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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1.21사태

1.21 사태

1·21 사태(-事態)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에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입니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생포된 김신조, 출처 : 나무위키

 

1.21사태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

청와대 기습 대통령 박정희 암살 미수

유일 생포 김신조, 김신조 사전

1968년 1월 21일 ~ 1968년 1월 31일

1월 17일 밤 휴전선을 넘은 무장공비들은 21일 밤 9시 30분경에 서울 청운동 세검정 부근, 청와대 앞 500미터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창의문 근처에서 있었던 경찰의 불시검문에 불응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무장공비들이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장군인과의 총격전 총알이 박혀 있는 나무, 청와대 뒤 북악산, 출처 : 위키백과

이들을 잡기 위해 비상경계태세가 내려진 가운데 군경합동 소탕작전을 벌인 결과, 31명 중 29명이 사살되었고 1명은 북으로 도주하였으며 1명이 생포되었습니다.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

29명 사살, 1명 북으로 도주, 1명 생포 김신조

그 와중에 민간인을 포함해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민간인 포함 30명 사망 52명 부상

이 사건의 결과로 향토예비군,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 684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교련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대통령 경호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까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사건 이후의 영향

향토예비군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 창설

고등학교 대학교 교련교육 실시

인왕산 북학산 청와대 앞 길 일반인 통행 금지

북한은 사건 관련성을 전면 부인하였으나 생포된 김신조는 방송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고 말해 국민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복수를 위해 특수부대인 684부대를 창설하였으나 계획이 취소되며 무관심속에 부대원들을 방치하였는데, 그 결과 71년에 '실미도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중앙정보부 684부대 창설

=> 71년 실미도 사건으로

1.21 사태의 배경

1964년 8월 7일 통킹 만 사건을 일으킨후 이를 구실로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미국은 한국에 참전을 요청하였습니다.

참전요청을 받은 한국은 1965년 7월에 전투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파병인원을 평균 5만 명 수준으로 유지했으며 누적파병 총인원은 약 32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파병에 따른 미국의 경제지원과 더불어 베트남 특수를 누렸으나 국군전력이 약화되었습니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점

누적 총 파병 인원 약 32만명 기록

국군전력 약화

이를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북한은 국내외 여러 정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흐르자 대남공작을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비무장지대에서 도발을 일삼았고 어선들을 납치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1967년 1월에는 동해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650톤급 해군 경비함이 북한의 해안포 공격으로 격침되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북한의 대남공작

비무장지대 도발 어선납치

해군 경비함 해안포 포격 격침

124부대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게릴라전 특수부대인데, 대남 적화공작에서 적극적으로 유격전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1967년 4월에 창설되었습니다.

일반 군부대에서 선발된 척후병·통신병·운전병등과 제283군부대 및 집단군 도보정찰소에서 엄선된 정예병 2,40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연산과 상원 일대의 8개 기지에 300명씩 분산되어 적배치상황이론, 지뢰 극복을 위한 정찰병 기본 동작, 지형학, 사격, 침투훈련 등을 받았습니다.

북한 124부대 창설

대남 적화공작시 적극적 유격전 활동 전개 위해

2,400명으로 구성

1967년 4월

1968년 1월 2일 민족보위성으로부터 청와대·미대사관·육군본부·서울교도소·서빙고 간첩수용소 등을 일제히 습격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북한 민족보위성

청와대, 미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 일제 습격 작전 준비 지시

1968년 1월 2일

이에 따라 25명의 유격대원을 엄선하여 그 해 1월 5일부터 황해도 사리원으로 이동하여 습격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1월 13일 기습목표가 최종적으로 청와대로 결정되었고 정찰국장 김정태가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내렸습니다.

남파 특공대 규모는 31명이었으며 전원 함경도 출신의 장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북한 정찰국장 김정태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

남파 특공대 31명 전원 함경도 출신 장교로 구성

1968년 1월 13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는 여러 정보루트를 통해서 북한의 침투 정황들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으며 곧 북한이 남파간첩을 대규모로 남하시킬 것이라고 1967년 10월부터 청와대에 정식으로 수차례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이러한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무장공비가 침투하기 불과 2주 전인 1968년 1월 6일 강원도 원주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전군경지휘관 200여명이 참여하는 대간첩 작전회의인 비상치안 회의를 개최했는데 목적은 남파간첩 시도를 철저하게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상치안회의의 결과 전 군경에 대간첩작전을 위한 비상경계태세를 내려서 출동명령이 내려오면 즉시 대간첩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를 유지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1월 13일 대한뉴스 방송으로 대규모 남파간첩 침투의 징조가 있으며 이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고 있음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알리고 적대 집단인 북한에도 공개적으로 천명한 상태였습니다.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남파간첩 남하 청와대에 보고

1967년 10월 부터

박정희 대통령 비상치안회의 개최

1968년 1월 6일

1.21 사태의 전개과정

남파 특공대는 국군의 복장으로 위장한 후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새벽에 개성을 출발해 1월 18일 새벽에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종로 경찰박물관에 전시된 124부대의 당시 복장입니다.

군모에 대한민국 국군 대위 계급장을 달아 한국 육군으로 위장 시도를 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방망이에 못이 빼곡히 박혀 있는데 청와대에 진입할 때 청와대 경비병력을 조용히 제압하기 위해 가져왔다고 합니다.

124 부대 복장 재현, 종로 경찰박물관에 전시된 124부대 당시 복장, 출처 : 나무위키

 

남파특공대 군군 복장 위장

수류탄 기관단총 무장

1968년 1월 17일 개성 출발

1968년 1월 18일 휴전선 군사분계선 월남

미2사단과 25사단의 전투지경선상의 철도망을 절단한후 침투하였고 얼어있는 임진강을 걸어서 건넜습니다.

문산 부근의 파평산 앵무봉을 거쳐 진출하던 남파특공대 124부대는

19일 14:00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쳤고, 이에 북에 무전을 쳐서 어떻게 할지를 물어봤으나 회신된 암호를 풀지 못해 다음의 이유로 투표를 통해 살려 주기로 결정합니다.

눈 덮인 산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번거롭다는 이유

형제들이 나무꾼이었기에 죄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보였기에 동정심을 느꼈다는 이유

우씨 형제 중 한 명이 거짓으로 김신조 일당을 인민해방을 위해 북에서 내려온 전사들이라며 환영하는 척했는데 이에 넘어갔다는 이유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 야산

나무꾼 우씨 4형제 살려줌

파출소 신고 대한민국 정부 대응 시작

1968년 1월 19일

이후 남파 특공대 124부대는 구파발의 진관사, 삼각산의 승가사를 지난 이들은 21일 밤 9시 30분경에 청와대 인근까지 잠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임진강 -> 문산 부근 파평산 앵무봉 -> 구파발 진관사 -> 삼각산 승기사 거쳐

청와대 인근까지 접근 성공

1968년 1월 21일

일명 김신조 루트, 남파 특공대 침투로, 출처 : 나무위키

남파 특공대 124부대는 사복 환복 후 서울 시내로 돌입하였습니다.

청운동의 세검정 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한 후 도주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울 종로경찰서장이 총격으로 사망하였고, 사건 당시 올라오던 시내버스 2대를 병력으로 오인한 남파 특공대 124부대가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고 도주하였습니다.

청운동 세검정 고개 창의문 통과시도

경찰 불심검문에 수류탄 기관단총 저항 후 도주

1968년 1월 21일 22:05

한국 정부는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군경을 출동시켜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도주한 무장공비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1월 31일까지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하였습니다.

한국 정부

비상경계태세 확립

군경합동수색작전 전개

1968년 1월 31일까지 경기도 일대

그 결과 침투한 무장공비 31명 가운데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투항하였으며, 한 명은 도주하여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

29명 사살, 1명 북으로 도주, 1명 생포 김신조

그 와중에 민간인을 포함해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민간인 포함 30명 사망 52명 부상

투항한 김신조에 대한 수사를 통해 이들 무장공비가 북한에서 남파되었다는 사실과 침투목적등이 자세히 밝혀졌습니다.

1.21 사태 이후

당시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발표한 뒤 시신인수를 거부했습니다.

1월 24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261차 군사정전회의 본회담에서 북한측은 한국이 휴전 당사자가 아니므로 1·21사태는 본회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등의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중앙당 연락국장 이효순, 민족보위상 김창봉, 총참모장 최광, 대남공작총책 허봉학 등을 숙청했습니다.

이후 대남공작은 비서국의 담당비서제로 맡겨졌습니다.

청와대 기습작전이 실패했으나 대남공작을 단념하지는 않았습니다.

1월 23일에는 미군의 정보함 푸에블로 호를 원산 앞바다에서 납치했고, 그해 10월 30일부터 11월 2일에 걸쳐 걸쳐 울진,삼척 지역에 120명의 무장공비를 침투시켰습니다.

북한

사건 부인 대남 공작 계속

1968년 1월 23일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 호 납치

1968년 10월 30일 ~ 11월 2일 울진 삼척 지역

120명의 무장공비 침투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습니다.

주민등록번호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주민등록 번호 뒷번호는 100001, 육영수 여사는 200002입니다.

이에 따라 예비군과 5분대기조,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병사 복무기간이 육군과 해병대는 6개월(36개월), 해군과 공궁은 3개월(39개월)씩 복무기간이 연장되었습니다.

대통령 경호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까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전투경찰대가 창설되었습니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특수부대인 684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미국과 소련 사이에 데탕트가 조성되면서 불발에 그쳤습니다.

푸에블로호 사건과 달리 미국의 반응이 적극적이지 않았고 한국군 단독으로 작전통제 필요성이 부각되자, 박정희는 미국에 작전권 환수를 처음으로 요구했습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서울특별시청에서는 1971년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청도군청 근처에 문서보존소를 신설했으며, 2019년 은평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 개원한 서울기록원으로 문서를 모두 이전할 때까지 문서보존소를 운영했습니다.

대한민국

주민등록번호 탄생

향토예비군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 창설

군 복무기관 연장

고등학교 대학교 교련교육 실시

인왕산 북학산 청와대 앞 길 일반인 통행 금지

또한 중앙정보부는 복수를 위해 특수부대인 684부대를 창설하였으나 계획이 취소되며 무관심속에 부대원들을 방치하였는데, 그 결과 71년에 '실미도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중아정보부 684부대 창설

=> 71년 실미도 사건으로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