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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백범 김구 암살 사건 개요

안두희가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 자택 서재에서 기거하던 백범 김구총기 암살한 사건​

사건이 일어난 1949년 6월 26일 오후

김구는 자택인 서울 경교장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었습니다.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 당원인 안두희가 문안인사차 방문하여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헌병대위 강홍모가 휘발유를 얻기 위해 방문 하였고, 안두희의 양해를 구하고 먼저 김구를 만났습니다.

이후 비서진은 특별한 검문없이 안두희 서재로 안내하였습니다. 이때 안두희는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지만 군인이라는 이유로 제지없이 통과되었습니다.

안두희는 "선생님, 먹을 갈아 드릴까요?" 라고 물은 후에, 김구가 안두희를 보는 순간 권총으로 약 1m거리에서 4발의 총탄을 김구에게 발포하여 사망하게 하였습니다.

김구 사망 후 7월 5일 장례식 까지

안두희는 경교장을 빠져나가다가 경비에게 잡혀 헌병사령부로 연행

- "김구가 남북 협상을 통해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키고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결국엔 참다 못해 김구를 죽였다"고 말함

,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형기가 15년으로 감형

김구의 갑작스럼 죽음에 7월 5일 장례식때 까지 10일간 약 120여만명이 조문하였다고 추산되며,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 암살 후 6월 28일, 7월 2일 두차례에 걸쳐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김구 선생 급서에 통탄불금(1949년 6월 28일)"

7월 5일에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습니다.

사건에 대한 의혹과 안두희의 삶

 

안두희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김구와 의견 충돌을 벌이다가 죽이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한독당 조직부당 김학규 등살인교사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사건 1시간 24분 만에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이 이 사건은 안두희 개인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7월 2일 특별성명을 통해 한독당 내부의 집안싸움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후 안두희의 삶

1년 후 6.25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군에 복귀하였고 정치권에서 석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군에서는 소위에서 소령으로 특진을 시킵니다. 즉,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였고, 사건 1년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게 됩니다.

예편 후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군으로 건너가 군납공장을 차려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권의 비호로 대저택까지 지어 호화롭게 생활하였습니다.

1961년 4월 17일 '백범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습니다.

1961년 4월 28일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암살사건 배후자 규탄대회' 시위등이 열리기도 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이 모든것이 묻히게 됩니다.

이후 안두희는 사람들에게 김구 암살범으로 낙인 찍혀 암살 및 살해 위협을 받게 됩니다.

1987년부터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수차례 응징당하면서 진실을 고백하라고 요구 받았습니다. 여기서 안두희는 이승만의 명령을 받아 김구를 암살하였다고 얘기한 적이 있으나, 이후 권중희의 납치,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부인하였습니다.

1992년 암살과 관련된 증언을 시작하였고, 백범 김구 묘소에 참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본인의 단독 범행이라고 얘기하였다가, 언론사 인터뷰에서는 김창룡의 명령을 받았다고 얘기하고, 미국이 시킨 일이라고 얘기하는 등 여러 차례 말을 바꾸었습니다.

1993년 국회 법사위가 '백범김구암살진상규명소위원회'를 구성했고, 1994년에는 안두희가 건강 악화로 들것에 실린 채 해당 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하였으나 이승만과의 관계 등 배후세력에 대해선 실어증을 이유로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장국회조사보고소]는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사건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자택에서 버스기사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에 두들겨 맞아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백범김구암살진실규명조사위원회 보고서의 내용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로,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이 암살을 명령했고, 사건 발생 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 헌병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습니다. 군부와 더울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져야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미군 기밀 문서 발굴과 주요보고서 보고내용

2001년 정병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stration : NARA)에서 안두희가 미국방첩대(CIC)의 요원이자 극우 테러단체 백의사의 단원이었다는 문서를 발굴하였습니다.

문제제목은 [김구암살관련 배경정보](1949.6.29 작성, 1949.7.1보고), 작성자는 미국 뉴욕주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운영과장 죠지 E.실리(George E.Cilley) 소령

  1. 안두희는 미국 방첩대의 정보원 및 요원으로 활동했다
  2. 안두희는 우익 테러조직인 백의사의 자살 특공대(혁명단) 단원이었다.
  3. 김구와 백의사 사령 염동진이 군부 내 반 이승만파와 손잡고 군사쿠테타를 일으키려 한 혐의가 있다.

실리보고서가 전하는 '김구쿠테타 계획설'은 1948년말 한국군 정보.공작당국이 파악하고 있던 김구에 대한 정치적 의혹과 공작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여순사건.혁명의용군사건.김구암살에서 드러나듯이 이는 조작된 혐의일 뿐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의혹과 공작은 정계의 핵심실력자들을 통해 확대재생산되었고, 이러한 김구쿠테타 계획설은 김구 제거의 논리가 되었고, 암살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었습니다.

1949년 8월 9일 주한미대사 무초의 안두희 재판관련 보고서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군이 암살사건의 발생부터 재판까지 전과정에 강력하게 개입하고 조작했다
  2. 한국군은 김구암살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선전함으로써 암살범을 비호하는데 적극적이었다.
  3. 김구암살에 관한 한국정부의 주장은 상당부분 근거가 있다. 그 근거는 김구의 반민족, 반정부, 친공, 반역행동과 쿠테타, 대통령살해음모 등을 선적 부각시키려하였다.

또한 이 보고서에서는 안두희의 자백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기물문서와 보고서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