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마틴 루터 킹 주니어(영어: Martin Luther King Jr. 1929년 1월 15일 ~ 1968년 4월 4일) 미국의 침례회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 흑인 해방 운동가, 권리 신장 운동가 ,기독교 평화주의자, 미국내 흑인의 인권 운동을 이끈 개신교 목사 중 한명입니다.
196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흑인 인권신장 운동에 있어서 비폭력적이고 점진주의적인 방법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1968년 4월 테네시주의 흑인 미화원 파업운동을 지원하러 갔다가 멤피스에서 창탄을 맞고 사망합니다. 범인은 북부 출신의 백인우월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로 지목되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명의 자녀들이 이 나라에 살면서 피부색으로 평가되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받게 되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학창시절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의 침례교 목사 마이클 루터 킹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35년 아버지가 마틴 루터 킹으로 바뀌었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제임스 킹 역시 침례교 목사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집안은 아이리시-아프리카 계열의 흑인이었고, 증조부 나댠 번햄이 침례가 목사가 되고 성을 킹(King)으로 하면서 집안의 성씨가 킹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마틴 루터 킹은 3대째 침례교 목사였지만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자 백인들에게 멸시와 폭행을 당하였고, 어린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인종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소년 시절 이미 신학교 진학을 결심하고 9학년과 12학년을 월반하여 15세 되던 때에 모어하우스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고, 졸업후에는 펜실베니아주 체스터의 크로저신학교를 수료하였습니다. 그후 메사추세츠주로 건너가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신학부에 진학하여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1954년 엘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에비뉴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마틴루터킹 가족사진, 출처 : 나무위키
몽고메리의 버스 보이콧 사태 발생
1955년 백인들은 '몽고메리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에 흑인은 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려고 하였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1955년 12월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시 경찰서에 체포, 연행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함께 이끌고, 버스 이용을 거부했고, 시민들은 카풀을 조직하거나 도보로 이동하였습니다.
보이콧 운동이 계속되자 시내버스업체들은 재정적으로 크게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는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해야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지자들은 반대세력에게 지속적인 위협과 공격을 받았으며, 체포되거나 구속되었습니다. 또한 킹 목사의 사택으로 폭탄이 날아 들기도 하였습니다.
1956년 12월 미국 연방 대법원이 버스 내 인종 분리법의 위헌 판견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몽고메리 시내버스 보이콧 운동은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애틀랜타의 침례교 목사로 있으며 미국 각지의 인권운동을 지원하게되었습니다.
몽고메리 시내버스 보이콧 운동을 통해 미국의 인종 불평등과 킹 목사의 지도력에 국제적인 이목이 쏠리게 되었고,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이 힘을 받게 되었으며, 킹 목사는 국제적으로 흑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진영의 대표 인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는 '자유를 향한 대행진(Stride Toward Freedom)'(1957년) 이라는 책에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 활동을 보고서 형식으로 남겼습니다.
첫 번째 암살시도
1958년 9월 20일 할렘에 있는 블룸스타인 백화점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자신의 책인 자유를 향한 대행진(Stride Toward Freedom)을 홍보하기 위해 책 사인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흑인 여성 이졸라 커리는 "5년 동안 널 찾고 있었다"고 말한 후 칼로 그의 가슴을 찔렀으나, 몇 시간의 수술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이졸라 커리는 편집증적 정신분열을 앓고 IQ가 70밖에 되지 않는 등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었고, 이외의 단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근거없는 망상에 의한 범행으로 결론지어 졌습니다.
킹 목사는 그녀를 용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워싱턴 대행진에서의 연설 'I Have a Dream'
1963년 4월 12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앨라배마주 버밍행에서 열린 항의 데모 때, 스스로 버밍험 시에 찾아가 체포되었으며, 4월 19일까지 구치소의 독방에 투옥되었습니다.
같은 해 8월 워싱턴 DC에서 열려 약 2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 때의 집회의 연사로 참여하여,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은 인종 차별의 철폐와 각 인종 간의 공존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간결한 문체와 평이한 말로 호소해 많은 공감을 불어 일으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연설문 I Have a Dream 중
이 연솔은 존 F.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유명합니다. 이후 여러 지식인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인종 차별 철폐 운동에 비흑인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를 통해 존 F.케네디 대통령의 인권 법안과 차별금지 법안 통과의 실마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노동 운동과 반전운동 참여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차별 철폐운동 이외도 인종차별 철폐, 노동운동, 시민 권익 운동에도 참여, 이를 후원하였습니다.
그는 노동자들이 노동기본권인 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으로써 자본가와 투쟁하는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활발한 사회운동은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자 외에도 미국의 우파와 정부인사들까지 자극하였고, 당시 FBI 국장이자 우파 인사였던 존 에드거 후버는 그를 위험인물들로 규정하여 활동 내역을 감시하였습니다.
그는 1963년부터 베트남 전쟁에서 파병을 반대하는 반전 운동에도 동참하였습니다. 그는 무의미한 전쟁에 젊은이들을 희생시킨다는 점과 베트남 국민들을 학살한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민권법의 통과
1963년 11월 존.F.케네디 대톨령이 암살되었습니다. 케네디가 추진하던 민권법은 린든.B.존슨 대통령에게 넘어갔고, 그해 대선에서 흑인들의 표가 필요했던 그는 민권 법안을 밀어붙이게 됩니다.
1964년 결국 미국 연방 민권법이 압도적인 격차로 통과되어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투쟁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린든.B.존슨 대통령은 1965년 투표권법, 1968년 공정주택법을 통과시키며 미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인종평등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과 그 이후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1963년 타임지 선정 울해의 인물로 지정되었습니다.
1964년 10월 14일, 그는 미국의 인종 차별을 끝내기 위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한편, 그는 흑인의 분리 독립 운동과 폭력적인 시위를 반대하면서 멜컴 엑스 등과 갈등하게 됩니다. 멜컴 엑스 등의 활동의 너무 극단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협박이나 일부 백인 지도자들의 타협 주장 역시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인종분리 철폐를 제1의 목표로 삼고, 부차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이나 투표권 등도 고려하였습니다. 또한 주거권, 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투쟁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또한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도 전개해 나갔습니다.
암살
1968년 테네지수의 흑인 청소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발생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그해 4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멤피스로 내려와 모텔에서 생활하며 흑인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동참하였습니다.
당시,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암살 시도에 대한 소문이 돌았으나 그는 이에 개의치 않았고, 4월 3일 흑인 청소노동자 모임에서도 피신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1968년 4월 4일 멤피스의 한 모텔 2층 발코니에서 미리 침입해 있던 테네시 출신 백인 우월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제임스 얼 레이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사망하였습니다.
미국 대통령 린든.B.존슨은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제임스 얼 레이는 배편으로 영국으로 도망쳤으나 런던 시내에서 체포되어 테네시주 멤피스로 송환되었습니다. 1969년 징역 99년형을 최종 선고 받은 뒤 1998년 옥중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날
1968년 부터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기려 그의 생일인 1월 15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번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정하고 연방 정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이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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