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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일본어: 東洋拓殖株式會社 도요 타쿠쇼쿠 카부시키가이샤, 영어: Oriental Development Company, ODC)

동양척식주식회사(일본어: 東洋拓殖株式會社 도요 타쿠쇼쿠 카부시키가이샤, 영어: Oriental Development Company, ODC), 줄여서 동양척식(東洋拓殖) 또는 동척(東拓)으로 불립니다. 1908년도 12월 18일에 설립된 일본의 기업으로, 일본 제국이 조선의 경제 독점과 토지, 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세운 국책회사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뜬 식민지 수탈기관으로, 1908년 제정한 동양척식회사법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척식'이란 '한 국가에서 국외의 미개지를 개척하여 자국민의 이주와 정착을 정책적으로 촉진하는 행위' 즉 식민지 개척을 의미합니다.

자본금 1,000만원이며 대한제국은 설립 자본금의 30%에 해당하는 국유지를 출자했지만 주요 목적은 일본의 식민지로부터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토지와 금융을 장악하고 일본인들의 식민지 개척 및 활동을 돕는 것, 곧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의 착취를 위한 기관이었습니다.

서울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 지사 건물, 1972년 철거, 현재 하나은행 을지로 2가 영업부 건물, 출처 : 나무위키

1909년 1월부터 대한제국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원래는 대한제국, 일본의 양쪽 국적의 회사였으나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17년 본점을 도쿄로 옮겼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로고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도쿄 본사 건물, 출처 : 나무위키, 위키백과

 

다른 식민지인 타이완,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영업지역이 확대되었고, 1938년에는 9개 지점과 831명의 직원을 두었습니다. 조선인 간부로는 부총재 민영기와 이사 한상룡이 있었습니다.

1945년 11월 10일 미 군정에 의해 신조선회사로 개편되었습니다. 1945년 9월 25일 미 군정이 제정한 "패전국 소속 재판의 동결 및 이전제한의 건"과 1945년 12월 6일 제정한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에 의해 모든 한국내 일본인 소유재산(적산)은 미군정청 소유가 되었습니다.

미군정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재산을 인수 개편하여 "신조선회사"로 개명했다가 1946년 2월 21일 신한공사를 창립하였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주요 사업 내용

 

1905년 한국통감부가 설치된 지 3년 후인 1908년 일제가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토지 및 자원 수탈 목적으로 인도제국을 식민지화했던 대영제국의 동인도 회사를 본떠서 세워졌습니다.

1908년 일본 정부의 훈령 및 내각 의회의 승인하에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 통과되자 조선에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한 척식 사업화에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농업 토지의 매매, 임차, 경영, 관리, 건물의 건설, 매매, 대차 그리고 특히 오단백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얼마 안 되는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일본 소작인들의 한국으로의 이민을 지원하는 동척농업이민계획을 펼쳤으며, 조선 각지에 일본인 촌락을 건설하고 정착을 위한 많은 특혜를 베풀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식산은행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대표적인 기관이었습니다. 고대 로마 제국과 근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일본의 평화 및 번영과 안정을 위해 식민지를 수탈하던 기관이었습니다.

처음 대한제국으로 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자본으로 출자받은 후 토지 매입으로 1913년까지 4만 1,148정보를 매입하였으며 조선 총독부에 의해 토지조사사업으로 국유지불하에 의해 1917년말 7만 5,178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여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최대 지주가 되었습니다.

1917년까지는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인 이주, 농업경영, 토지경영, 토지개량, 임업경영이 주력 사업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서는 1916년 쌀폭등이라고 불린 식량 부족에 따른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조선에서의 식량 수탈을 실시하였습니다.

수탈한 토지를 기반으로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을 한국 각지에 정착시키는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1917년까지 매년 1천호, 1926년까지 매년 360호 정도의 이민을 받아 1926년까지 9,096호가 한국에 정착하였습니다.

이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지원 아래 직접 경작하기보다는 지주가 되어 조선민중을 착취 압박한 일제의 대변자 내지 앞잡이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작민들에 대한 수탈은 한국인들의 대규모 해외 이주를 불렀습니다. 1933년까지 일본 본토로 113만 5832명, 만주와 연해주로 150만여 명이 이주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식민지 개척을 위한 척식자금을 운영하는 것은 주요 업무 중의 하나로 1920년대에 만주 및 몽골 지역 진출을 위해 농공업개발 자금의 공급 사업을 벌였습니다.

1920년대 이후 광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투자사업을 확대하여 동척계라 불리는 기업집단이 되었습니다. 1945년에는 이러한 회사가 52개사에 달했습니다. 조선유연탄, 동척광업, 비봉농사, 북선개발, 삼화광업, 조선아연광업, 조선도시경영, 해남공사 등이 있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에는 광업 부분으로 확장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 사업을 지원하였습니다.

해방이후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제국의 패망 이후 한국 남부를 지배한 미군정은 1945년 9월 25일 제정된 "패전국 소속 재산의 동결 및 이전제한의 건"과 1945년 12월 6일 제정된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에 의해 모든 한국내 일본인 소유재산(적산)을 미군정청 소유로 몰수하였습니다.

이 회사의 소유경지는 한국 논밭 경지의 12.3%에 달했으며 소속된 농가는 58만 7,974호로 전체농가의 217만 2,435호의 27.1%가 됩니다.

이때 동양척식회사의 소유재산을 인수 개편하여 "신조선회사"로 개명하였으며, 1946년 2월 21일 신한공사를 창설하였다.

신한공사는 1948년 3월 22일에 과도정부 산하 중앙토지행정처로 바뀌었고, 이를 매게로 미군정에서 소유하던 토지를 한국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여 토지개혁을 완수하였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건물

부산

동양척식회사 부산지점은 대한민국 해방과 더불어 부산 주재 미국 문화원, 주부산 미국 영사관으로 쓰이다가 1996년 미국연방정부에 의해 폐쇄되고, 2층의 영사관도 철수하였습니다. 2003년 부산근대 역사관으로 정식 개관하였고, 2023년 부산근현대역사관으로 재개관하였습니다.

대전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은 1922년도에 건립되어 현재도 대전 구도심에 남아있으며, 등록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광복이후 대전체신청, 대전전신전화국으로 사용되었으며, 1984년 민간에 매각되어 상업용 건물로 쓰이고 있습니다. 상업시설로 개조되면서 내외관이 많이 변형되었으나, 2004년 9월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목표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은 전라남도 기념물 17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옛 일본인 거류지에 아직 남아있습니다.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으로 개장하여 근대사진전을 열고 있습니다.

cf, 일제의 조선의 경제적 수탈 기관과 정책들

동양척식주식회사 :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경제 기과능로 조선 경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조선식산은행 : 특수한 은행으로, 평시에는 산미증식계획의 자금을 뒷받침했고, 전시에는 군수산업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조선은행 : 조선은행권 발행으로 조석 식민통치비용을 조달하는 기관이었습니다.

토지조사사업 : 조선 경제의 기반인 농지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는 식민 지배에 필수적인 사업이었습니다.

곡류수용령 : 1918년 일본 본토로 조선 쌀을 옮기는 정책이었습니다.

산미증식계획 : 일본의 농업이 위기를 맞고 식량난이 벌어지자, 조선을 농업 생산 기지로 개조하는 사업이었습니다.

농촌진흥운동 : 조선총독부가 주도하여 1932~1940년 동안 전개하였던 관제농민운동이었습니다.

남면북양 : 공업 원료 증산의 정책으로,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면화를 재배하게 하고, 북쪽에서는 가구당 5마리씩 양을 사육하게 한 정책이다.

 

이상끝