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합당
3당 합당(三黨合黨) 또는 보수대연합(保守大聯合)은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 여당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과 제2야당 통일민주당(약칭 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이 합당하고 민주자유당(1995년에 신한국당으로 개칭)을 출범시킨 사건을 말합니다.
이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의 후신들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제1보수 정당의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3당 합당(三黨合黨) 보수대연합(保守大聯合)
집권여당 민주정의당
제2야당 통일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 발표 장면, 출처 : 나무위키
3당 합당의 배경
제5공화국의 후신 세력인 민주정의당(민정당) 세력은 6월 민주 항쟁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으나, 계속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및 군사정권 청산 요구는 이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습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민주화 투쟁 중심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통령 당선
국민들의 민주화 및 군사정권 청산 요구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양김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 때문에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정치권에도 자연스레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의석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1석, 무소속 9석이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집권 여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는 여소야대 국회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1988년 5월 28일 원내 4대 정당 총재 회담, 출처 : 나무위키
여소야대 국면이면서 정당 의석수가 절묘하게 나눠진 결과 어떠한 정치세력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집권 여당이 독식하던 국회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이때 처음 만들어졌고 모든 법률/예산 심사와 국회 통과가 여야 4개 정당의 협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집권 민정당 과반 의석 확보 실패
여소야대 구도 완성
5.18 민주화운동, 언론통폐합, 전두환 정부의 권력형 비리 등 과거 군사 정권의 더우운 면을 파헤치는 국회 청문회가 TV 생중계로 보도되면서 전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게 됩니다.
곧바로 전두환 일가와 측근들의 비리에 대한 검찰의 수사로 전두환의 수하들 수십여 명이 구속되거나 정계에서 강제 퇴출됐으며 전두환은 백담사로 사실상 귀양을 떠나야 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언론통폐합, 전두환 정부 권력형 비리 국회 청문회 TV 청문회
구속 퇴출 전두환의 백담사 귀양
이와 함께 사회 각 분야에 민주화 분위기가 몰아치면서 국민 성금으로 한겨레가 창간되었으며, KBS와 MBC는 그동안 독재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것을 반성하는 프로그램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뉴스비전 동서남북과 MBC 리포트 등 본격적인 시사 프로그램들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국민 성금 한겨례 창간
독재 정권의 나팔수 KBS MBC 반성 프로그램 방영
또 그동안 정권의 탄압 속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오던 노동자들이 1987년 6월 항쟁 직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점으로 봉기하여 경제 성장에 기여한 자신들의 대가를 요구하면서 전투적 노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맞물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프로야구 선수들은 선수 노조 결성을 시도했으며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약칭 경실련)이 등장하면서 시민 운동이 태동했습니다.
학생운동권과 재야에선 그동안 금기시되던 남북통일 논의에 불씨를 당기면서 1988년 6.10/8.15 남북학생회담 투쟁이 벌어졌고, 1989년 한 해에만 문익환 목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 여러 건의 방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즉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억압에 의해서 감춰졌던 열망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제히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 운동 격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탄생
프로야구 선주 노조 결성 시도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장
문인환 목사, 전국대학생대표자 협의회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방북
노태우 정부와 민주정의당 검찰과 군부 등 권력기관 들과 보 언론 등의 기득권 세력등은 이 상황을 우려스럽게 바라 보았으며,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에 마땅한 차기 대권 주자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노태우 대통령의 지지율도 제5공화국 비리 공개 및 1988년 서울올림픽과 함께 들이닥친 부동산 가격 폭등과 물가 상승 등으로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노태우와 민주정의당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해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합당을 통한 정계 대개편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는 민정당이 1986년 신한민주당에 처음 제안했던 것으로, 당시에는 야권에서 호응이 없어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이 4당 구도로는 각자 본인들의 집권이 요원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던 것입니다. 3당은 1990년 내각제 개헌 등을 조건으로 통합에 합의했으며,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 아래 3당 합당을 발표했습니다.
김영상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4당 구도로 본인들의 집권 요원 판단
3당의 국회 의석 수를 합치면 개헌선인 200석을 훌쩍 넘긴다는 점, 각각 TK, PK, 충청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3당의 통합으로 사실상 호남 외의 지역들이 모두 연합하는 구도가 됐다는 점 등에서 통합 신당은 '괴물 여당'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TK, PK, 충청지역 기반 3당 통합
개헌선 200석을 넘는 거대 여당 탄생
3당합당의 여파로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2년 만에 80%에 육박하는 높은 수치의 지지율을 기록한 적도 있었습니다.
민주정의당의 당시 사정
보수대연합의 기원은 1986년 5·3 인천 사태 때로 돌아갑니다.
당시 학생 운동권의 주도로 열린 민주화 촉구 데모에서 급진적인 단체들이 반미·용공 성향의 주장들을 내놓아 반공 문화가 강하던 한국 사회에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호의적이었으나 체질적으로 보수 정당이던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까지도 이를 규탄하고 나섰는데, 마침 강경 야당 신민당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민정당은 급진 좌파 세력을 막기 위해 보수 정당들이 힘을 합쳐야만 한다며 신한민주당에 보수대연합을 위한 당대당 통합을 제의했습니다.
민정당의 보수대연합 제의는 이후로도 꾸준히 지속됐으나,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보수 야권의 리더들은 민정당이 직선제 개헌 이후 사라질 정당이라고 판단해 무시한데다, 딱히 진보 진영이 정치 세력화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던 탓에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민정당은 1988년 제13대 총선거을 앞두고 27명의 현역 국회의원을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강수를 두며 과반수 의석 확보에 전력투구했지만, 5공 청산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열망이 민정당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호남 지역에서 전멸한 것은 물론 전국적으로 125석(지역구 87석, 전국구 38석)을 얻는 데 그쳤고, 이 후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안 부결 및 국정감사 부활 등 야당에게 정국주도권을 빼앗기면서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집권 민정당 과반 의석 확보 실패
정국주도권 잃고 고전
이에 민정당은 1986년 때부터 주장해오던 보수 정당 대통합을 재추진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민정당은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과 합당하여 과반 의석도 확보하고, 호남 지역에서의 지지 기반도 마련하는 안을 구상하고 추진했습니다.
민정당은 김원기 당시 평민당 원내총무를 통해 5·18 문제 해결에 대한 전권을 주겠다며 합당을 제의했으나, 평민당이 끝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대신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에 합당 제의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1야당 평민당에 통합 추진 실패
제2야당 통일민주당과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에
합당제의
통일민주당의 당시 사정
민주당은 13대 총선에서 23.8%의 득표율로 19.3%를 얻은 평화민주당(약칭 평민당)보다 많은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민당의 70석에 못 미치는 59석으로 제2야당이 되었습니다.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와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가 야권의 차기 대권 주자 자리를 놓고 경쟁 관계에 있던 가운데 이같은 결과가 나오자 김영삼 총재는 위기감을 느꼈고, 4당 구도가 대선 때까지 유지될 시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김영삼 총재는 야권에 남아 김대중 후보와 경쟁하는 대신 여권의 대통령 후보가 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입장을 정리한 김영삼 총재는 민정당과 비밀리에 합당협상을 펼쳤고, 또한 자신의 측근인 서석재가 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 당시 무소속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자 합당의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명은 독재 정부의 후신인 민정당과 함께 할 순 없다며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습니다.
제2아댱 김영삼 총재로 대통령 어려울 것으로 판단
여권 대통령 후보가 되는 방법 선택
민정당과 비밀리에 합당 협상
8명의 국회의원 김영삼과 결별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결성
신민주공화당의 당시 사정
공화당은 13대 총선에서 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 등 35석을 얻으면서 교섭단체 확보에 성공했지만 표밭이라고 할 수 있는 충청도 지역에서 27석 중 15석을 획득하는 데 그치는 부진을 보였습니다.
또한 같은 군사 정권 출신 정당인 민정당과 차별점이 거의 없었고, 2차례 보궐선거에서의 전패와 야당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옛 민주공화당 출신 인사들의 불만 고조로 당을 꾸려나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김종필 총재 본인도 이대로는 더 이상 대권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내각제 개헌에 대한 기대를 갖고 민정당, 민주당과의 합당에 나서게 됩니다.
제3아댱 김종필 총재로 대통령 어려울 것으로 판단
내각제 개헌 기대 3당 합당 추진
3당 통합의 결과
신생 민주자유당은 218석을 보유한 절대다수 정당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했으나, 2년 후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개헌선은커녕 299석 중 149석으로 과반 달성에도 실패하는 참패를 당합니다.
신생 민주자유당 218석 보유 절대다수 야당 등극
1992년 제14대 총선 149석 과반 달성 실패
이는 계파 간 공천 갈등의 여파로 낙천자 중 상당수가 무소속으로, 혹은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를 강행한 결과로 분석되었습니다.
낙천자 상당수
무소속 혹은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 강행 분석
이질적인 여러 계파가 한 당에 섞인 것에 대한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1992년 말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후 야당 및 무소속 의원들을 대거 영입하여 다시 국회 과반수의 거대 여당이 되었습니다.
당선 후 민주자유당 총재를 겸하게 된 김영삼 대통령은 당을 혁신한다는 명분 하에, 민정계와 공화계를 탄압·축출했습니다.
계파 갈등의 여파로 김영삼에 의해 당 내 권력에서 밀린 김종필 등은 1995년에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는 등, 민주자유당은 점점 김영삼당으로 변형되었습니다.
1992년 만 14대 대선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통령 당선
야당 및 무소속 대거 영입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 민정계 공화계 탄압 추출
김영삼 당으로 변형
1995년 김종필 등 탈당 후 자유민주연합 창당
3당 통합의 평가
긍정적 평가
3당 합당이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김영삼이 민자당 당권을 먹고 대통령까지 되어 문민정부가 탄생하였고, 이로 인해 하나회 숙청 등 5공 세력의 상당수를 청산해내고 '역사바로세우기 운동' 등을 통해 쿠데타 명기 등 군부독재의 잔재를 많이 쓸어냈다는 점에서 그 공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았다는 것. 이를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회 숙청은 김영삼 개인의 능력과 더불어 민주계가 민정계를 밀어내고 민자당을 휘어잡았기에 쿠데타 없이 깔끔히 실행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노태우 정부 이후 정권 교체를 통해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이를 우려한 하나회의 역공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김영삼 민주자유당 장악 대통령 당선
하나회 숙청
역사바로세우기 운동
부정적 평가
당시의 여소야대 정국은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민주화의 발자취에 힘입어 마침내 국민들의 힘으로 이끌어 낸 정권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3당 합당은 이러한 국민의 민주적인 의사 표현을 정면으로 배반하였고, 기백명의 정치인들의 야합을 통해 여대야소 정국으로 인위적인 정계 개편을 이룬 것입니다.
즉, 국민이 선택한 정당이 정치 권력을 위해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사건입니다.
3당 합당에 비판적인 언론에서는 이를 '정당 쿠데타'라는 표현으로 묘사하였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국민의 정권심판
3당합당은 국민의 뜻을 거스른 '정당쿠테타'
3당 합당은 "지역주의를 고착화하고 특히 호남을 거의 따돌리기 수준으로 내몰았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 발전에 매우 악영향을 끼쳤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6월 항쟁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여소야대 속에서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을 은폐하기 위한 정권 차원의 호남 비하 공작과 실례들은 많이 약화되었고 13대 대선에서도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모두 지역감정 유발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양김은 몇몇 지역 충돌에 대해 정권의 공작으로 비판하면서 지역 유세를 자제하는 등의 모습도 보여주었는데 3당 합당 이후부턴 다시 지역주의를 자극하는 움직임이 정치권과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고 보는 분석도 있습니다.
3당 합당이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은 지금도 존재하는데 호남은 고립되고 PK와 TK의 연결고리는 강화되면서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부르는 정치 구도가 꽤 오랜 기간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부울경이 어느정도 보수세가 약화되면서 이 경향이 약해졌고, 이는 부산울산의 21대 총선과 22대 총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지역주의 고착화
호남 고립 PK와 TK 연결고리 강화
일명 4자 필승론과 3당 합당은 민주 세력의 두 거목이었던 DJ와 YS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 놓았고 이들이 뭉치지 못하고 당장의 권력에 눈이 먼 듯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민주 세력의 정통성에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나마 4자필승론은 이후 양김의 후회와 반성, 이후 국회의 협공으로 어느 정도 무마라도 되었지만 이 사건은 갈등의 골만 깊어갔지 관계 개선 그딴 거 없었습니다.
때문에 이후 양김은 2009년 DJ 사망 직전 YS가 병문안을 가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기까지 무려 20여 년 가까이 냉랭하게 지냈습니다.
민주세력의 분열과 반목
민주 세력의 두 거목 DJ YS 완전히 갈라서다
당 대표실에 걸려있는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세 분이 당의 뿌리라는데, 그들은 극과 극으로 싸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3당 합당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이 군부독재의 역사로부터 온전히 분리되는데에 실패하였으며, 박정희 정부의 공화계와 전두환 정부의 민주정의당의 역사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는 제6공화국의 보수진영이 변화된 시대에 부합하는 독자적이고 새로운 노선을 구축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으며,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이념이 존속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보수 정당의 역사적 독립성 정당성 상실
독재와 쿠테타의 역사로부터 분리 실패
보수정당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이념 존속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