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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1939년 8월 31일 독일-폴란드 국경 지대에 위치한 글라이비츠 방송국(나치 독일)을 셀프 공격한 사건입니다.

SS제주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을 받아 국가보안본부(RSHA)장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알프레트 나우요크스 SS소령에게 지시하여 벌인 자작극으로서, 사건의 전말은 전쟁 기간 내내 묻혀 있다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드러났습니다.

글라이비츠는 현재 폴란드령으로 이름도 폴란드식인 글리비체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에 일어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이 획득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독일령이었습니다.

전후 연합국의 얄타 회담에 따라 독일 동부의 오데르강과 나이세강 동부를 폴란드에 할양하면서 이 도시는 다시 폴란드령이 되었습니다.

 

현재 글라이비츠 라이도 타워 , 유럽에서 가장 높은 목재 건축물 출처 : 위티백과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의 배경

 

1939년 5월 23일, 군 최고 지휘부를 소집한 회의에서 폴란드 공격을 지시한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폴란드가 먼저 도발하여 전쟁을 하게 된 것으로 주장할 명분이 필요했고, 이 공작을 힘러에게 맡겼습니다.

계획은 힘러가 고안하고, 실행은 하이드리히가 맡았습니다. 세부 실행은 SS소령 앞르레트 나우요크스에게 맡겨졌습니다.

작적은 "힘러계획" 이라는 암호명으로 계획되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짜 폴란드군이 방송국을 공격한다. 이 폴란드군은 폴란드군으로 위장한 독일군이다.

방송국을 점령한 폴란드군은 폴란드어로 폴란드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한다(하이드리히가 작성한 선언문)

독일군이 반격을 하여 폴란드군을 몰아낸다.

현장에 폴란드군의 시체를 남겨놓는다.

기자들을 불러 현장의 사진을 찍게 한다.

1939년 8월 10일 하이드리히는 나우요크스를 불러 폴란드와 국경인 고원의 글라이브츠에 있는 독일 방송국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한다. 이 공격은 폴란드군이 아무런 이유없이 방송국을 공격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하이드리히는 "선전을 위해 폴란드의 공격을 증명할 수 있는 물적 증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나우요크스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증언)

1939년 8월 15일 나우요크스는 SS요원 6명을 선발하여 글라이비츠로 향하였습니다. 1937년 이후 독일의 국경 경찰은 게슈타포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밀 보장도 용이했습니다. 그곳에서 나우요크스는 15일간 대기합니다.

1939년 8월 말 나우요크스는 글라이비츠 북쪽 70km 지점의 소도시 오베른으로 소환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게슈타포 장관 뮐러에게서 공격 후 독일군의 반격을 받아 사망한 폴란드군 역할을 담당할 죄수들을 인계받았습니다.

하이드리히는 이들에게 "깡통"이라는 암호명을 붙였으며, 깡통은 뮐러가 강제수용소에서 고른 죄수들이었습니다.

1939년 8월 31일 정오, 나우요크스는 하이드리히로부터 저녁 8시에 작전을 개시하라는 암호 명령을 받았습니다. 암호명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였습니다.

대기하던 나우요크스와 부하들은 폴란드군 군복은 입은채 글라이비츠 방송국으로 쳐들어갔고, 건물 안에 있던 전신기사 한 명과 직원 두명 그리고 경비원 한 명을 포박하였습니다.

8시 12분 나우요크스는 방송을 중단시키고, 예정대로 선언문을 낭독하였습니다. 내용은 폴란드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내용으로 총 4분이 소요되었습니다.

죄수들은 미리 폴란드군의 군복을 입은해 독약 주사를 맞은 상태였고, 나우요크스는 이들에게 도망치다가 총에 맞은 것처럼 등 뒤에서 쏘도록하고, 시체를 남겨두었습니다.

폴란드 침공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국회에서 히틀러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먼저 "국경을 침공한 폴란드"를 맹렬히 비난했고, 다음날인 9월 1일 새벽, 독일군이 일제히 폴란드 국경을 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폴란드 전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우요크를 제외한 이 작전에 가담했던 SS요원들은 전쟁 중에 모두 숙청당하였으며, 사건의 진상은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우요크스가 증언할 때까지 비밀로 묻혀있었습니다.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