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일요일 사건(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 크로바보예 보스크레세니에)은 1905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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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 사건(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 크로바보예 보스크레세니에)은 1905년 1월 22일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유혈사태를 말합니다.
러시아 제국 당시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노동자들의 탄원 집회였습니다.
니콜라이 2세에게 탄원을 하기 위해 겨울 궁전으로 평화적인 청원 행진을 하는 것을 정부 당국에서 동원한 근위군이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입니다.
불평등한 사회체제로 억눌린 러시아 민중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와 기독교 성화상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손에 들고 비폭력시위를 벌였는데, 당시 실권자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유혈진압이라는 가혹한 탄압을 가한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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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왕궁 행진과 근위군 발포, 출처 : 나무위키
피의 일요일 사건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 탄원 집회
주동자 게오르기 가폰
1905년 1월 22일
출처 입력
죽은 사람만 500∼600명, 부상자 수천 명이나 된 대규모 유혈사태였습니다.
주동자는 사회개혁론자이자 러시아 정교회 사제인 게오르기 가폰 신부였습니다.
피의 일요일의 학살은 ‘1905년 혁명’을 활성화시킨 국면의 시작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1905년 혁명의 시작은 라이오닐 코찬과 같은 사학자는 그의 저서 《1890-1918년 러시아 혁명》(Russia in Revolution 1890-1918)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끈 핵심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이끈 사건
라이오닐 코찬 그의 저서
<1890~1918 러시아 혁명>
출처 입력
피의 일요일 사건의 배경
출처 입력
세르게이 주바토프(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Зубатов)
출처 입력
세르게이 주바토프는 러시아 제국의 사상 경찰로 일했고, 경찰국 특수과(Особый отдел)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특수과는 러시아 제국의 지지기반을 위협하는 이들을 수색및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 방첩, 사상범 등 위험인물 색출, 출판물에 대한 사상검증 등 정치와 관련된 넓은 분야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경찰국장에게 직통으로 보고할 수 있던 경찰조직으로 그 중요성과 큰 권한으로 인하여 관련 인물들 내에서 '경찰청의 뇌', 혹은 '경찰청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이들의 주요 임무는 러시아 내의 혁명 세력을 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특수과에선 1886년 가을부터 주바토프를 '프락치'로 보내 그가 비밀 정치 단체나 혁명 조직에 접근해 그들의 신뢰를 쌓으며 내부 정보를 유출시키도록 지시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언변이 뛰어나 혁명사상에 동조하던 여러 인물들을 여럿 전향시켰으며 또한 그가 유출한 정보를 토대로 모스크바 보안과(Охранное отделение)는 많은 사상범, 정치범, 반동분자들을 체포했고 그들의 단체를 해산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공을 인정 받은 주바토프는 1896년 보안국의 총책임자까지 승진했으며 후로도 정치범, 사상범 수사 시스템을 개혁하거나 1900년에 민스크에서 러시아 정치자유노동당의 리더들의 체포, 그 다음해에는 사회주의혁명가 북부동맹을 와해시키고 그 리더인 안드레이 아르구노프(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ргунов)를 체포하는 등 여러 공적을 연달아 세웁니다.
세르게이 주바토프
러시아 제국 경찰국 특수과 사상경찰
러시아 내 혁명 세력 억제
'프락치'로 비밀 정치 단체 혁명 조직 접근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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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바토프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을 알아채게 됩니다.
체포된 이들이 자신들 행위의 이념적, 정치적 의미에 대한 이해 여부가 그들의 계급과 명확히 일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인-혁명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으나 정작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요구하는 정치적 개혁은 커녕 사회주의, 자유주의 등의 사상에 대해 이해도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에 의문을 품은 주바토프는 개인적으로 혁명, 반체제 사상들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엘리트-혁명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적 교리와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결합시키고 노동자들이 폭력 혁명을 따라야만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선동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세르게이 주바토프의 연구
지식인-혁명가 정치적 이념적 교리
+ 노동자 경제적 요구 =>
노동자 폭력 혁명 경제 해결 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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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이 둘을 분리시키고 정부가 노동자의 편에서 그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만 혁명세력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세르게이 주바토프의 해결방법
지식인-혁명가, 노동자 분리
+ 정부가 노동자의 경제적 문제 해결
=> 혁명세력 억제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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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러한 사상으로 경찰의 통제 하에 있는 온건한 노동 운동을 위한 노동자 조직들을 창설하겠다고 계획했고 이를 주바톱시나(Зубатовщина)라고 합니다.
주바토프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습니다.
1. 혁명적 교리를 진화적 교리로 대체하고 혁명가들과는 달리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한다.
2.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정부형태로서의 전제정이 계급에 상관없이 중재적 성격을 띄고 있으며 폭력에 적대적이며 공정하다는 점을 이해시킨다.
3. 사회주의적 원칙에 기초한 혁명적 노동 운동과 자본주의 구조에 기초한 직업운동의 차이점과 전자는 사회 전계층의 개혁뿐이지만 후자는 즉각적인 이익이라는 것을 이해시킨다.
4. 개인의 권리가 공권력의 경계를 넘는 것은 용납할 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공권력으로 향하거나 그것을 통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시킨다.
세르게이 주바토프의 해결방법
노동자 조직 창설
주바톱시나(Зубатовщин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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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노동자 그룹 상호지원 공동체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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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바토프는 1901년 5월 한 노동자 그룹에 모스크바 총독부에 상호지원 공동체를 설립을 요청했습니다.
모스크바 경찰청장이었던 드미트리 트레포프는 이를 승인했고 기계 생산 노동자들의 상호협력 협회(Общество взаимопомощи рабочих механического производства)가 창설되었습니다.
창립멤버 중 몇몇은 과거의 사회민주당원이었습니다.
정부의 주도 하에 노동자들에게 비스마르크의 노동법, 시드니 웨브 , 비어트리스 웨프(Beatrice Webb) ,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 하인리히 헤르크너(Heinrich Herkner) 등의 온건 사회주의, 노동 문제에 대한 서적들이 제공되었습니다.
기계 생산 노동자들의 상호협력 협회 창설
19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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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9월 기계 생산 노동자 소비에트(Совет рабочих механического производства)가 창설되었습니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주바토프였고 경찰의 비밀요원들이 간부직에 앉음으로서 주바토프는 조직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비에트는 근로자들의 민원을 접수하고 공장주들로부터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스크바 주정부 역시 소비에트의 편에 서서 공장주들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1902년 2월 협회는 비단 제조소 노동자들의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냄으로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주바톱시나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의 전파는 완전히 중지되었고 훗날 소련의 역사가들마저도 주바톱시나의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기계 생산 노동자 소비에트 창설
주바토프 주도 조직 통제
주바톱시나를 통해 사회주의, 공산주의 전파 중지
19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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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바토프, 주바톱시나를 통해 전유대 노동자 연합 '분드' 와해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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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바톱시나가 막은 또다른 혁명 조직은 유대계 노동자 조직이었습니다.
1898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전유대인 노동자 연합(Всеобщий еврейский рабочий союз в Литве, Польше и России)', 통칭 분드(Бунд ; בונד)라고 불리는 유대계 사회주의 조직원들이 대거 체포되었습니다.
해당 조직원들을 심문한 주바토프는 이 조직의 체계성과 규모에 경악했습니다.
이후 주바토프는 분드 조직 색출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는 체포된 분드 조직원들에게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의 차이를 설명하고 전자의 장점과 후자의 해악을 증명하여 설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체포된 이들은 석방되었고 이들은 분드 내에서 분열을 야기하였습니다.
기존 분드 지도부는 이들을 강력히 비난하였고 결국 이들은 분드를 떠나 자신들만의 새로운 조직 창설을 발표했습니다.
1901년 7월 민스크에서 유대인 독립 노동자당(Еврейская независим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이 창설되었습니다.
경찰은 이쪽 지도부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놓고 통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진심으로 정부와 싸우는 것보다는 협력하는 것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데 더 유용하다고 믿었습니다.
주바톱시나 조직들은 모스크바, 민스크, 오데사 등 여러 대도시로 퍼져나갔으며 노동자들은 황제를 찬양하며 친정부 시위를 벌였습니다.
민스크에서 유대인 독립 노동자당 창설
19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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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2월 19일 농노 해방령이 발표 기념일에 모스크바에서 노동자 5만 여명이 크렘린 근처나 알렉산드르 2세 기념비로 가서 러시아 제국의 국가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를 불렀습니다.
반대로 러시아에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몇몇 해외 자본가들은 모스크바 경찰이 파업을 장려하고 있다고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에게 불만을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사회민주노동당을 필두로 사회주의 계열 혁명조직들은 주바톱시나가 그저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기 위한 경찰의 함정이며, 여기에 가담한 일부 노동자들, 교수 및 학자들이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고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언론을 통해 퍼뜨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바톱시나는 러시아 제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습니다.
다만 이는 순수하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 내무장관 드미트리 시퍄긴과 후임인 뱌체슬랴프 플레베 등은 주바톱시나를 고평가했고 지원해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나치게 실험적이고 잠재적인 위험이 크다고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어쨌든 최소한 1903년 이전에는 장관급에서는 대체로 지원해준 편입니다.
게오르기 가폰의 등장
출처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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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아폴로노비치 가폰, 출처 : 나무위키
1894년 게오르기 아폴로노비치 가폰(Георгий Аполлонович Гапон)은 성직자가 됩니다.
1899년 그는 수도의 '자비의 성모 교회(Церковь Милующей Божией Матери)'의 설교자로 일하게 됩니 다.
가폰의 봉사와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았고 그 수는 이천 명에 달하였습니다.
가렐나야 항구는 수도 부랑자들과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설교와 선교, 봉사활동을 계속해 나가면서 점차 가폰은 노동이야 말로 삶의 근원이자 진리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랑자들, 난민들, 빈민들과 마주하면서 가폰은 이들을 진정으로 돕고 구원할 방법에 고민하게 됩니다.
1900년 가폰은 성 올가 고아원과 청십자 대피소의 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시설들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상류층들의 기부, 자선과 후원으로 운용되던 단체였으며 가폰은 러시아의 상류층 인사들과 정교회 고위 사제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성직자 중에서는 미래의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세르기도 있었습니다.
가폰은 수도의 노동자와 빈민들을 위해 일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는 그런 이들을 보호할 만한 수단과 장치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시대 러시아 제국의 하층민들이 겪는 수많은 불의와 불합리함, 어려움을 보았으며 이로 인해 권력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직자 게오르기 가폰
부랑자 난민 빈민들을 돕고 구원할 방법 고민
러시아 제국 하층민들의 불의와 불합리 목도
권력자들에 대한 적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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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02년에 실업자들과 부랑자들의 회생을 위한 새로운 지원 시스템을 고안하였습니다.
이는 황후에게까지 전해지고 시장인 니콜라이 클로이겐스에 의해 승인되었지만 실질적인 이행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해 가폰은 후원자들과의 의견 충돌로 있해 청십자 대피소의 원장 자리에서 해임됩니다.
그리고 그때 빈민들이 부유층의 저택에 돌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과거의 후원자 중 한명이었던 니콜라이 아니츠코프는 이를 자신의 해임 결정에 분노한 가폰이 빈민들을 선동해서 일으킨 일이라 생각하고 경찰에 그를 고발합니다.
가폰은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주바토프와 가폰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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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혁명세력들의 비방과 협박으로 인해 주바토프는 학자, 교수들을 가담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직자들로 눈을 돌렸습니다.
또한 가장 큰 문제는 조직이 성장함에 따라 제대로 된 수뇌부를 만들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성직자면서 수도 노동계에서 인망이 있었던 게오르기 가폰 신부는 최적의 인물이었고 1902년 그를 만나 포섭하려고 설득했습니다.
주바토프
가폰을 주바톱시나 수뇌부로 포섭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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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폰은 이에 대해 신중한 반응을 보였고 확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그곳의 주바톱시나 조직 간부들과 만났습니다.
또한 과거에 주바토프의 감독 하에 노동자 강의를 했으나 떠난 한 기자를 만났고 그에게서 이 조직이 '노동자 계급과 인텔리겐치아를 분리시켜 정치 운동을 죽이기 위해 경찰이 조직한 함정'이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주바톱시나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범죄적'이며 '자칭 인민의 보호자들이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가축처럼 대한다고' 여겼습니다.
때문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서 주바토프에게 이 정책이 노동 운동 참여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으며, 노동 조건을 진정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영국처럼 완전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을 창설하는 것이라는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또한 관구장주교 안토니에게도 같은 내용과 여기에 성직자들이 참여하는 것은 교회의 신용을 떨어뜨릴 뿐이라고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가폰
주바톱시나를 노동자와 인텔리겐치아를 분리하는 조직으로 인식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 창설 주장
성직자의 주바톱시나 참여 반대
출처 입력
안토니는 가폰을 지지했고 이후 성직자들의 주바톱시나 참여를 막았습니다.
또한 수도 시장인 니콜라이 클레이겔스에게도 같은 내용을 보냈고 시장은 가폰을 지지했습니다.
이는 주바톱시나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바톱시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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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으로 인한 국내 상황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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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 정부는 아카시 모토지로를 통해 러시아 안팎의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해 거금을 지원해주면서 러시아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확장코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긴 주러 일본공사관을 거점으로 하여 '러시아 내란 공작'을 실행, 아카시 모토지로가 주로 담당하였고 러일전쟁 직전인 1월, 참모본부 차장 아다마 겐타로는 러시아 국내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아카시에 대해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오데사에 비러시아인 외국인을 정보제공자로 2 명씩 배치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발령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 국내외의 여러 거물 혁명가, 좌익 운동가, 불평분자등과 접촉해 그들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해주었습니다.
일본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가폰 신부나 공산주의 사상가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아나키즘 사상가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폴란드(당시 프리비슬린스키) 민족주의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핀란드(당시 핀란드 대공국) 독립운동가 실리아쿠스, 소설가 막심 고리키, 그루지야(조지아)·라트비아·벨로루시 등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의 민족주의 지도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일본의 지원을 시작으로 세력을 일군 이들은 정치적으로든 아니면 개인적인 대의를 품어서든 일본의 목적대로 러시아 내에서 공산주의와 노동자를 위시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일본 정부, 러시아내 공산세력 등 지원
공산주의와 노동자 세력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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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주목할 점은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성향을 막론하고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은 대게 1861년의 농노제 폐지로 타격을 입은 몰락귀족, 하급귀족들이었고 개중에는 상당한 숫자의 노동자들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귀족, 인텔리겐치아, 학생, 노동자들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정치 세력이 부상하면서 러일전쟁에서의 열세로 권위가 떨어지고 있는 차르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1904년 8월 자유주의적 성향의 표트르 스뱌토폴크미르스키에게 내무장관직을 주고 귀족들에게 약간의 양보를 할 의향이 있음을 알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적 인텔리겐치아 집단인 해방 연합(Союз освобождения)의 주도로 11월 젬스트보 활동가 총회가 소집되어 선출식 대의제의 도입을 차르에게 요구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또한 이와 연계해서 34개 도시에서 좀 더 작은 규모의 회의가 소집되었고 같은 내용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니다.
비슷한 내 같은 달 말에 모스크바 귀족원에서도 선출 대의제를 요구하라는 내용의 비슷한 내용의 결의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이러한 귀족들의 정치 공세에 맞닥뜨린 니콜라이 2세는 모스크바 귀족원장 표트르 트루베츠코이 공작에게 "농민은 헌법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차르의 손이 묶였다는 것은 이해할 겁니다"고 전제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혁명의 위험을 증대시킨다고 경고했습니다.
또한 러시아 육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도 트루베츠코이 공작에게 "만약 모스크바인들이 적을 빠르게 무찌르기 위해 자신들의 훌륭한 아들들을 보내기를 원치 않는다면, 최소한 우리가 만주 들판에서 승리의 끝까지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항의했습니다.
귀족, 인텔리겐치아 학생, 학생, 노동자 등
정치세력 부상 =>차르에게 압력
니콜라이 2세 혁명의 위험 증대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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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릴로프 기관 공장 노동자 4명 부당해고 ,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역 총파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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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로프 기관차 공장에서 노동자 4명이 노조 회원이라는 이유로 부당해고를 당했습니다.
이에 대해 가폰 신부가 설립한 노동자 단체는 회사 측과 정부에 노동자들을 즉각 복직시키고 해고를 명령한 관리자를 해고하라고 요구했지만 회사 측은 노동자 단체의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1905년 1월 15일 노동자 600명이 푸틸로프 공장 앞에 모여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보장, 노동자 조직 인정과 더불어 자신들을 협상 대상으로 받아들일 것 등을 요구했지만 사측에서는 이마저도 무시했습니다.
이튿날인 1월 16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총파업을 위한 파업대책위가 구성되었고 푸틸로프사의 노동자 1만 2천 명이 파업에 나섰습니다.
17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의 대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였고 20일과 21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역에서 총파업이 실행되었습니다.
노동자 15만 명이 총파업에 동참하여 교통, 우편, 신문 등이 모두 멈추자 도시 전체가 마비되었습니다.
푸릴로프 기관 공장 노동자 4명 부당해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역 총파업
가폰 청원서 행진 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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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분노가 끓어올라 폭동이 일어날 듯하자 가폰 신부는 이들을 다독여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그가 행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비밀투표가 보장되는 평등한 선거권과 이를 통한 제헌의회의 설립
1일 8시간 노동의 준수.
하루 최저임금 1루블 지급.
의료혜택 제공.
가폰은 행진을 계획한 뒤 내무장관에게 청원서 사본을 보내 사흘 뒤에 행진이 있을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날 차르가 민중 앞에서 요구를 들어주는 척만이라도 해도 러시아 민중들의 불만이 많이 완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동아시아만 해도 민중들의 삶이 많이 힘들어지면 왕이 거친 삼베옷을 입고 반찬가지 수도 줄이고 서양에서도 왕이 불만을 품은 백성들을 일단은 쇼맨쉽으로 달래 주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가폰도 온화한 성격을 가진 니콜라이 2세가 민중들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의 진행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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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 22일 노동자들은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급료를 올려 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러시아 제국의 국가를 부르면서 눈길을 걸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겨울 궁전으로 향했습니다.
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30만 명을 넘어섰는데 당시 노동자들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비참한 삶에서 유일한 희망이자 아버지라고 믿은 황제에게 자신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보이면서 행진하였습니다.
황제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대다수 참가자가 교회에 갈 때처럼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왔고, 행렬 앞에서 이콘과 황제의 초상을 들고 러시아 제국의 국가나 왕조의 번영을 위한 기도와 노래를 부르면서 갔고 아예 어린아이를 포함한 일가족이 다 함께 나온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행렬을 최선두에서 이끌었던 것은 러시아 정교회의 게오르기 가폰 신부였습니다.
가폰 노동자들과 함께 청원서 들고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으로
1905년 1월 22일
출처 입력
그러나 이때 황제 일가는 시위 전날인 토요일에 시외에 있는 차르스코예 셀로 별궁으로 휴가를 떠나 황궁을 비우고 있었고, 시위를 진압할 준비가 갖춰졌다는 보고만 전날 밤에 받았습니다.
황궁을 비롯한 주요 거점에는 근위연대를 비롯해 급히 배치된 1만에 달하는 군대만 대기하고 있었고, 경찰 당국에서는 차르가 황궁에 없다고 발표하면 행진이 취소되리라는 안일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니콜라이 2세 토요일 시외 별궁으로 휴가
시위 진압 1만명 군대 배치
황제 부재로 행진 취소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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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행진은 벌어졌고, 시위대는 물론 군경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심지어 경찰 다수는 행렬에 참가했고 장교들도 평화로운 시위대를 그냥 통과시켰습니다.
당시 러시아 민중은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 하에 황제 숭배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황제의 권력(왕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또한 러시아 제국의 황제는 동로마 제국을 계승한 기독교(정교회)의 수호자이라는 사상입니다.
따라서 민중은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탄원을 하면 정세가 개선된다고 믿었습니다.
당국은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중심가에 진입시키지 않을 방침이었지만, 너무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진입을 막지 못했고, 결국 겨울궁전을 호위하고 있던 근위연대는 경고도 없이 발포를 명했으며 군대가 일제사격을 가해도 군중이 바로 흩어지지 않자 카자크 기병들이 채찍과 군도를 휘두르며 사람들 속으로 돌입했습니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비무장 상태로 황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평화롭게 행진하고 청원하는 군중들을 어떠한 교섭도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입니다.
황제 찬양 노래 평화 시위대 행진 계속
겨울 궁전 근위연대 경고 없이 발포
카자크 기병 학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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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에 앞서 거행된 파업에 참가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체 노동자 18만 명 중 11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며, 행진 참가자는 6만 명에 달했습니다.
발포로 인한 사망자 수는 불명확합니다.
반정부 운동 측의 보고에서는 4,000명 이상에 이르렀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더 신중하게 추정한 보고에서도 사상자의 수는 1,000명 이상이 됩니다.
사건은 모스크바 시내로 빠르게 퍼졌으며, 시내 곳곳에서 폭동과 약탈이 이루어졌습니다.
가폰이 이 사건 이전부터 조직했던 노동자 집회는 당일 해산되었고, 가폰은 즉시 러시아 제국을 떠났습니다.
가폰은 같은 해 10월에 귀국했다가 이듬해인 1906년 4월에 사회혁명당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미국 출신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댄서 이사도라 던컨은 이 사건 이틀 후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가 이 어수선한 상황을 자서전 《나의 생애》(My Life, 1927년)에 기록했습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 결과 및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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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시민의식의 발달이 뒤떨어졌고 사건이 벌어진 당시까지도 "황제는 하느님의 대리자"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습니다.
가폰 신부의 행진도 황제에게 직접 탄원하면 "자비로우신 황제가 민중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실 것이다." 라는 순진한 기대감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느님과 같이 섬겨 오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비무장 시위대를 상대로 무차별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민중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으며 차르 숭배 관념은 단숨에 무너졌습니다.
러시아 민중의 배신감
차르 숭배 관념 무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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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쪽 변방에서 일본 제국과 전쟁하던 러시아 정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이한 셈이 되었습니다.
사실 쓰시마 해전 등의 압승과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당시 일본은 국력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고 화력의 열세를 군인들의 목숨으로 지불하던 상황 때문에 일본보다 훨씬 강대국이었던 러시아가 전쟁을 좀 더 끌었다면 일본도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러시아 내부에서 터진 이 사건으로 러시아는 여유가 없어지고 서둘러서 전쟁을 끝내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 내부 사건으로
러-일전쟁 일본의 승리로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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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포츠머스 회의에 전권대사로 파견되기도 했던 세르게이 비테는 헌법제정과 의회인 두마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으로 성난 국민을 설득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진정시켰으나 그 정도로는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여겨졌던 제국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결국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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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한제국도 이 사건의 여파가 겹쳐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빠르게 항복해 버리면서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거에 무너지고 일본이 주도권을 쥐면서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5년 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흐름의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관련이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동북아시아 세력균형 일본으로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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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 일본, 대한제국, 더 나아가서는 세계와 역사의 운명이 흔들린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훗날 러시아 혁명의 발단 중 하나가 되어 '러시아 1차 혁명' 또는 '1905년 혁명'으로 불리기도 합니.
마침 이 사건이 일어난 1905년은 러시아 혁명의 시초로 평가받는 포템킨 반란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합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혁명 이후 가족들과 함께 혁명군에게 처형당했으며, 다만 니콜라이 2세 부부와는 다르게 자녀들은 정치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고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세간의 많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때 시작된 러시아의 공산주의 운동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2월 혁명, 10월 혁명)의 원동력으로 성장해 갑니다.
성난 제정 러시아 민중들이 사회주의 혁명인 10월 혁명을 주도하게 됨에 따라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은 가속화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2월 혁명 10월 혁명
로마노프 왕조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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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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