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스페인어 : Guerra Civil Española, 에스파냐 공민전쟁) 개요
스페인 제2공화국에서 1936년 7월 17일 ~ 1939년 4월 1일 까지 일어난 대규모 내전입니다.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공화파)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쿠테타군(국민파) 사이에 있었던 내전입니다.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프랑코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키며 내전이 시작되었고, 1939년 4월 1일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국민파 측의 승리로 끝났으나, 스페인 전역이 황폐화되었습니다.
소련과 각국에서 모여든 의용군인 국제여단이 반파시즘 진영이었던 공화파 인민전선을 지원하고, 파시스트 진영인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집권하고 있던 포루투갈이 국민파 쿠테타군을 지원하였습니다. 아울러 로마 카톨릭교회와 카를로스파를 비롯한 왕당파들은 국민파 쿠테타군을 지원하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항해 공화파에 군수물자를 지원하였으나, 국제연맹이 불간섭 조약을 이유로 공화파에 대한 지원에 미온적이었습니다.
미국은 내전에 대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하였지만, 공화파와 지원국 소련 측에는 전투기와 같은 항공기들을, 국민파 측에는 가솔린과 같은 물자들을 팔았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 공산주의 , 아나키즘, 반동주의, 군국주의, 반국국주의, 공화주의, 군주주의 등 당대 주류 이념들의 격전장이자 제2차세계대전의 예고전으로 평가됩니다.
스페인 내전당시의 주요 세력과 지원국가
◆ 공화파
소련, 멕시코,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 운동가들로 구성된 국제여단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지원 받았습니다.
공화파의 중심 세력은 노동자, 소작농, 도시 시민 등이었으나,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아스투리아스와 카탈루냐의 일부 자본가들 역시 공화파를 지지하였습니다.
"공화파", "인민전선", "충성파", "정부파" 등으로 자칭, 국민파에서는 "빨갱이"로 부름
◆ 국민파
제2공화국 정부에 의해 "반란군", "역적", "파시스트" 등으로 불린 국민파 세력은 중앙집중과 반공주의를 공통 분모로 하는 여러 세력의 연합입니다. 왕당파, 지주, 유산가, 보수주의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스페인이 분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카탈류냐 민족주의와 바스크 민족주의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은 공화파를 지지하였고, 반교권주의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 국제여단과 소련, 멕시코
스페인의 민주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한 집단으로, 아나키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극좌파, 자유주의를 아우르는 다양한 이념을 가진 집단입니다. 스페인 내전을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한 최전방으로 여겼습니다.
53개 국가에서 모인 약 30,000명의 국제 여단은,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 캐나다의 메켄지-파피뉴 여단등이 있었고, 상당수 코민테른에 의해 모집되었고, 루마니아 공산당에서는 5백명의 공산당원이 참전하였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조카 에스먼드 로밀리와 같은 자유주의자들 역시 파시즘에 대항하기 국제여단에 참여하였습니다.
지원병중 헤밍웨이, 조지 오웰과 같은 지식인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소령은 스페인 공화국 정부에 군수물자와 의용군이라는 이름의 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멕시코는 공식적으로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였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역사적 배경
◆ 레콘키스타 (718~1492년) -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이슬람 축출
718년 부터 1492년까지 무려 774년에 걸쳐서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로마 카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반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 벤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합니다.
스페인의 전신인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왕국은 당시 무어인을 상대로 770여년간 전쟁을 벌였습니다.
레콘키스타가 완료된 후 스페인 왕국은 스스로를 로마 카톨릭의 수호자라 자처하였으며, 교황에게 요청하여 국왕이 종교재판을 관할하는 특혜를 얻었습니다.
1834년 이사벨 2세가 중지할 때까지 스폐인 종교 재판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였습니다.
◆ 중세 스페인 왕정(1492~1873년) - 봉건 왕정과 특권화된 로마 카톨릭 교회
봉건 군국주의적인 성격을 띄고 있던, 스페인 제국은 오랜 전쟁과 종교재판의 지속으로 중세 후기 1,400만명이었던 인구는 18세기 후반 700만명으로 감소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제구조가 원인이 되어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해졌습니다.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에서는 지역주의가 16세기 이래 계속되었고, 왕정 종식을 요구하게 됩니다.
◆ 스페인 제1공화국 (1873~1931년) - 공산주의와 군부독재
스페인 제1공화국은 분리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제를 표방하였으나,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스페인 내 각지역의 분리 독립 운동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게됩니다.
쿠바에서 무장독립 투쟁이 발생하자 스페인 연방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였고, 분리주의 운동과 더불어 갈등을 겪으면서 군부가 세력을 키우게 됩니다.
1874년 1월 2일, 마드리드의 군사 총독 파비아 장군은 의회를 해산시켰고, 스페인 제1공화국은 군부 독재로 변질됩니다.
1874년 12월 19일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이 이사벨 2세를 지지하던 각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알폰소 12세를 국왕으로 추대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 집니다.
알폰소 12세는 1876년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를 표방하였습니다.
왕정복고 이후에도 스페인의 내정은 계급간의 극심한 갈등과 상호 보복이 계속되었습니다.
극좌파들은 당시 스페인 사회의 주요 기득권층 가운데 하나였던 로마 카톨릭을 타도 대상인 지배계급으로 보아 교회를 파괴하였습니다.
이에 지배계급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수백명을 체포하였고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처형하였습니다.
당시 집권여당인 사회당은 바쿠닌에서 비롯된 아나키즘에 경되었고, 당시 주요 산업도시에 형성된 노동조합은 아나키즘의 영향아래에 있었습니다.
1897년 마르크스주의를 강령으로 하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이 결성되었고, 이후 러시아 혁명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도 증대되었습니다.
1902년, 16세의 알폰소 13세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모후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1차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킴으로써 막대한 부를 손에 넣었으나, 그러한 부의 대부분은 소수의 지배계급에 집중되었습니다.
이로 인한 갈등은 1917년 총파업 투쟁을 불러일으켰고,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을 내건 전국노동총연맹과 마르크스주의를 내건 노동자총연맹이 주도한 이 파업은 군대의 진압으로 끝나게 됩니다. 과정에서 노동자 수백명이 학살되었습니다.
1923년 리베라 장군은 극심한 사회혼란을 이유로 쿠테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지주, 교회, 부르조아와 같은 기득권층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리베라는 스스로 총리가 되어 군부독재를 시작하였습니다.
1929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과 스페인 독감에 의해 경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고, 1930년 스스로 사임하였습니다.
◆ 제2공화국 (1913~1936년) - 계급간 갈등과 토지개혁
리베라가 사임하자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왕당파와 군부는 반목하고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13년 알폰소 13세는 총선을 약속하였으며, 4월 12일 총선의 결과 공화파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고, 4월 14일 알폰소 13세는 망명합니다.
공화주의자 안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좌파 이외에도 온건 로마 카톨릭교도들과 같은 다양한 집단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스페인에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온건 카톨릭주의자이자 부르주아 였던 니세토 알카라사모라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마누엘 아사냐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참여하였습니다.
제2공화국 헌법은 지방자치와 평화주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 여성의 참정권 명시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공화국 정부의 가장 큰 현안은 토지 개혁이었으나, 스페인의 소수 지배계급이었던 지주와 로마 카톨릭교회의 저항으로 개혁은 지지부진하였고, 대공황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어 계급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무정부주의와 극단주의가 대두되어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였습니다.
아사냐 내각은 지지부진한 토지개혁과 경제 위기로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비난 받았습니다.
1933년 아사냐 내각이 퇴진하고 우파가 집권하게 되었으나, 군대를 동원한 노동탄압으로 급격이 지지율이 하락하게 됩니다.
1936년 2월 총선 결과 스페인 사회농동,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473석 중 289석을 확보하였습니다. 인민전선은 토지개혁을 시행하였으나, 지주, 자본가, 로마 카톨릭교회의 반발과 갈등이 심해지게 됩니다.
제2공화국 총리였던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기가 군부의 군사행동을 우려하여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카나리아 제도로, 마누엘 고데스 요피스를 발레아레스 제도로 보내는 조치를 하였습니다. 이는 군부의 군사행동을 우려한 조치였습니다.
스페인 내전(1936년 7월 17일~1939년 4월 1일)
반란군의 승리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머물고 있던 프랑코와 스페인 군부가 반란을 을으킵니다. 암호명 "스페인 전지역 쾌청함"
1936년 7월 20일 반란군의 사령관이었던 산후르호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반란군 측의 지휘 체계는 양분되어 북방에서는 에밀리오 몰라가, 남방에서는 프란시크코 프랑코가 지휘권을 갖게 됩니다.
1936년 7월 21일 반란군은 스페인 해군의 기항 페롤을 점령합니다.
1936년 7~9월 몰라 휘하에 있던 베오르레기 카네 대령은 스페인 북부의 기포스코아 주를 점령하였습니다.
1936년 9월 21일 살라망카에서 회합을 가지진 반란군은 프랑코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합니다.
1936년 9월 27일 톨레도에서 벌어진 알사자르 공방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자 반란군은 전황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936년 10월 반란군은 마드리드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1월 8일에 주요한 전투가 시작되었고, 11월 27일까지 3,000여 명의 국제여단이 지키고 있는 마르리드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마드리드는 그후로도 2년동안 고립된 채 반란군들과 싸웠습니다.
1937년 2월 21일 국제연맹의 불간섭 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파시스트 축의 외국 병력 참전은 불법 교전으로 간주되었으나, 3월 7일 나치 독일은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콘도르 군단을 파병하면서 하인켈 He 51 전폭기를 스페인에 투입하였습니다.
1937년 4월 26일 독일의 전폭기는 케르니카를 폭격하여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고, 프랑코는 케르니카를 함락하였습니다.
1937년 7월 3일 공화군은 반란군의 부사령관 에밀리오 몰라를 사살하였고, 이후 브루네테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마드리드의 반란군 포위를 분쇄하였습니다.
1937년 8월 프랑코는 아라곤을 공격하여 산탄데르를 점령하였습니다. 이후 2달간 벌어진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스페인 북부지방을 점령해 나갔습니다.
1937년 11월 공화파 정부는 바로셀로나로 옮겨지게 됩니다.
1938년 2월 반란군의 군대가 테루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내전의 상황은 반란군 측에 유리하게 되었습니다.
1938년 3월 프랑코 반란군은 아라곤 공격을 감행하고, 4월 17일 지중해 연안까지 진격함으로써 정부 진영은 남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1938년 5월 정부는 강화조약을 요청하였으나, 프랑코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고 발렌시아를 압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38년 7월 까지 정부측 공화군은 XYZ방어선을 사수할 수 있었습니다.
공화국 정부는 에보트 전투가 진행중이던 1938년 7월 24일 부터 11월 26 대대적인 지원을 호소하였으나, 실패하고 아프리칸 군단이 추축이 된 4만명의 프랑코나 군대를 상대로 패배하게 됩니다.
1939년 2월까지 반란군은 카탈루냐 지방을 점령해 나갔고, 2월 27일엔 영국과 프랑스가 프랑코 체제를 인정하였습니다.
마드리드를 비롯한 몇몇 지역만의 공화군의 지역으로 남아 있었으나 1939년 3월 7일에는 마드리드 내의 공화파 내의 비 공산당 세력이 공산당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또다른 내란이 발생하였습니다.
1939년 3월 28일 반란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하였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결과
내란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는 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공화파 전사자 11만, 국민파 전사자 9만, 부상자 100만,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1만, 영양실조에 의한 사망 2만 5천, 후방 지역에서 암살이나 처형당한 상대 진영 지지자 18만 이상 등입니다.
내전이 끝나고 수천명의 공화군이 투옥되었고, 최소 30,000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노역을 해야만 했습니다.
공화파의 상당수가 망명하였고, 프랑스로 피신한 사람의 수는 50만명에 달했습니다.
1944년 프랑코에 대항하는 게릴라인 스페인 마퀴스가 결성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와 연대하여 나치에 맞섭니다.
이후에도 인민전선파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고, 아울러 공화파를 지원했던 바스크어와 카탈루냐어는 공공장소에서의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인민전선파의 스페인 망명정부는 멕시코에서 1976년까지 존속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총통이 된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일인독재 정치를 계속하였습니다.
독재기간 동안 자유주의자, 노조 가맹원,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지식인들, 공화파 진영에 친지를 둔 사람들을 잡아들여 처형하였고, 이러한 행위는 교회와 우익 매체에 의해 "스페인 내부의 병적 요소들의 척결과 정화"라는 명목으로 자행되었습니다.
프랑코 사후 부르봉 왕가가 복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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