증거의 증거 능력이 효력이 없음을 재심하였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증거 능력이 있는 증거를 통해 범죄가 확실히 증명되었을 때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위법하게 수집되었으리라는 심증은 있지만 철저하게 조작되어 조금의 꼬투리도 잡을 수 없는 증거를 법원은 외면할 수 없다'고 옹호하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피고인들이 검찰에서의 자백이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재판 과정에서 항변했던 점 등을 생각할 때 받아들이는 이들이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고문은 허위 자백과 진술의 심증의 여부를 판단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런 논란 속에서 이명박 정부의 제성호 인권대사가 "인혁당 사건의 무죄 선고는 재고를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인혁당을 조직했다는 주범으로 주목됐던 김영춘은 남파 간첩이 아니라 애초에 위장 월북을 한 북파 간첩이었고 본명은 김상한이었다고 과거사진실위원회를 통하여 밝혀졌습니다.
몇몇 언론에서는 인혁당은 실제로 존재했다며 사형 판결과 집행을 합리화하는 듯한 기사를 썼는데 이건 이 사건의 본질을 잘못 짚은 기사입니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혁당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의 여부가 아닙니다.
이 사건의 문제는 충분한 증거 없이 법원이 판결을 내리고 사형 선고를 했으며 그 사형 집행 또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적법하게 수집된 증거 능력이 있는 증거를 바탕으로 범죄가 확실히 증명되었을 때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으며 사형 판결이 확정되어도 실제 사형 집행에는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 정도 간격을 두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백 번 양보하여 인혁당의 존재 여부가 중요하다고 해도 당시의 검찰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적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법원도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판결을 진행했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4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인혁당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데 기사의 주장대로 인터뷰에 응한 사람이 실제로 인혁당에 가입하여서 활동하였고 인혁당이 실제 북한의 지령을 받은 반국가단체였다면 이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거나 감옥살이라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또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문은 선고 직후 판례공보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 원칙인데도 인혁당 사건의 판결문은 '1975년 4월 21자 법률신문 제1104호에 전문게재 되었음'이라는 이유를 들어 법원 판례공보에 실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판결문은 약 30년간 '사실상 비공개'였던 것입니다. (출처 : 대법원 1975. 4. 8. 선고 74도3323 판결 [대통령긴급조치위반·국가보안법위반·내란, 예비, 음모·내란, 선동·반공법위반·뇌물공여] > 종합법률정보 판례)
2013년 11월 28일,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재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어 1, 2차 인민혁명당 사건 모두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단 1차 사건의 13명 중 9명만 무죄가 확정되었고 4명의 재심 청구는 기각됐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년 - 배상금 및 반환 논란
산출 기준은 배상액 230억 + 30년간의 이자와 기타 잡비를 합친 금액이라고 합니다.
2007년 당시 정부는 30억의 배상금이 책정되었을 때에 정부가 반환금 소송을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비추었지만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법살인의 사례이자 인권 탄압이라는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여론에 밀려서 반환금 소송은 진행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기였던 2011년부터 대법원을 통해 지연 손해에 대한 과잉 배상 문제에 대해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과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배상금을 돌려달라는 정부의 주장의 골자는 30년 간 붙은 이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600억을 지급하기로 정한 원심은 일반적인 불법행위 손해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 계산 방식대로 불법행위가 있던 1975년부터 지연손해금을 계산하였으나 대법원은 해당 사건과 같이 불법행위 시점과 소송 시점 간 통화가치가 심하게 차이 나는 예외적인 경우에는 사실심 변론종결 시(해당 사건의 경우 2009년)를 기준으로 지연손해금을 계산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2011년부터 정부가 부당 이득금 반환 소송을 제기하면서 무려 210억에 달하는 소송이 제기되었고 피고인 측이 모두 패소했습니다.
더욱 황당한 건 이 사건의 주범인 국정원(중정의 후신)이 소송 주체로서 피해자들에게 이중으로 고통을 줬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투옥 피해자는 지급된 배상금을 모두 채무 변제와 일부 기부로 다 지출한 탓에 소송 패소로 국정원 측에서 집의 모든 가재도구에 가압류를 걸었으며 다른 피해자 가족은 오랫동안 거처한 집을 압류로 빼앗길 처지에 내몰렸습니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난 이상 법적인 구제 방법은 없고 오직 대통령의 지시로 압류 집행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측은 법과 원칙을 내세워서 피해자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겼습니다.

다행히 2018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에서 과거사 피해에 대한 대법원 판결 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인혁당 사건 유족들도 배상금 반환과 관련된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판결의 조건이 참으로 까다로운데, 재심 뒤 6개월 내에 청구할 것, 그리고 명백한 과거사위 조사서 등을 첨부할 것 등이었습니다.
이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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